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글리벡 투쟁과 한미 FTA
[프로메테우스 2006-06-05 17:40]
△ 안기종 한국백혈병환우회 사무국장 ⓒ 프로메테우스 송기향
백혈병환우회 안기종 사무국장, “약가조정신청과 환자교육 준비중”
[프로메테우스 송기향 기자]
2002년 ‘글리벡 투쟁’은 백혈병 환자들이 정부와 다국적 제약회사를 상대로 싸워 스스로의 권리를 쟁취한 최초의 싸움이다. 그 누구도 환자복을 입은 환자들이 국가인권위원회 점거농성을 하는 등 직접 나서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들은 3년여 싸움을 통해 약값의 환자부담금을 30%에서 20%로 낮췄다. 또 글리벡을 생산하는 제약회사 노바티스로부터 환자부담금 20% 중 10%를 돌려주겠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한국백혈병환우회는 글리벡 투쟁 과정에서 구성됐다. 처음에는 약이 너무 비싸 먹을 수 없으니 적어도 우리의 경제적 여건 내에서 먹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는 모임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투쟁을 하면서 어려운 현실과 여러 가지 의료제도를 알게 됐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혈액질환 환자와 보호자의 권리를 개선하고, 보건의료 정책과 관련해 도움을 주는 단체로 발돋움했다. 그 때부터 한국백혈병환우회는 돈을 내면서도 눈치를 봐야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의 의료현실을 개선해나가는 일을 하고 있다.
한미 FTA의 1차 협상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글리벡 투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의료보건 분야를 일반 서비스 분야로 취급할 것을 요구하는 한미 FTA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비싼 약을 사먹는 환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환자 스스로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던 한국백혈병환우회는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안기종 한국백혈병환우회 사무국장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환자 스스로 싸워 성공한 글리벡 투쟁
글리벡은 어떤 약인가.
글리벡은 표적항암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의 항암치료제는 정상세포까지 공격했지만 글리벡은 암세포만 공격한다. 처음 나왔을 때 세계가 열광한 혁신적 치료제였다. 약을 먹은 후 5년 생존률이 93%나 된다. 예전에는 환자가 매년 500명 정도로 유지됐지만 지금은 1천800명으로 늘어났다.
글리벡 투쟁은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환우들은 글리벡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보건복지부에 약을 들여와달라고 요구했다. 미국 FDA(식품의약품)에서 승인이 나자 복지부는 긴급승인을 해 바로 국내로 들여왔다. 만수골수성백혈병은 병이 발견되고 만성기는 3~4년, 가속기는 6개월, 급성기는 3개월 지나면 사망한다. 복지부는 만성기를 제외하고 가속기와 급성기 환자만 보험승인이 날 때까지 약을 무료로 공급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이후에 복지부가 고시가 1만7000원을 제시했지만 노바티스가 이를 거부하고 2만5000원을 요구했다.
만성기 환자는 글리벡을 공급받지 못하고 가속기, 급성기로 넘어가야만 약을 먹을 수 있었다. 만성기에서 약을 먹으면 병의 진행이 멈추지만 못 먹고 가속기, 급성기로 진행되면 치료가 힘들어진다. 먹으면 93%가 살 수 있는 약이 있는데도 못 먹어서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환자들이 환자복을 입고 거리에 나가서 투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환자들이 국가인권위를 점거하는 등 결사적으로 투쟁해 복지부, 건강보험공단, 노바티스 모두 함부로 하지 못했다. 결국 약가가 2만3000원 정도로 결정이 되고 노바티스로부터 환자부담금의 10% 돌려받는 것으로 글리벡 투쟁이 마무리되었다.
환자가 직접 약을 먹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는 점,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제약회사를 상대로 싸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결코 환자들만으로는 이렇게 할 수 없었다. ‘글리벡공공성확대공대위’를 만들어 보건의료단체가 많이 도와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허청에 강제실시 요구, 국가인권위에 진정서 제출, 헌법소원 제기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법률적, 제도적인 것을 모두 이용해 얻어낸 성과였다.
될 때까지 강제실시 요구하겠다
한미 FTA를 앞둔 현재 글리벡 투쟁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FTA 보건의료 분야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강제실시’다. 글리벡 투쟁하면서 강제실시 요구가 처음 시도됐다. 그러나 제약회사 입장에서는 약가를 인하하게 되면 다른 나라 약가에 영향이 있기 때문에 쉽게 조정해 주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요구한 강제실시는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본인부담금을 20%로 낮추고 10%돌려받아 환자들의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환자가 다국적제약회사를 상대로 이렇게 약가를 인하해달라고 투쟁을 한 사례가 드물다. 한국에서도 글리벡 투쟁이 처음이었다. 앞으로 혁신적 신약이 계속 나올텐데 실패하더라도 강제실시를 꾸준히 요구할 것이다. 한번 되면 그 다음부터는 약가를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글리벡 투쟁에 다시 관심을 갖는 이유는 FTA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백혈병 환자들은 10%를 제약사로부터 돌려받는 등 혜택을 많이 받고 있어 관심이 적은 편이다. 다른 환우회는 제약회사의 로비 쪽에 노출되어 있어 투쟁하기 어렵다.
△ 안기종 사무국장이 백혈병 환자 가족과 상담을 하고 있다. ⓒ 프로메테우스 송기향
글리벡의 약가조정을 신청할 생각이다. 글리벡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약가를 정할 때 참고한 기준은 선진 7개국의 평균 약가였다. 그러나 당시에 미국과 스위스를 제외하고 약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현재 글리벡의 약가는 선진 7개국의 평균약가보다 높다. 약가선정 당시 1300원이었던 환율이 900원으로 떨어졌으니 이에 대한 조정도 필요하다.
우리가 약가인하 등 다시 투쟁할 경우 노바티스가 이 혜택을 중단하겠다고 할 수 있다. 환우회로서는 이 부분이 고민이다. 약가가 인하되더라도 이 10%가 없어지면 결국은 환자가 돈은 내야한다. 그러나 10%를 잃더라도 약가인하 해야한다고 설득해야 할 것이다.
의약품은 협상대상이 아니다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됐다. 체결된다면 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것으로 보는가.
백혈병 환자들은 약을 공짜로 먹고 있어 지금 당장은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FTA의 핵심인 지적재산권 문제는 환자들에게 미칠 영향이 분명하다. 특허권을 가진 혁신적 신약의 경우 심사기간을 포함해 특허기간이 25년 정도다. 그러나 글리벡같은 혁신적 신약은 계속 개발될 거고, 그 약들 또한 특허권을 앞세워 선진 7개국을 기준으로 고가로 책정될 것이다.
글리벡의 경우 만성골수성백혈병, 급성림프구성백혈병, 위장관기저종양 등 필라델피아염색체 검사에서 양성반응이 나오는 사람들은 보험적용을 받야 약을 무료로 먹고 있다. 이들은 FTA가 와도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 보험적용을 받지 못해 한달에 300~600만 원을 주고 약을 먹는 환자들이 문제다. 특허기간이 연장된다면 저렴한 복제약을 먹기 힘들어 지는 셈이다.
글리벡은 스위스 제약회사의 약으로 알고 있다. 한미 FTA에 영향을 받는가.
한미 FTA는 시작일 뿐이다. 곧 한국과 EU간의 FTA가 있다. 한미 FTA에 따라서 한-EU FTA도 영향받을 것이다. 미국 쪽의 회사들이 한미 FTA를 통해 특허기간의 연장을 더 보장받게 된다면 EU의 회사들도 똑같은 대우를 요구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미 FTA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다른 단체와 함께 FTA 대응팀을 만들어서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또 한국백혈병환우회가 대표가 되어 다른 환우회와 연합해 환자단체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틀을 하고 있다. 우선 환자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29일 창립 4주년 행사가 있는데 영상을 제작해서 FTA와 영리병원에 대해 교육할 예정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FTA의 내용이 어려워서 환자들에게 현실적으로 설명하기 쉽지 않다. 나도 토론회와 세미나를 다니면서 공부하지만 어렵다. 환자들에게는 ‘한미 FTA가 체결되면 약가가 올라간다, 그러면 건강보험지출이 많아지고 건강보험료가 올라갈 거다, 지금은 약을 싸게 먹을 수 있지만 약가가 올라가면 나중에는 못 먹을 수 있다, 그러니 반대해야 한다’는 식으로 교육하고 있다. 환자들에게는 일년에 돈이 얼마 더 부담된다, 저렴한 복제약 도입시기가 늦춰진다라고 보여줘야 한다.
보건복지부는 시민단체들에게 의약품은 협상대상이 아니라고 말해왔다. 의약품은 아니라도 지적재산권은 협상대상이라고 한다면 결과는 마찬가지다. 의약품을 내주고 자동차를 팔려는 속셈은 아닌가.
송기향 기자(ssong@promethe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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