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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나라, 미국
[홍실이의 이상한 제국의 앨리스](2) – 닥터 힘멜스타인을 만나서
홍실이
신비한 나라, 미국
미국의 보건 관련 연구자나 공무원들을 만나서 가끔 으쓱할 때가 있다. “한국에는 혹시 공적으로 운영되는 의료보험제도가 있수?”고 물어봐 줄 때. “당근! 우리는 국민건강보험(National Health Insurance)이 있지”라고 답해주면 상대방은 “에휴~ 역시 우리만….” 하면서 부러워하기 일쑤다. 하지만 뭐 이름이 좋아 ‘국민건강보험’이지, 보장 수준으로 보자면 어디 내놓고 자랑하기 참으로 민망한 지라 더 이상은 깊게 이야기 안 하는 게 보통이다 (아무래도 나는 애국자 같다). 사실, OECD 30개국의 보건 부문 공공지출 비율을 놓고 보면, 최근 몇 년 동안 미국과 멕시코가 꼴찌를 다투고 우리는 자랑스럽게도(!) 끝에서 3등을 줄곧 지켜왔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하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의학․보건학의 세계적 석학들이 떼거지로 모여 살고, 이 모 회장님께서 친히 왕림하시어 치료를 받으셨다는 그 유명한 엠디 앤더슨 같은 슈퍼 울트라 일류 병원들이 즐비하니 늘어서 있으며, 의료비 지출이 전 세계 으뜸인 나라 (놀라지 마시라. 미국의 의료비 지출이 나머지 모든 국가 의료비 지출 합의 절반에 해당한다). 그러면서도 평균 수명과 영아 사망률은 세계 27등, 31등밖에 안 되고 인구의 15%가 의료보험이 없는 신비한 나라.
이 마당에 지구 반대편, ‘보건 부문 공공지출 끝에서 3등인 OECD 국가’가 이런 미국을 본받아 의료‘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겠다고 나서니 이거 원, 나로서는 접수가 잘 안 되는 상황이다. 물론 미국인의 건강 수준이 기대만큼 좋지 못한 게 전적으로 보건의료제도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보기로 하고 (이거야말로 내 전공이지. 으쓱~), 오늘은 미국의 보건의료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건지, 진보 진영은 이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간략히 소개나 해볼까 한다.
뉴요커들의 이야기 – 그들은 이렇게 달랐다.
5월 중순부터 뉴욕 타임즈에는 「계급이 문제다 Class Matters」라는 연재 기획 기사가 실리고 있다. 그 중 두 번째 기사(2005.5.16 “미국 상류층의 삶은 더 나을 뿐 아니라 더 길기도 하다”)에 등장한 세 명의 심근경색(심장은 우리 몸의 펌프로서, 혈관을 통해 산소와 영양분이 우리 몸 구석구석에 전달시키는 일을 한다. 심장도 일을 하려면 다른 장기와 마찬가지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하는데, 이를 맡는 혈관이 관상동맥. 그리고 동맥경화증 등으로 인해 관상동맥이 막혀서 심장 근육에 산소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고 심장 근육이 파괴되는 상태가 바로 심근경색인데, 제 때 응급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르는 매우 위중한 질병이며 미국인들에게는 가장 흔한 사망 원인 중 하나이다. 막힌 혈관을 뚫어주기 위해서는 혈전 용해제를 쓰거나 혈관성형술을 시행해야 한다. 이는 가느다란 관을 혈관에 삽입하여 좁아진 관상동맥을 넓히고 다시 좁아지지 않게 스텐트를 이식하는 시술로서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환자들을 살펴보자.
작년 5월, 건축가인 밀리(Jean G. Miele) 씨는 맨하탄에서 친구들과 함께 7백 불짜리 (75만원!! 와, 부러워) 초밥으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던 중 가슴에 극심한 통증과 호흡 곤란을 느끼다가 쓰러졌다. 비슷한 시기, 운송 관리직 노동자인 윌슨(Will L. Wilson) 씨는 부르클린의 아파트에서 여자 친구와 그들이 갔던 무제한 뷔페식당 (뭐 이것도 괜찮지 ^^)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가슴에 뜨거운 다리미에 댄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침대로 쓰러졌다.
한편, 폴란드 출신의 가정부 고라(Ewa Rynczak Gora) 씨는 브루클린-퀸즈 간 고속도로변에 자리한 시끄러운 월세방에서 브릿지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식은땀이 나면서 토할 것 같은 느낌을 경험했다. 이 세 사람.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상황이 닥칠 거라고 예상치 못했고 세 명 모두 극심한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그런데 그 다음은?
밀리 씨 심장의 오른쪽 관상동맥이 막혀버렸던 그 순간, 함께 있던 두 명의 현명한 친구들은 택시를 불러달라는 밀리 씨의 의견을 묵살하고 구급차를 불렀다. 그 곳은 맨하탄 중심가였기 때문에 근처에는 최신의 응급 심장 치료 기술을 보유한 대형 병원이 두 군데 있었고, 구급 요원은 어디를 가고 싶은지 밀리 씨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그는 응급실이 번잡하기로 소문난 뉴욕 시립 벨레뷰(Bellevue) 병원을 지나쳐 상대적으로 부유층들이 잘 가는 뉴욕 대학 부속 병원 중 하나인 티치(Tisch) 병원을 선택했다. 밀리 씨는 병원 도착 수 분만에 각종 절차를 끝내고, 심근경색 치료의 표준이라고 알려진 혈관성형술을 받기 위해 수술대에 누울 수 있었다. 시술을 맡은 의사는 이미 2만 5천례의 임상 경험을 가지고 있는 54세의 심장전문의. 오후 3시 52분, 맨하탄 거리에서 증상이 발생한지 채 두 시간도 되기 전에 (이거 진짜 믿기 어려운 속도!!!) 그의 관상동맥에는 관이 삽입되고 막혔던 곳이 뚫리면서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재발을 막기 위한 스텐트가 이식되었다. 밀리 씨는 각종 재활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와 함께 이틀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53세의 윌슨 씨, 처음에는 자신이 심한 소화불량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 친구가 우겨서 겨우 구급차를 불렀고, 구급 요원은 근처에 있는 두 군데 병원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그 두 곳 모두 혈관성형술에 관한 주 인증이 없는 곳이었다. 윌슨 씨는 최 빈곤 지역들을 담당하는 병원인 우드헐(Woodhull) 메디컬 센터를 지나 브루클린(Brooklyn) 병원을 선택했고, 그 곳에서 혈전 용해 약물을 투여 받았다. 처음에는 좀 효과가 있는 듯했지만, 다시 혈관이 막혀서 결국 다음날 아침 맨하탄에 있는 뉴욕-장로 병원 웨일 코넬 (Weill Cornell) 센터로 옮겨져 혈관성형술을 받게 되었다. 윌슨 씨는 5일을 더 입원해 있었으며, 퇴원 시에는 밀리 씨와 똑같은 여러 가지 비싼 약들을 처방받았다.
고라 씨는 구급차를 부르겠다는 남편을 만류하며 보드카 한 잔과 소금물, 두 배 용량의 고혈압 약을 먹었지만 증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남편이 구급차를 불렀는데 그녀가 타지 않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구급 요원은 물어볼 것도 없이 그녀를 윌슨 씨가 거부했던 그 우드헐 메디컬 센터로 데려갔다. 그녀가 응급실에 도착한 것은 저녁 10시 반, 응급실은 매우 분주했고 당직 의사는 두 시간 후에야 나타났다. 그리고 나서도 몇 시간 동안 이러저러한 검사들이 이어졌고 항응고제와 항고혈압제가 투여되었다. 그녀의 증상은 사라졌지만, 추가 발생의 위험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심혈관 조영술이 필요했다. 이 병원에는 그런 설비가 없었기 때문에 앞서 밀리 씨가 거부했던 벨레뷰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예상치 못한 고열 때문에 검사는 취소되었고 2주 동안 감염 치료를 받아야 했다. 끝내 그녀는 심혈관 조영술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그 동안 모르고 있었던 내분비 질환, 무릎 관절 이상, 피부병들이 발견되는 바람에 심장병에 덧붙여 이들의 치료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녀의 주급이 331불 (약 40만원)이고, 그나마 직장에 완전히 복귀할 수 있을지도 불안한데, 이제 매달 80불의 본인부담금 고지서가 날아오고 약사는 그녀의 약제비가 보험부담 상한선까지 도달했다는 안내장을 보내왔다.
자, 돈이 얼마나 있고, 어떤 의료보험에 가입해있는지에 따라 선택의 폭과 그 결과는 이렇게 달라진다. 더구나 지금 4천만 명이 넘는 미국인들은 고라 씨 수준의 의료보험조차 없는 상황. 이것이 미국이다.
닥터 힘멜스타인을 만나서….
사정이 이렇다보니,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다들 한 마디씩 의료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뉴욕타임즈의 인기 칼럼니스트이자 나름 진보적인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아예 작정을 하고 요즘 시리즈 칼럼을 내보내고 있을 정도. 그는 미국 의료가 돈만 많이 들어가고 결과가 후진 것이 이데올로기와 사심 어린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 뭐든지 민간이 좋고 정부가 개입하면 안 된다는 자유방임 이데올로기와 제약/병원 산업의 이해관계. 그는 지금의 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곧 대란이 벌어질 거라고 줄곧 협박 수준의 글을 날리고 있다.
한편, 올해 2월에 발표되어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한 논문(“Illness and Injury as Contributors to Bankruptcy,” Himmelstein et al, Health Affairs Web Exclusive, February 2, 2005 (www.pnhp.org/bankruptcy/uninsured.html)은 미국 내에서 연간 파산자의 절반 (약 2백만 명)이 의료비 때문에 파산 (소위 medical bankruptcy)하게 되었으며, 놀랍게도 그들 중 3/4는 처음 질병에 걸렸을 때 의료보험이 있던 사람들이었다고 밝혔다. 의료비는 자꾸만 오르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보험 혜택은 갈수록 줄어드는데다, 질병 때문에 일자리를 잃게 되면 그나마 보험을 상실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래서 저자들은 보험의 보장성을 대폭 강화하고, 특히 고용상태로부터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공적 보장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이 바로 미국 내 국민건강보험(National Health Program) 도입 운동을 벌이고 있는 PNHP (Physicians for National Health Program; 국민건강보험을 위한 의사들) 회원들이다.
이들은 의사는 물론, 시민들에 대한 교육 활동, 관련 학술 논문 발표, 법안 발의 운동 등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는데, 마침, 이 논문의 저자이자 PNHP의 핵심 회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힘멜스타인(David U. Himmelstein) 아저씨가 우리 동네 주민이다. 지난 3월 폴 스위지 추모 모임 때 한 번 본 적도 있고 해서, 직접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지난 5월 26일 오후, 그의 진료실이 있는 캠브리지 병원(Cambridge Hospital)을 찾아갔더랬다 (집에서 걸어가니까 겨우 10분 ^^). 아저씨, 꽁지머리에 캐주얼 차림으로 앉아 있는 품새가 아무래도 과거에 한 가닥 하는 히피였던 거 같다. 참고로, 이 날 인터뷰에는 나의 딸리는 지식(부끄 -.-)을 보완해주시고자 진짜(!) 보건정책 전공자이신 K선생님께서 동행하는 수고를 해주셨다.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 우선, 미국 의료 제도의 특징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시면 좋겠어요.
☆ 재원과 관련하여 의료 보장부터 말씀드리자면, 크게 네 가지 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민간의료보험이죠. 보험료는 개인과 고용주가 분담하는데, 고용주의 분담이 법적으로 강제된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저 같은 경우는 일하는 병원에서 전체 보험료의 70%를 내주고, 제가 30%를 부담하는데 어떤 기업은 100%를 부담하기도 하고 어떤 곳은 아예 한 푼도 안 내주는 곳도 있어요. 전체 미국인의 60% 정도가 민간 보험에 의존하고 있지요.
두 번째는 메디케어 (Medicare)라고, 사회보장세를 기반으로 정부가 장애인이나 65세 이상 노인에게 급여를 제공하는 건데 미국인의 약 8%가 여기에 적용받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아주 가난한 이들에게 제공되는 메디케이드 (Medicaid) 서비스가 있는데 이건 주 정부 예산에 연방 정부의 지원이 보태져서 시행되는 거죠. 메디케어는 전체 노인에게 해당하고 자신도 결국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정부 예산 증액에 비교적 호의적인데 비해, 메디케이드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는 정말 인색해요. 예산 삭감의 단골 메뉴랍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인구의 15%는 어떤 형태의 의료 보장도 받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의료 기관 형태를 보자면 지방자치 정부가 소유한 공공병원, 주로 자선 활동에서 시작되었던 비영리 민간 병원, 그리고 영리 병원들로 구분할 수 있어요.
★ 소위 선진국들은 20세기 초반부터 어떤 형태로든 공적 의료보장 체계를 갖추어왔는데, 미국만 유일하게 예외잖아요. 이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세요?
☆ 가장 중요한 이유는 조직화된 노동 운동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노동 운동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정치 정당이 없었다는 게 심각한 문제예요. 특히 사회보장을 둘러싼 노동 계급, 노동자 운동의 분열은 정말 치명적이었지요. 이를테면 아무런 사회적 보호 장치가 없는 상황에서 어떤 기업이 자기네 노동자들한테만 아주 높은 수준의 의료보험을 제공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당장 실업자가 되면 의료보험도 없어지는 판국이니 기업에서 하라는 대로 충실히 따르지 않겠어요? 노조들도 기업과 협상해서 이런 혜택을 하나라도 더 얻어내는 게 노조의 힘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실제로 1910-20년대 AFL은 국민건강보험제도가 국가의 노동자 감시를 확대하고 노조의 조직력을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한다 ㅡ.ㅡ ) 그러니 단기 비용 측면에서는 분명히 더 부담이 되지만 노동 계급의 분할을 통해 얻는 이익이 상대적으로 더 크기 때문에 기업들이 공적 보장에는 적극 반대하면서 이런 민간보험 체계를 옹호했던 거지요.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미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의료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어요. 이전에는 기업들이 의료를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 무언가 다른 상품의 생산을 원활하게 만드는 부수적인 요인으로 바라보았던 데 비해, 이 때부터는 의료 자체를 공정화 된 하나의 생산품으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이로부터 각종 제약 산업과 병원 자본이 의료 제도와 정책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죠.
★ 그래도 저는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이를테면 가까운 캐나다만 해도 미국 사회랑 크게 다를 게 없을 거 같은데 의료보장의 수준은 천지차이거든요.
☆ 그건 아니예요. 사회적 상황이 많이 달랐어요. 캐나다가 지금의 의료보장 제도를 가질 수 있게 된 데에는 토미 더글라스 (Tommy Douglas)(marishin 님의 블로그 참조 http://blog.jinbo.net/marishin/?cid=13&pid=110 ) 같은 뛰어난 개인들의 역할도 컸지만 무엇보다도 사스캐치완(Saskatchewan) 주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한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여기에서 강력한 공공 보험이 시작되었고 그 효과가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에 다른 주에서도 이를 거부할 수가 없었던 거죠. 단 한 지역에서라도 노동자 정당이 집권했던 차이가 이렇게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 그럼 이제 PNHP 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시겠어요? 언제, 어떤 계기로 모임이 시작이 되었는지….
☆ 우리가 모임을 결성한 건 1987년, 아주 강력한 반동의 움직임이 나타나던 시기였어요. 당시에 레이건 정부는 메디케이드를 비롯한 각종 빈곤층 지원 사업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있었거든요. 좀 회의가 들었던 것도 사실이예요. 이렇게 후진 제도를 그나마 지키자고 싸워야 하나… 그래도 워낙 공격이 거세다보니 이러면 안 된다는 상당한 수준의 공감대가 형성되었어요. 특히 의사들 사이에서는 의료보험 제도의 불합리함, 의료자본의 성장에 따른 의사들의 지위상실 등으로 불만이 팽배해 있었죠. 이 불만과 문제의식들을 진보적인 방향으로 조직화하는 게 우리의 과제였습니다.
여기에는 의사 사회가 고유한 통신망을 가지고 있다는 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이를테면 각종 학회지와 의사 신문, 학회 모임…. 온갖 방송과 신문이 반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우리는 이런 통로를 통해 우리의 의견들을 전파시킬 수 있었어요. 그리고 마침 선거를 맞이하여 여기 매사추세츠에서 의료보험에 대한 여론 조사를 실시했고 상당수의 의사들이 제도의 개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죠.
★ 제 편견일 수도 있지만 의사들이 본래 정치적으로 보수적인데다, 사회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어찌 이런?
☆ 글쎄요. 제가 볼 때… 사회가 안정되어 있을 때에는 의사들이 대개 보수적인 성향을 띄죠. 하지만 일단 사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 의사들은 좌 혹은 우에서 극단적인 활동성을 보여 왔습니다. 나치 독일에서 가장 최전선에 나서 설쳐댔던 집단도 의사들이고, 칠레 혁명에서 가장 급진적인 활동을 벌였던 집단 중의 하나도 의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일단 지식인들인데다가 사회의 여타 상류층과 달리 다른 사회 계층과 직접 접촉할 기회가 많기 때문에 각성의 기회가 많다는게 그 이유겠죠. (한국 상황을 보면… 글쎄올시다???) 미국의 68세대 중에서는 현실 속에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의사로 진출한 경우도 많이 있어요.
또 하나, 미국의 경우 가장 단시간 내에 자본화 된 산업 중 하나가 바로 보건의료 산업이예요. 이 속에서 의사들이 소자산계급 (petit bourgeois)에서 임노동자로, 뭐 실제 프롤레타리아라고 볼 수는 없지만, 급격한 지위 하락을 경험한 것도 큰 이유죠. 브레이버만 (Harry Braverman)의 책 『노동과 독점자본 Labor and Monopoly Capital』에 보면 미국 보건의료 산업의 자본화 과정이 잘 나와 있어요.
★ PNHP의 회원은 얼마나 되고, 연령, 성별 분포는 어떤가요? 설마 68세대 노친네들만?
☆ 전체 회원은 13,000명 쯤 되고, 성별 분포는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연령대는 크게 세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어요. 우선 1930-40년대 비교적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했던 시대를 경험한 세대, 제 어머니도 당시 공산당 활동을 하셨더랬죠. 그리고 68을 경험한 현재의 4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세대, 제가 여기 해당합니다. 그리고 젊은 의사들과 의대생들. 우리는 특히 이들 젊은 세대를 모으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요. 그래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면 학생들한테 여행 경비와 등록비등을 지원하기도 합니다.
★ 홈페이지 (http://www.pnhp.org/)에 자세히 나와 있기는 합니다만, PNHP의 주장을 간략하게 몇 마디로 정리해주시겠어요?
☆ 현재 개인과 개별 기업들이 민간 보험 회사와 계약에 의해 의료보험을 유지하고 그러다보니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윤 동기에 밀린 취약한 보장성은 물론이거니와 비용 부담 때문에 기업들의 보험 제공이 점차 줄어들고, 또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다보니 그 행정비용이 엄청나죠. 이걸 국민건강보험, 궁극적으로 누진적 조세를 통해 정부가 단일 보험자(single payer) 역할을 함으로써 소득과 관계없이 누구나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행정 간소화를 통해 비효율성을 개선하자는 겁니다. 이렇게 되려면 민간 보험과 영리 병원들이 금지되어야겠죠.
★ 잉, 저기요. 여기 미국, 자본주의 사횐데… 어떻게 기업을 막 금지시키고 그래요?
☆ 안 될 게 뭐죠? 민간 보안/경비 업체들이 많이 있지만 여전히 소방서, 경찰서는 정부가 운영하고 있잖아요? 캐나다도 60년대까지는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처음으로 사회보험 운동이 시작된 게 1916년이었고, 실제로 이를 도입한 건 67년, 그것도 그나마 한 주에서 시작되었죠. 전국적으로 국민건강보험법이 통과된 것은 71년이예요. 50년도 넘게 걸린 거죠. 이게 쉽다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지만, 못 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 이에 대한 각계(!)의 반응이 궁금한데요.
☆ 우선, 민간 의료보험 기업과 의료 자본의 반응이야 뭐 분명하죠. 이를테면 지난 2000년에 여기 매사추세츠에서 우리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주 정부를 단일 보험자로 하는 의료보험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했었는데, 병원 자본, 제약회사, 보험회사들이 똘똘 뭉쳐서 강력한 반대 활동을 벌였어요. 당시에 우리가 홍보에 쓴 돈이 2만 달러였는데 이들은 6백만 달러를 썼답니다. 결국 투표에서는 겨우 2% 차이로 법안 통과가 저지되었죠.
★의사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특히 AMA(American Medical Association, 미국 의사협회) 같은 단체는…
☆ 여론 조사 결과에서 나타나듯, 의사 사회에서는 국민 건강보험에 대한 찬성이 이미 대세를 이루고 있어요. (실제로 학술 잡지에 이러한 결과들이 여러 번 발표되었음) 그리고 AMA의 경우, 미국 의사를 대표하는 조직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일단 이 조직은 대개 개업 의사들로 구성된 데다 비즈니스 성격이 매우 강하고 그야말로 반동 조직이라고 보면 되요. (참고로, 작년에 공화당 기부 1위를 AMA가 차지했다. 이들의 흰 가운에 둘러싸여 부시가 연설하던 걸 기억하면 우웩~). 물론 여기 회원들도 현재의 의료체계에 대한 불만은 많아요.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50년대, 의사들이 살기 좋았던 그 시대로 돌아가는 거랍니다. (이 마당에서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으니, “맞아요. 한국의사들이 원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그래도 우리 의견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어요. 얼마 전에 제 파트너가 이 이슈를 가지고 AMA 총회에서 강연을 했는데 끝나자 절반은 일어서서 박수를 치고, 나머지 절반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고들 하더군요. 적어도 절반은 여기에 호의적인 거죠.
★ 네.. 그럼 다른 기업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신문에 보면 GM 같은 회사는 직원들 의료 보험료 때문에 자기네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투덜대던데… (통계를 보면, GM 자동차 한 대 가격 중 1500불이 직원 의료보험료에 해당한단다)
☆ 이게, 생각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예요. 기업들의 태도는 양가적이죠. 의료보험에 지출하는 경비가 엄청나기 때문에 지금의 민간의료보험 방식에 불만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본들 간의 연대라는 게 있잖아요. 인적으로나 물적으로 이들은 긴밀하게 얽혀있습니다. 지분을 가지고 있다던가, 직접 투자를 하고 있다던가, 하다못해 동창회 가면 다들 만나는 사이잖아요? 또 월마트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기업들은 현재 의료보험을 제공하지 않거나 축소하는 추세에 있는데, 이들에게는 국민건강보험이 오히려 새로운 짐이 되는 거죠. 이런 점에서 보건의료산업+보험자본 대(對) 다른 산업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눌 수는 없습니다. 기업들이 일방적으로 우리 편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거죠.
★ 이 운동이 성공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뭐라 할 수 있을까요?
☆ 앞서도 지적했지만 전체적인 진보 운동의 허약함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 보건의료분야가 그나마 가장 선진적인 분야라니까요.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전술은 놀랄 만큼 강력한데 비해 진보 진영, 특히 선도적인 역할을 해나가야 할 AFL-CIO가 심하게 분열되어 있어요. (그러면서 AFL-CIO 간부의 사례를 들어 어쩌구저쩌구… 사람 이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헷갈려 도저히 받아쓸 수 없었음. 독자들께 죄송 ㅜ.ㅜ)
★ 그렇다면 향후 이 운동의 전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예측하고 계신지요?
☆ 우리는 매우 낙관적입니다. 또 그래야 하고… 우리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낙관을 갖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정도 근거가 있습니다. 우선, 현재의 상황이 너무나 불안정하여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한 한계 지점까지 왔어요. 급격히 좋아지던가, 혹은 나빠지던가… 어떤 형식으로든 변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이야기죠. 두 번째로, 의료보장 뿐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보장에 대한 공격이 상당히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주장이 그 어느 때보다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를 어떻게 조직해내느냐가 이 운동의 성패를 가르겠죠. 그게 우리의 임무이고…
★ 조금 다른 주제를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현재 한국 정부가 의료기관의 영리법인 허용을 추진하고 있거든요. 사실, 영리병원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저로서는 상이 잘 안 그려져요. (솔직하게는, 지금의 병원들이 영리가 아닌데도 그 정도인데, 영리기관으로 바뀌면 도대체 뭘 더 얼마나 하겠다는 건지…) 여기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해주세요.
☆ 의료의 질에 관해서라면 결론은 명백합니다. 영리 병원이 비영리 기관들에 비해 환자의 사망률이 유의하게 높아요. 여러 가지 다른 요인들을 고려하고 나서도. 특히 인건비 절감을 위한 전문 인력의 축소가 중요한 기여를 한다고 봐요. 이를테면 간호 인력은 훨씬 적은데 비해 행정인력 비중이 높은…
또한 비용 면에서도 영리 병원이 훨씬 낭비 요소가 큽니다. (그의 논문에 의하면 영리 병원은 비용 최소화 장치 cost minimizer 라기 보다 이윤 최대화 장치 profit maximizer) 투자자에게 돌아가야 할 이윤이 확보되어야 하는데다, 고위 간부들에게 높은 보너스도 지급해야 하고, 행정 비용이 훨씬 많이 들죠. 그러다보니 똑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환자의 중증도를 높이 평가해서 진료비를 많이 청구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를테면 폐렴 환자를 중증도에 따라 단순, 중등, 복잡형으로 구분하여 포괄수가제 (DRG: Diagnosis-related group)를 적용하는데, 가급적이면 환자를 복잡형으로 평가해서 수가를 많이 받는 식으로 한다는 거죠. 또, 투자설비에 들어가는 감가상각비를 높게 계상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수적인 수입 창출을 위해서 포괄수가제 적용을 받지 않는 부설 요양센터나 재활 센터를 만들어놓고 환자를 그 쪽으로 후송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죠. (뿐만 아니라, 다른 자료에 보면 허위 청구로 수백만 달러의 법정 소송에 걸려 있는 병원들 대부분이 영리 병원이라는… ㅡ.ㅡ ) 환자를 “돈이 되는 환자”와 “돈이 안 되는 환자”로 구분하는 것 또한 만연해 있습니다. 그리고 가급적 응급실을 운영하지 않는데, 대개 응급 상황이나 사고라는 게 가난한 사람, 보험이 없는 사람들한테서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예요. 새로운 영리병원들은 대개 비영리 병원들 근처에 자리를 잡고 돈 안 되는 환자들은 여기로 보낸 다음 정형외과나 심장내과 같은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하는 식으로 일을 하죠. (관심 있는 독자는 추가로 아래의 논문사망률 : Devereaux PJ et al. A systemic review and meta-analysis of studies compaaring mortality rates of private for-profit and private non-for-profit hospitals. CMAJ 2002;166(11):1399-406 . 비용 : Devereaux PJ et al. Payment for care at private for-profit and private non-for-profit hospitals: a systemic review and meta-analysis. CMAJ 2004;170(12):1817-24, Woolhandler S, Himmelstein DU. The high costs of for-profit care. CMAJ 2004;170(12):1814-15
들을 참조하세요).
★ 근데, 돈을 많이 벌어오라고 병원에서 쪼아대면 임상적 자율성이 침해된다고 의사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반응은 어떤가요?
☆ 의사들이 불만이 있는 건 사실이죠. 하지만 비영리 병원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관대한 것도 아니예요. 돈 벌어오라고 쪼아대기는 마찬가지죠. 우리는 이걸 뱀파이어 효과라고 부르는데, 영리병원의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들의 등장으로 인해 병원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비즈니스 마인드를 촉진하는 상황이 진짜 위험한 겁니다. 여기 캠브리지 병원은 공공병원이라 상대적으로 덜하기는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리고 영리병원의 상당수에서 의사들 스스로가 투자자로 참여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단순하게 해석하기는 곤란해요.
★ 한국에 영리 병원이 허용되고 미국의 병원 자본이 침투하면 그 시작은 미약하더라도 장기적인 영향은 클 것 같은데요. 지금의 국민건강보험 체계도 위협받을 것 같고… 무엇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 우선 의료 이용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공적 보장체계가 흔들리면서 사회적 연대에 심대한 타격을 주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경험을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잖아요. (정말 슬픈 이야기… ) 그리고 제 생각에는 “의료도 역시 상품”이라는 믿음이 고착된다는 점이 가장 위험한 문제라고 봅니다. 여기서부터 많은 문제들이 시작되죠. 며칠 전 뉴욕타임즈 기사 보셨어요? 인공심박동기의 제조 결함 때문에 젊은 환자가 죽었잖아요. 회사는 기기에 가능성을 미리 알고도 의사한테 알려주지 않았어요. 문제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낮다는 둥, 재수술하는 게 더 위험하다는 둥… 의료도 그냥 여러 가지 상품 중에 하나인 거예요. 불량품도 가끔 나오는…
★ 어쨌든, 의료 문제를 넘어서 여기 PNHP 활동의 성공 혹은 실패가 이 사회에서 갖는 의미가 정말 클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클 것이고… 이런 면에서라도 이 운동이 꼭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긴 시간 질문에 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저 역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또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