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바라크, 많이 묵었다. 고만해라”
△ 서울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과 학생들이 이집트의 민주화 촉구 집회를 갖고 있다.
[현장]이집트 민주화 촉구 집회…“‘카이로의 봄’ 어서 오라”
피라미드, 스핑크스, 나일강, 클레오파트라, 람세스, 오벨리스크…. 화려한 고대문명을 꽃피웠던 이집트의 상징기호들이다. 이집트를 가보지 않았어도 이 나라 이름만 들으면 누구라도 쉽게 이 이름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집트라는 나라 이름에서 ‘독재국가’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드물다.
9일 오전 11시 서울 용산구 한남동 주한이집트대사관 앞. 시민단체 ‘다함께’, 민주노동당 인권위원회, 인권실천시민연대, 보건의료단체연합 회원과 대학생 40여명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제는 충분하다.”
이들은 지난 24년 동안 권좌에 눌러붙어 있는 호스니 무바라크(77) 이집트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한국의 운동가들이 2000년대에 펼치는 국제연대활동의 한 장면이었다.
지난 1981년 암살당한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의 자리를 승계한 무바라크 대통령은 한때 중동 분쟁의 해결사 구실을 하며 주목받았으나, 지금은 무려 24년 동안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독재자로 낙인찍혀 있다. 이집트는 무바라크 정권에 의해 90년대 이후 대미 종속이 심화된 데다,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 격차 등으로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오는 9월 대선을 앞두고 최근 민주화 요구가 불붙었다. 각 정당·시민단체로 이뤄진 이집트 민주화운동 단체는 수도 카이로 등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무바라크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 단체의 이름은 ‘키파야’로, 아랍어로 ‘충분하다’, ‘이제는 됐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한국영화 <친구>의 대사로 치면 “많이 묵었다 아이가. 고만해라”가 되는 셈이다.
키파야 운동 등 민주화 요구에 직면한 무바라크 대통령은 지난 5월25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만들어 내놓았지만, ‘눈 가리고 아웅’식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야당이 후보를 내려면 창당한 지 5년이 지나야 하고, 상·하원 의석의 최소 5%를 얻어야 하는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이집트 안에 이 요건을 채우 야당이 없기 때문이다. 무소속 후보는 입후보 하기 위해 상·하원과 지방의회 의원 250명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했지만,이 역시 사실상 불가능하다. 집권 여당인 국가민주당(NDP)이 하원 454석 가운데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탓에 대선 출마의 길이 막힌 야당과 독립후보(무슬림형제단)는 오는 9월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에 무바라크 대통령이 6년 임기제 대통령에 다시 출마할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무바라크의 아들 가말도 아버지의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 집회 참석자들이 이집트 대사관 관계자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하고 있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24년간 철권통치를 자행했던 무바라크의 종신 집권 야욕이 본격화되고 있다”며 “국민의 참정권 보장 등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조건을 이행하라는 민주화운동에 대해 야만적인 탄압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미국은 이집트를 중동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대변할 일종의 위성국가로 양성했다”며 “미국은 무바라크 일파에 대한 지지를 즉각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지난 3월 이집트 현지를 다녀온 박준규 ‘다함께’ 국제연락 담당은 “카이로는 관광객으로 넘쳐나지만, 국민들은 길거리에서 군인들의 통제를 받으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다”며 “무바라크 정권은 납치와 고문을 자행하며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이집트 정부가 지난 25일 카이로에서 벌어진 민주화운동 시위에서 여성들을 발가벗기고 폭행했다고 폭로하는 이집트 시민단체의 편지도 낭독됐다.
오창익 인권실천연대 사무국장은 “우리가 겪었던 인권탄압이 2005년 이집트에서 벌어져 4·19혁명과 5·18 민주화 운동 같은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며 한국 시민단체와 이집트 민주화운동단체 사이의 ‘운명적’ 국제연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집트에 ‘카이로의 봄’은 올 것인가?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국제연대위원회 김병주 변호사는 “이집트에 하루 빨리 민주화가 꽃 피는데 우리의 국제연대 활동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사진 <한겨레> 온라인뉴스부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