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선진국 기준 ‘묻지마’ 약값 결정

선진국 기준 ‘묻지마’ 약값 결정

[한겨레 2006-05-03 08:06]    


[한겨레] 건강보험에서 지출되는 전체 요양급여 비용 중 약값의 비중은 2001년 4조1804억원에서 2005년에는 7조2289억원에 이를 정도로 가파르게 높아졌다. 지난 5년 동안에 무려 73%나 늘어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의 평균과 견줬을 때 우리나라 약값의 증가율은 2.1배나 된다. 한국인들이 약을 지나치게 좋아하기 때문일까? 가장 큰 문제는 현 약값 관리 방안에 심각한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으로 진단된다. 이는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공단이 자체 분석한 내부 자료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약값 증가의 원인과 문제점 및 제약업체들의 로비 실태를 짚었다.

현행 약값 관리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부적절한 약값 결정구조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이는 정부 및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내부 문서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약값 결정 적절한가?=먼저 항암제 ‘글리벡’같은 혁신적 신약의 경우 약값은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위스 등 이른바 선진 7개국의 약값을 기준으로 결정한다. ‘혁신적 신약’은 신약 가운데에서도 이전의 제품과는 다른 작용 기전을 가지며 약효가 매우 뛰어난 제품을 말한다. 문제는 선진 7개국의 약값이 적절한 기준인가라는 점이다. 건강보험공단의 내부 문서는 이와 관련해 ‘외국 7개국은 약가 수준과 소득 수준이 우리보다 높아 국내 신약의 가치가 고평가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더욱이 이 방식은 가격 결정에 중요한 요소인 국내 경제상황, 환자들의 지급능력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강주성 건강세상네트워크 공동대표는 “2002년 당시 만성백혈병 환자들은 생명줄이라고 할 수 있었던 글리벡이 눈 앞에 있으면서도 약값이 너무 비싸 이를 구입하지 못했다”며 “보건의료제도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어 환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액수도 달라지는데 다른 나라 약값이 우리나라 약값 결정의 기준이라니 너무 황당했다”고 말했다.

책 속의 값이 결정 기준?=게다가 선진 7개국 가운데 미국의 약값은 현지에서 팔리는 값이 아니다. 이른바 ‘레드 북’이란 책에 기록된 명목상의 약값이다. 시중 약값은 당연히 이 책에 기록된 약값보다 싸다. 그런데도 우리는 더 비싼 명목상의 약값을 국내 약값 결정 기준으로 삼고 있다. 약값 결정기구인 약제전문평가위원회의 한 위원은 “혁신적 신약의 경우 미국 때문에 약값이 15% 정도 올라간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약값 기준이 되는 국가군에서 미국을 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값싼 복제약 쓰는 장치 없다= 오리저널 의약품에 비해 복제약은 싸다. 하지만 의료계는 이렇게 싸고도 약효가 거의 같은 복제약보다 오리저널을 선호한다. 보건복지부 내부 문서는 이런 복제약을 쓰도록 하는 합법적인 인센티브가 거의 없는 점을 약값 증가 원인의 하나로 지목했다. 이런 복제약값조차도 학계는 사실상 비싸다고 지적하고 있다.

약 품질 개선장치도 없다=약의 효능이 아닌 약이 나온 순서대로 결정되는 현행 복제약품 결정구조도 문제다. 예컨대 한 오리지널 약의 복제약을 국내 제약사가 개발했을 경우 이 복제약의 약값은 오리지널의 80% 이하다. 문제는 이 약과 같은 성분의 복제약품 5번째까지는 똑같이 80% 이하다. 효과가 더 낫더라도 값은 어차피 매한가지다. 때문에 같은 성분의 복제약이 이미 보험약으로 등재돼 있으면 제약사에서는 품질을 개선하기보다는 판매에만 열을 올리게 된다. 이러다보니 연구개발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 결국 다국적 제약사의 뒤꽁무니만 따라가는 꼴이 된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자료를 보면 국내 제약사들의 연구개발비는 2004년 기준 평균 5% 미만이다. 다국적 제약사의 경우 거의 20%에 가깝게 투자하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해서 다국적 제약사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2005년 27%나 됐다.

약 많이 먹게 하는 구조도 문제=복지부 내부 문서는 약제비 증가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약 사용량의 가파른 증가’를 꼽고 있다. 고혈압, 당뇨 등을 앓는 노인인구 비중의 상승이 약 사용량 증가의 주요 배경이지만, 이것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의약분업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리베이트 등 음성적인 약 공급 구조, 건강 유지를 약에 의존하려는 국민의식도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국민의 무조건적인 약 선호도는 처방건당 의약품 품목 수에서도 나타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지난해 1분기에 처방건당 의약품 품목 수는 종합전문병원 평균 3.2개, 의원 4.22개로 선진국의 1~2개에 비해 훨씬 많다. 김양중 의료전문기자 himtra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