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한미FTA ‘투자’ 항목 졸속추진 논란
[경향신문 2006-11-22 08:33]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과 관련, 미국 투자자가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는 ‘투자자-국가간 직접 소송제도’를 추진키로 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정부는 이 제도가 사법주권 및 헌법 침해 요소가 크다는 지적이 있음에도 대법원과 충분한 의견 조율을 거치지 않아 졸속·부실 협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경향신문이 21일 입수한 통상교섭본부의 ‘한·미 FTA 투자 Chapter 투자자-국가간 분쟁해결절차(2006·11)’ 보고서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 4월 미국측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투자자-국가간 소송제’를 초안에 포함시켜 미국에 전달했다.
이후 학계,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이 제도가 미국 투자자만을 위한 무기로 쓰일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자 정부는 지난 7월 민·관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도입 여부 ▲국제중재의 절차적 문제점 등의 검토에 들어갔다.
태스크포스가 8월부터 10월까지 가진 5차례 회의에서는 제도에 대한 ‘도입 불가론’이 나왔으나 결론에선 ‘미국 입장’에 무게를 둔 ‘도입 불가피론’이 채택됐다. 보고서는 “(투자자-국가간 소송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여러 문제점이 있어 곤란하다. 하지만 이 제도를 배제하는 것에 대해 미국측의 반대 입장이 명확하다면 문제점 보완을 전제로 수용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앞서 정부는 ‘북미자유협정(NAFTA)’보다는 낮은 수위의 소송제를 미국측에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특히 ‘수용(收用·expropriation, 토지 같은 유형자산이나 무형의 투자자산 등 재산권이 침해·제약받는 것) 분쟁’과 관련, 정부는 투자자가 국제중재 제소를 못하게 하고 국내 법원에서만 처리토록 하는 안을 미국측에 ‘제안’했다. 하지만 미국측은 보고서에서 “(국제중재 제소 금지는) 미국 투자자에 대한 차별로 절대 수용할 수 없다”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은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는 사법주권을 침해하고 우리 헌법상 재산권 보장 법리를 초과하는 등의 각종 법적 문제를 안고 있다”면서 “그런데도 정부는 대법원 등 법조계와 충분한 의견 교환·검토를 하지 않고 ‘미국측 입장’만 눈치보며 졸속 추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의 저자 홍기빈 박사는 “외국의 투자자와 주권 국가를 동렬의 ‘법적 주체’로 올리는 원론적 문제가 있고, ‘국제중재’ 자체는 오로지 돈 계산을 하는 승부일 뿐”이라고 말했다.
홍박사는 “한·미 FTA 협상에서 소송제 항목을 철폐해야 한다”며 “호주도 미국과의 FTA 협상을 체결하면서 미국의 농산물 시장 개방 이익을 포기하면서 소송제도를 제외시켰다”고 덧붙였다.
〈김종목기자〉
◇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
외국의 투자자가 투자 이익이 침해당했다고 판단할 때 투자 유치국의 정부를 국내구제 및 국제중재 절차에 제소할 수 있는 권리다. 일례로 미국 택배회사인 UPS는 캐나다 정부의 우체국 직원 임금 지급(정부 보조금)이 FTA 협정을 어긴 것이고, 이 때문에 UPS 현지법인이 막대한 손해를 보고 있다며 1억6천만달러의 소송을 냈다. NAFTA(94년 출범)에 참여한 미국·캐나다·멕시코 3개국 간에는 44건의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