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정부, FTA 협상서 무역구제 사실상 ‘포기’? 정부 비공개 문건 “무역구제는 협상카드로 활용”

정부, FTA 협상서 무역구제 사실상 ‘포기’?
정부 비공개 문건 “무역구제는 협상카드로 활용”

2007-01-18 오전 2:00:15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6차 협상이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가운데 우리 정부가 무역구제 분과의 우리 측 요구사항들을 사실상 포기하고 그 대신 다른 분과의 ‘협상카드’로 활용한다는 협상전략을 짠 것으로 확인됐다.
  
  17일 <프레시안>이 입수한 정부 비공개 문건에 따르면 “무역구제 분야는 우리 측 관심사항의 반영이 어려울 경우에도 여타 분야의 협상에 활용하기 위해 미국 측을 계속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적시돼 있다.
  
  지난 13일 국회에 제출된 이 문건은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김종훈 우리 측 협상 수석대표와 캐런 바티야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 웬디 커틀러 미국 측 수석대표가 7~8일 미국 하와이에서 가진 ’2+2 비공식 회담’의 결과와 이에 따른 ‘향후 협상 진행방향’ 및 ‘협상 쟁점별 협상 진행방향” 등을 담고 있다.

▲ ⓒ프레시안

   정부가 무역구제를 우리 측 협상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을 최초로 내비쳤다는 점에서 이 문건의 내용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특히 이 문건이 국회 제출용이어서 내용의 수위가 완화됐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가 무역구제 분과의 우리 측 요구사항들을 사실상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정부는 지금까지 한미 FTA 협상에서 우리 측이 꼭 얻어내려고 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관철’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
  
  또 이 문건에는 미국 측이 하와이 회담에서 “무역구제 분과에서는 자국 무역구제법의 개정을 요하지 않는 수준에서 협상을 타결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고 적시돼 있다.
  
   특히 미국 측은 우리 측의 5가지 요구사항들 가운데 핵심인 ‘산업피해 비(非)누적(non-cumulation) 평가(덤핑에 의한 산업피해 평가 시, 중국 등 다른 국가들로부터 수입된 동일품목도 조사대상으로 해 그 수입으로부터의 피해를 누적적으로 평가하는 것을 금지하고 개별 수입국별로 산업피해액을 조사하는 것)’는 수용하기 힘들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바 있다.
  
<무역구제 관련 우리 측 관계자 발언, 어떻게 변해 왔나?>
  
  ”미국의 반덤핑 제도와 상계관세 제도로 한국 업체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다. 1983~2005년 중 한국 업체들에 대한 (미국의) 반덤핑 상계관세 부과금이 총 373억 달러로 전체 수출액의 7%에 달했다.”
  
  (김종훈 수석대표, 2006년 6월 8일, 1차 워싱턴협상 기간 중 무역구제 분과의 협상에서)
  
  ”(3차 협상 마지막 날에야) 드디어 무역구제 분과의 통합협정문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덤핑 조치가 양자 간 협상 대상이 아니라는 미국 측 주장과 관련한) 양측 간 이견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김종훈 수석대표, 2006년 9월 9일 3차 시애틀 협상이 끝난 후 가진 브리핑에서)
  
  ”5차 협상에서는 특히 무역구제 분과의 협상을 진전시키는 데 협상력을 집중할 것이다.”
  
  (외교통상부, 2006년 11월 29일 한미 FTA 특위에 보고한 ‘한미 FTA 5차 협상 대응방향 中)
  
  ”(미국이) 무역구제 부문에서 법을 개정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꼭 성과를 낼 것이다.”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 2006년 12월 18일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에 출연해)
  
  ”한미 양국 간 협상 여하에 따라 미국 측이 법률 개정을 요구하는 우리 측 요구사항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혜민 한미 FTA 기획단단장, 2006년 12월 28일 긴급브리핑에서)
  
  ”무역구제 분야는 우리 측 관심사항의 반영이 어려울 경우에도 여타 분야의 협상에 활용하기 위해 미국 측을 계속 압박할 필요가 있다.”
  
  (외교통상부, 1월 13일 국회에 제출한 비공식 보고서에서)
  
  ”산업피해의 비누적 평가를 포함해 미국 측 법규를 개정해야 할 필요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계속 주장을 할 계획이다.”
  
  (김종훈 대표, 1월 15일 6차 협상 첫날 가진 브리핑에서)
  
  <무역구제 분과의 주요 협상 일지>
  
  △2006년 6월 1차 워싱턴협상에서 무역구제 분과의 명칭 놓고 양국 간 이견 지속
  △7월 2차 서울협상에서 미국 측 협상단, 무역구제 분과의 협상 보이콧
  △9월 3차 시애틀협상에서 통합협정문 도출 및 ‘제로잉 금지’ 등 우리 측 요구사항 10개 제시
  △10월 4차 제주협상에서 ‘상호합의에 의한 반덤핑 조사 중지’ 등 우리 측 요구사항 5개 추가 제시
  △12월 5차 빅스카이 협상에서 우리 측 요구사항 15개에서 6개로 축소
  △12월 27일 미국 협상단, 대의회 보고서에서 ’6개 요구사항 받아들일 수 없으나, 협상은 계속할 것’이라고 보고
  △2007년 1월 13일 한미 양측 협상단, 6차 협상에서 무역구제 분과 협상 열지 않기로 합의
  △1월 15일 한미 양국 수석대표, 6차 협상에서 무역구제 관련 비공식 고위급 회담 개최

  정부는 그동안 한미 FTA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실익 중 하나로 한미 FTA라는 ‘양자’ 간 협정을 통해 우리나라 수출업계가 미국의 악명 높은 반덤핑 조치를 받지 않게 된다는 점을 선전해 왔다.
  
   특히 정부는 한미 FTA 협상을 개시하면서 △산업피해의 비(非)누적 평가 △제로잉(Zeroing) 금지(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낮은 경우만 덤핑마진에 산입하고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높은 경우는 마이너스로 계산하지 않고 제로(0)로 간주해 덤핑관세율을 높이는 것을 금지) △최소부과 원칙(산업피해를 제거할 수 있다면 덤핑마진과 피해마진 중 액수가 작은 것만큼만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도록 하는 것) 등 핵심 3개의 요구사항을 관철하면 우리 경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제로잉 금지와 최소부과 원칙은 지난 5차 빅스카이 협상 때 우리 측 요구 목록에서 제외됐다. 그 이유는 엉뚱하게도 “‘다자’ 간 협정인 WTO(세계무역기구) 도하라운드 협상에서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마지막 보루였던 ‘산업피해의 비누적 평가’에 대해서도 미국 측이 완강한 거부 의사를 밝혀오자, 우리 측은 ‘무역구제는 다른 것을 얻어내기 위한 협상카드로 쓴다’는 새 협상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미 FTA를 통해 우리 정부가 미국의 반덤핑 조치 남발을 개선해 주리라 믿으며 한미 FTA를 지지했던 우리 기업들의 ‘기대감’은 ‘배신감’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졌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의 김용갑 FTA 팀장은 이날 “무역구제 관련 우리 측 요구가 최대한 받아들여져야 한다”면서 “무역구제 부분은 업계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무역협회의 정재화 한미 FTA 팀장은 “무역구제 분과의 협상에서 우리 측 요구사항이 다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한미 FTA 협상 전체를 그만둬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무역구제가 대미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큰 만큼 (협상이) 잘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주요 쟁점별 협상 방향>의 내용
  
  다음은 이 문건에 나온 ‘주요 쟁점별 협상 방향’의 주요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상품무역 분과=이 분과 협정문에는 우리 측이 반대하고 있는 ‘역내산 물품에 대한 관세 환급 금지’ 조항이 들어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측은 이번 협상에서 이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속할 예정이다.
  
  △농업 분과=저율관세할당(TRQ) 관련 문안에 우리 측이 반대하고 있는 ‘TRQ 선착순 적용’이나 ‘수입국영무역 금지’ 등과 같은 조항이 들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섬유 분야=미국 측이 섬유 제품의 관세를 조기에 철폐하거나 원산지 기준의 예외조항을 삽입해주면 우리 측은 섬유 세이프가드(safeguard)와 우회수출방지 규정을 도입하자는 미국 측 요구를 들어주는 방식의 ‘주고받기’가 지난 연말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고위급 회담에서 나온 섬유 분과의 ‘기본 합의틀’이었다.
  
  △자동차 작업반=미국 측이 배기량이 기준으로 한 우리 측 자동차 세제를 ‘개편’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아예 ‘폐지’해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금융서비스 분과=’우체국 보험을 민간보험과 동등하게 대우해 달라’는 미국 측 요구에 우리 측은 “기존 입장을 유지하며 타협 가능한 부분을 모색한다”는 전향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또 일시적 외환 세이프가드(safeguard)를 도입하는 조건으로 미국 측이 제시한 요구사항들은 현행 외국환거래법이 허용하는 한 수용하기로 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측은 ‘자연인 이동을 통한 보험서비스 공급을 허용하라’는 미국 측 요구도 “한정된 범위에서 허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겠다”는 전향적인 자세를 보였다. 단 우리 측은 산업은행 등 국책금융기관은 한미 FTA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기존의 입장을 ‘관철’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기로 했다.
  
  △통신·전자상거래 분과=이 분과 협정문에는 정부가 기간통신사업자의 지분을 재매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과 통신규제기구가 기간통신사업자의 지분을 보유하거나 경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측은 이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 우리 측은 이번 6차 협상에서 ‘통신 분야에서 기술표준 선택의 자율성을 보장해 달라’는 미국 측 요구에 대해 ‘기술표준 정책 추진 시 절차적 공정성과 투명성을 보장한다’는 취지의 타협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이밖에 우리 측은 ‘전자상거래 분야에서 온라인 디지털제품에 영구적으로 관세를 매기지 말자’는 미국 측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오프라인 디지털 전송 매체에 대한 관세 평가기준과 관련된 우리 측 요구를 들어달라고 요구하기로 했다.
  
  △경쟁 분과=이 분과에서 첨예한 논란이 되고 있는 ‘재벌’ 관련 각주에 대해 우리 측은 이 각주의 삭제가 어려울 경우 ‘재벌’이라는 용어를 빼고 다른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문안을 수정하자는 쪽으로 입장을 완화했다.
  
   또 ‘정부가 지정한 독점 의무’와 관련해 현재 협정문에 들어가 있는 ‘상업적 고려에 따른 활동 의무’ 및 ‘독점적 지위 이용 금지’ 조항을 그대로 두는 대신 우리 측 입장을 반영한 각주를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입장을 완화했다.
  
  △ 정부조달 분과=우리 측은 정부조달 시장의 개방에서 우리나라 지방정부와 공기업을 예외로 해 주면 ‘미국 측 주(州)정부도 양허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다’는 미국 측 입장을 수용하기로 했다. 한편 우리 측은 학교 급식과 중소기업 보호에 대해서는 예외를 인정받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기로 했다.
  
  △지적재산권 분과=’일시적 저장의 복제권 인정’과 ‘기술적 보호조치 관련 접근통제권 인정 여부’와 관련해 미국 측이 예외조항을 넣어주면 우리 측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기로 했다. 단, 우리 측은 저작권 보호기간을 저작자 사후 50년에서 70년으로 연장해달라는 미국 측 요구에 대해서는 응하지 않기로 했다.
  
  △ 환경 분과 및 노동 분과=우리 측은 환경 분과에서 미국 측이 요구하는 ‘대중 참여(public participation)’의 도입에 원칙적으로 합의해 주기로 했다. 노동 분과에서도 미국 측이 요구하는 ‘공중의견제출제도(public communication)’와 ‘분쟁해결심판제도’의 도입에 원칙적으로 합의해 주기로 했다.
          
  노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