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값 절감 정책 밀어붙이면 투자 철수할 수도…”
다국적 제약업체 협박…시민ㆍ사회단체 “환자 죽어가는데”
2006-06-15 오후 2:48:19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보건복지부가 추진하는 약값 절감 방안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이들 다국적 제약업체들은 “복지부의 방안은 투자 환경의 저해 요소”라며 투자 철수를 강하게 시사했다.
다국적 제약업체들, 복지부 약값 절감 방안 맹성토
국내에 진출한 26개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이익단체인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KRPIA)는 15일 서울 소공동 웨스턴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5월 3일 발표된 복지부의 약값 절감 방안을 강하게 성토했다.
톰 메이슨 한국BMS제약 대표이사는 “지난 3일 발표된 복지부의 방안은 업계와 협의 없이 발표됐을 뿐만 아니라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많은 노력을 기울여 개발하려고 하는 다수 신약들에 대한 환자의 접근성을 저해하는 것”이라며 “한국에는 이미 약값을 규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충분한데도 왜 더 규제를 가중하려는지 모르겠다”고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제즈 몰딩 사노피아-벤티스코리아 대표이사는 더 나아가 “5월 3일 복지부가 발표한 방안은 혁신적 신약을 환자들에게 제공하려는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며 “앞으로 투자 환경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상 투자 철수를 강하게 시사한 것.
하지만 제즈 몰딩 이사는 ‘복지부의 방안이 그대로 추진된다면 한국에 대해서 더 이상 투자를 하지 않겠다는 말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는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주도로 100여 건 이상의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다”며 “우리는 앞으로도 한국에 대한 투자를 지속하길 바라고 복지부와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다”고 한 발 빼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다국적 제약업체들의 복지부 압박…”성과 있다”?
▲ 한 시민ㆍ사회단체 회원이 다국적 제약업체의 기자회견장에서 “사람들이 에이즈 때문이 아닌 의약품 접근권이 없기 때문에 죽어간다”는 내용이 적힌 티셔츠를 들고 있다. ⓒ 프레시안
복지부는 지난 5월 3일 모든 의약품을 보험 약으로 등재하는 현행 약값 결정 방식(네거티브 시스템)을 비용 대비 효과가 우수한 약 위주로 선별해 등재하는 방식(포지티브 시스템)으로 바꾸는 방안을 내놓았었다. 복지부는 또 신약의 경우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직접 다국적 제약업체와 가격 협상을 해 최종 결정되는 약값이 반영되도록 했다.
복지부의 방안은 발표되자마자 미국 정부와 다국적 제약업체의 반발을 샀다. 다수의 고가 신약을 보유하고 있는 다국적 제약업체 입장에서는 새로운 약값 결정 제도가 반가울 리 없었던 것. 약효에 비해 가격이 아주 높으면 등재가 안 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국민건강보험공단과의 협상 과정에서 약값이 현행보다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날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기자회견은 약값 절감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마련하고 있는 복지부를 압박하려는 시도의 성격이 짙다. 미국 정부와 다국적 제약업체들은 3일 방안이 발표된 뒤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제동을 걸기 위해 노력해 왔다. 실제로 이날도 다국적 제약업체 관계자들은 수 차례에 걸쳐서 “복지부와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다”고 언급해 자신의 압박이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고 있음을 시사했다.
시민단체 ‘맞불’, “대부분 국가서 시행…자국 가서 반대하라”
한편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기자회견에 맞춰 국내 보건의료 관련 시민·사회단체들도 같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해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주장에 반대한다”고 ‘맞불’을 놓아 관심을 끌었다. 특히 일부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은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뒤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시해 주최 측을 곤혹스럽게 했다.
건강세상네트워크, 보건의료단체연합 등 시민·사회단체들은 “복지부의 방안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발표되지 않아 미흡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약값 절감을 위한 진전된 방안을 담고 있다”며 “이런 정책이 지연된 탓에 국내 약값은 지나치게 높았고 지금까지 불필요하게 지출된 약값만 수조 원이 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 단체는 “그 동안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 제약업체들은 이런 허술한 제도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챙겨 왔다”며 “현재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약값 지출 중 59.5%가 다국적 제약업체의 몫인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현실이 이런데도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이런 약값 절감 정책에 반대하고 나서고 있다”며 “이미 1980년대부터 이런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는 그들의 자국에 가서나 반대 기자회견을 하라”고 꼬집었다.
한미 FTA 통해 약값 더 높이려 하나
▲ 시민ㆍ사회단체들이 웨스턴조선호텔 앞에서 자국적 제약헙체의 입장에 반대하는 기자 회견을 열고 있다.ⓒ 프레시안
이들 단체들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를 통해서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약값을 더욱더 높이려 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이들 단체들은 “유럽, 심지어 국민건강보험이 없는 미국마저도 지속적으로 약값을 절감하기 위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며 “이 때문에 이들 나라들의 의약품 시장 성장률은 2005년 기준으로 4%에 그쳤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반면에 브라질(41%), 중국(20.4%), 우리나라(21%)는 아주 높은 수준”이라며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자국의 의약품 시장이 위축되자 우리나라와 같은 시장에서 의약품 판매를 늘리기 위해 비상식적 주장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한미 FTA를 통해 관철하고자 하는 제도들은 신약의 가격을 현재보다 두 배 이상 높이고, 특허 기간 연장으로 복제 약의 생산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약값 폭등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재 다국적 제약업체들은 모든 신약의 선진 7개국 평균 약가 적용, 의약품 특허 기간 연장, 처방약에 대한 소비자 광고 허용, 독립적인 이의신청기구의 신설과 투자자-기업 중재 제도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돈에 눈 먼 다국적 제약업체들…죽어가는 환자 안 보이나”
이날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기자회견장에는 뒤늦게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들어와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시해 주최 측과 마찰을 빚었다.
특히 본인을 AIDS 환자라고 소개한 한 시민·사회단체 회원은 “오늘 다국적 제약업체 관계자들은 ‘환자들의 신약에 대한 접근권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수 차례에 걸쳐 얘기했다”며 “그런데 다국적 제약업체 로슈가 AIDS 신약의 약값을 높이 부른 탓에 나는 치료약이 있는데도 죽어가고 있다”며 호소했다.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실장도 “신약에 대한 환자들의 접근성을 높인다면서 약값을 올리는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처신은 납득할 수 없다”며 “환자들의 생명보다는 이윤에 눈이 멀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라”고 다국적 제약업체들을 강하게 비판했다.
강양구,채은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