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똑똑하게 만들어주는 미국의 의료제도
[이상한 제국의 엘리스](6) – 의료서비스 ‘선택의 자유’ 에 숨겨진 비밀
홍실이
미국의 보건의료체계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들이 존재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보건의료가 상품화되면서 공공성을 잃어버리고 극단적인 불평등으로 나타난다’는 점이겠지만, ‘고비용 저효율’ 구조, 특히 과다한 행정비용과 복잡한 절차 또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미국 의료비의 30%가 행정비용으로 쓰이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기이하지 않은가? ‘보이지 않는 손’께서 가장 합리적(!)인 결정을 해주실 터인데, 비효율이라니?
뉴욕타임즈에 소개되었던 사례를 한 번 보자.
77세의 클라우스너 할머니가 장 파열 치료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 돌아오니 집에 우편물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병원과 의사, 보험회사로부터 날아온 각종 청구서와 안내 편지들이다. 할머니는 감히(!) 뜯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날을 잡아 하나씩 봉투를 뜯어본다. 그 안에는 도대체 뭔지 알 수 없는 깨알 같은 글씨의 각종 코드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한 청구서는 길이가 무려 15쪽이다. 흑….
위장관 암에 걸린 매이어 씨는 치료 과정에 날아온 각 종 청구서에 질려버렸다. 서류봉투와 파일박스, 포스트잇을 이용해 분류하고 메모하고…. 하지만 서류들은 벽장을 채우고도 남았고, 거실 탁자와 의자에까지 펼쳐져 있다… 메이어씨는 이걸 모두 확인하고 진료비를 지불하는 일에 질려서 치료를 포기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이건 정말 코메디예요. 믿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럼 이 경우는 어떤가?
“진단과 치료에 관한 용어들이야 알죠. 그런데 이 코드? 모르죠. 도대체 뭐가 보험이 되고 안 된다는 건지 원… ”
누구의 인터뷰? 하버드 의대 교수인 미들톤 박사의 이야기다. 이야기를 좀더 들어보자. 그의 어머니는 갑상선 암 때문에 돌아가셨는데, 고령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처리하려고 노력했던 분이란다.
“수많은 다른 의사들로부터 청구서가 끊임없이 날아왔어요. 어머니는 수표를 쓰고 또 쓰고… 제가 확신하는데, 아마 같은 청구서에 여러 번 돈을 낸 적도 있을 거예요 ”
보다 못한 미들톤 박사는 결국 사회복지사를 임시로 고용해서 이 모든 복잡한 사무를 처리하도록 했다.
도대체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기는가? 의학 용어가 너무 전문적이라서? 보험회사가 불친절해서? 아니면 한국만큼 전자청구서와 인터넷 뱅킹이 활용되지 않아서?
문제는 보건의료제도가 시장을 중심으로 지나치게 분절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환자- 서비스 제공자 (의사, 병원, 약국) – 보험회사의 삼각관계가 ‘개별 계약’에 의해 움직이고, 그 계약 조건이라는 게 다양하기가 이를 데 없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표현대로라면 ‘선택의 자유’, ‘맞춤식 의료보장’이고, 내가 보기엔 ‘혼돈의 왕국’이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리도 많은 청구서가 날아들고, 환자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공부(ㅡ.ㅡ)를 해야 하는지, 의료보험 선택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 자동차 보험 상품 비교 웹 사이트가 인기 있듯, 미국에서는 건강보험 상품들을 비교하고 상담하는 웹 사이트가 무지하게 많다. 그 중 한 곳에 제시된 ‘올바른 보험 선택의 10계명’ 중 일부를 살펴보자.
우선 의사 선택의 문제. 내가 만나려는 주치의, 혹시 필요로 하는 전문의가 원하는 보험회사에 등록되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응급의료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응급 상황이 생겼을 때, 어느 병원이 이용 가능한지, 보험회사에서 말하는 ‘응급’의 정의가 뭔지, 주치의를 반드시 거쳐야만 갈 수 있는지 꼼꼼하게 챙겨야 한다. (근데, 장차 어떤 전문의가 필요할지, 응급실 이용은 어떻게 하게 될지 무슨 수로 알 수 있지?) 이런 문제를 소홀히 했다가는, (물론 꼼꼼하게 챙겼다고 해도) 나중에 복잡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를테면, 지난 8월 기사에 실린 사례 – 제인은 난소에 낭종이 발견되어 보험회사에 등록된 부인과 의사로부터 복강경 시술을 받다가 그만 낭종이 터져버렸다. 알고 보니 그 낭종은 악성 종양이었고, 암세포는 이미 복강 안에 전부 퍼져버린 상태다. 제인은 난소암 전문가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가입한 보험 회사의 등록 의사 명단에는 부인과 암 전문의가 없었다. 그래서 수개월(!) 동안 보험이 적용되는 암 전문의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결국, 보험회사에서 자신들과 계약하지 않은 전문의 진료에 대해서도 보험 적용을 해 주기로 합의했는데, 그 전문의가 자기 병원이 아닌 해당 보험회사 계약 병원에 와서 수술을 집도하는 조건으로였다.
혹시나 메디케이드 (빈곤층에게 적용되는 의료급여 서비스)같은 공적 보장제도에 속해 있다고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 또한 의료기관과 주 정부와 계약(강제 지정이 아닌)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갈 수 있는 갈 수 있는 곳과 없는 곳을 잘 알아두어야 한다. 이를테면 동네에 치과가 5군데 있는데 모두 ‘메디케이드 사절’이라고 되어 있으면 (설마? 하는 독자도 있겠지만, 엄연한 사실!) 이들 가난한 환자들에게 이 동네는 실질적인 무의촌(!)이 되는 것이다.
메디케이드 환자도 받는다는 치과 광고 (North Carolina 시내버스 안)
보험 선택 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처방 의약품에 대한 보험 적용 여부다. 사실 이는 의사에 관한 옵션보다도 더 다양하다. 하나도 적용 안 되는 것부터 모두 적용되는 것까지, 그리고 약물 종류에 따른 본인 부담금의 수준도 천차만별이고…. 노인들을 위한 의료보장 제도인 메디케어만 해도 의약품과 관련한 선택 사항과 계약 조건이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미국 노인네들은 모두 총명탕을 드시나, 이걸 다 어찌 다 알아듣나? 했더니만, 이를 상담해주는 전문 업체(!)도 많고, 일전에 한 교수의 이야기에 의하면…..
“너네 같이 보건학 전공한 젊은 사람들도 못 알아듣는데 노인들이 이해하시겠냐? 그냥 대충 하는 거지!”란다. 그랬구나 ㅠ.ㅠ
또 다른 중요한 고려 사항은 현재의 건강상태다. 기왕에 있던 질병은 보험 적용이 안 되거나 별도의 옵션이 달려 있는 경우가 흔하다. 일전에 본 TV 만화에서 Simpsons씨가 보험회사를 찾아가 자신의 건강 상태와 평소의 생활 행태를 모두 적고 나니 보험사 직원이 가슴팍에 대문짝만하게 빨간 글씨로 ‘UNINSURABLE(보험 가입 불가)’이라고 찍어주던 장면이 떠오른다. 항간에는 의료보험 사무실이 모두 5층에 있어서 거기까지 못 걸어 올라오는 환자들은 안 받는다는 (믿거나 말거나) 음모설도 있었다.
현재 건강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절실하게 의료보장이 필요한 이들이고, 공적인 의료보장제도라면 이런 부당한 ‘환자 고르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지만, 민간 보험회사가 볼 때 이런 사람들을 많이 받았다간 손실이 커진다. 너무 노골적인 장삿속 아니냐고 비난하지 말자. 민간 의료보험 회사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 존재하지, 환자의 건강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건강보험 비교 선택 사이트 : 본인은 물론 가족의 질병 과거력까지 체크!
그리고 최종적으로 비용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월 보험료가 얼마나 되는지, 의료 서비스 이용 시 공제 상한선이 정해져 있는 건지, 외래 방문시마다 정해진 분담금이 있는 건지, 있다면 상한선과 본인 분담액의 수준은 어떻게 되는지, 이용하는 서비스 종류에 따라 이것도 달라지는지…………
아, 미국인들은 어찌 이리 똑똑하더란 말이냐?
또한, 그 사이트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중요한 게 빠져 있다. 직장 생활을 하는 노동자라면, 보험료를 회사와 어떻게 분담하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미국은 법으로 기업의 분담율을 정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다만 분담금에 대해 세제 혜택을 주고 있음) 의료보험료를 한 푼도 내 주지 않는 기업(월마트 같은 곳)에서부터 보험금을 100% 다 내주는 기업까지 다양하다.
GM 같은 기업은 한창 잘 나가던 시절, 초과 이윤을 기반으로 현직/퇴직 직원들에게 전면 의료보험 (여기 노동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무상의료!)을 제공했었는데, 치솟는 보험료 때문에 죽겠다고 하소연을 하더니만 엊그제 그 혜택을 대폭 축소하기로 노사가 드디어(?) 합의했단다. (기업의 보험료 분담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에 있고, 이런 추가 비용(!)을 부담하기 싫어서 임시파견 노동자를 쓰는 비율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자, 어쨌든 이렇게 치밀한 연구와 계산 끝에 나에게 가장 알맞은 맞춤형 의료보험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제 덜컥 병이라도 걸릴라 치면, 앞서 소개한 클라우스너 할머니, 메이어 씨, 미들톤 박사의 노모, 제인처럼 주치의, 전문의, 약국, 병원의 고지서들과 지난한 투쟁을 벌이고, 보험회사와 협상 (혹은 애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 기다리고 있다. (환자 개개인의 보험 종류, 보험회사의 지급 약관을 모두 고려하여 보험회사와 환자 개인들에게 진료비를 청구해야 하는 의원/병원의 행정 업무나 보험 회사의 방대한 행정 업무에 관해서는 일단 잊자. 이것까지 한꺼번에 생각하려면 우리 머리에 쥐가 날 수도 있다.)
자, 청구서의 의학 전문 용어를 좀더 쉬운 설명으로, 15페이지짜리 우편물을 전자 고지서로 대체한다면 이 복잡성과 비효율의 문제가 과연 해결될 수 있을까?
‘선택의 자유’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일반인의 건전한(!) 상식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이 상황 – ‘이윤’이라는 개념을 빼 놓고 이를 설명할 수 있는가?
2005년10월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