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협상결과 ‘골라서’ 선전하는 재미?
[분석] 드러난 협상결과와 감춰진 협상결과
지난 2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된 후, “한국 정부가 협상을 참 잘 했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화자찬과 이에 대한 한나라당 및 보수언론의 맞장구가 며칠 간 언론을 장악하다시피 하고 있다.
여기에는 협상 타결 직후에 불거진 일부 미 의원들의 재협상 요구에 대해 “한국 측이 협상을 너무 잘 해서 그렇다”는 한미 FTA 찬성론자들의 ‘아전인수’식 해석도 곁들어졌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한미 FTA 협정문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현상황에서 국내 여론을 ‘찬성’ 쪽으로 몰고 가기 위해 정부가 협상 내용 중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만 부각시키거나 일부 핵심적인 협상 결과를 고의로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또 미국 쪽 입장에 기운 협상 결과를 ‘원래부터 우리가 원한 것’으로 포장하거나 ‘별 실효성이 없는 것’을 놓고 마치 큰 것을 얻어낸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사례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을 중심으로 한미 FTA 협상의 득실을 점검해 본다.
◇ ‘지켜낸 것’을 ‘얻어낸 것’으로 호도하기
정부가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는 협상 결과 중 핵심은 ‘관세 철폐’에 집중돼 있다. 미국이 관세를 없애면 미국으로 수출되는 한국산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늘어나고, 한국이 관세를 없애면 한국 소비자들이 보다 싼 값에 미국산 제품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동차 관세를 한미 양국이 조기에 철폐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은 3000cc 이상의 승용차에 한해 즉각 관세(2.5%)를 철폐하기로 했고, 한국도 모든 차에 대한 관세(8%)를 인하하기로 했다. 이 사실만 놓고 보면 그리 나쁘지 않은 장사라는 평가다.
하지만 이런 거래를 하기 위해 한국은 △배기량 기준 자동차 세제의 변경 △OBD(승용차용 배기가스 측정장치)의 장착 의무 2008년까지 면제 △신속 분쟁해결절차의 도입 등 미국 측의 수많은 요구들을 들어줘야만 했다. 지금까지 공개된 요구사항만 해도 이 정도다.
이밖에 정부가 협상 성과라고 내놓는 것들을 보면, 우리가 협상에서 얻어낸 것은 별로 없고 한미 FTA만 아니었다면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될 것들 가운데 ‘뭔가를 내주고’ 간신히 막아낸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정부가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는 △쌀의 개방대상 제외가 그렇다. 또 △외환 세이프가드(Safeguard)의 도입 △산업은행, 기업은행, 농협 등 국책금융기관의 협정 적용 예외 △투자자-국가 소송제(ISD)의 적용 대상에서 ‘부동산 가격 안정화 정책’과 ‘세금 부과’의 제외 △혁신적 신약에 대한 A7 기준 최저가격을 보장하라는 미국 측 요구 철회 등도 사실은 ‘협상 성과’라고 불릴 수 없는 것들이다.
◇ 얻어내지 못한 것에 대해선 ‘입 다물기’
반면 정부는 한미 FTA 협상을 개시하는 명분으로 내세웠던 협상 목표를 지키지 못했거나, 협상 과정에서 국민들의 요구를 반영해 만든 마지노선을 지키지 못한 경우가 많다.
무엇보다도 협상 실패가 두드러지는 것은 무역구제(반덤핑) 부문이다. 정부는 협상 과정 중 △제로잉(Zeroing, 덤핑마진 계산시 수출가격이 국내가격보다 높은 경우는 마이너스(0)로 처리하지 않고 제로(0)로 간주해 덤핑관세율을 높이는 것) △최소부과 원칙(Lesser Duty Rule, 덤핑마진과 피해마진 중 액수가 작은 것만큼만 반덤핑관세를 부과하도록 하는 것) 등 핵심 요구사항을 접었다.
정부가 ‘협상 거부’라는 강경카드(?)까지 써가며 관철하고자 했던 마지막 요구사항인 △비합산(Non-cumulation, 덤핑에 의한 산업피해 평가시 중국 등 다른 국가에서 수입된 동일물품도 조사대상으로 해 그 수입으로부터의 피해를 누적적으로 평가하는 것 금지)도 결국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없이, “미국과 FTA를 체결하는 것 자체가 미국 반덤핑 조치의 완화 효과를 갖는다”는 궁색한 논리를 인용하고 있다.
무역구제 부문에서만 협상 실패가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존스 액트(Jones Act, 미국 내 인적·물적 자원은 미국인 소유의 미국산 배에 의해 수송돼야 한다는 규정)의 완화 △항만유지수수료(Harbor Maintenance Fee)의 폐지 등과 같은 우리 측 핵심 목표도 협상 도중 슬그머니 철회했다.
시민사회와 법무부 등 관계부처들의 요구로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수용(expropriation) 관련 분쟁은 국제중재절차가 아니라 국내구제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마지노선이 마련됐는데도 이는 협상 도중 어디론가 증발해 버렸다.
정부가 반드시 지켜내겠다던 우체국 택배도 미국 특송회사인 UPS의 입장이 반영돼 개방 대상에 포함됐다. 대한민국의 우편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항이지만, 정부는 이를 “택배 서비스의 법적 안정성 도모”라는 이해할 수 없는 문구로 포장하고 있다. 우체국 보험과 관련한 협상에서도 금융감독의 강화 및 지급여력(solvency) 기준의 강화 등 미국 측 요구가 관철됐다.
미국이 한국의 관세환급(수출용 원자재 수입시 징수한 세금을 그 원자재를 가공한 제품 수출시 환급)을 폐지하라는 요구도 있었는데 어떻게 됐는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한미 FTA에서 미 전문직 비자쿼터를 확보하겠다던 약속 역시 ’9.11 테러 이후 비자쿼터에 대한 협상 권한이 미 의회로 넘어갔다’는 명분 아래 슬그머니 사라졌다.
◇ 미국 요구 수용한 것은 ‘원래 우리 입장’ 또는 ‘선진화 계기’로 포장
정부의 한미 FTA 홍보 전략은 ‘지킨 것’을 얻어낸 것으로 호도하거나, ‘얻지 못한 것’을 굳이 말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정부도 협정문 공개 이후의 국면을 걱정해서인지 미국 측 입장을 수용한 것을 일부 공개했다. 하지만 이렇게 공개된 내용은 대부분 ‘원래부터 한국 입장이었던 것’ 또는 ‘한국경제 선진화의 계기’로 포장되고 있다.
한국 측이 미국 측 요구를 받아들인 것들 중 ‘원래부터 한국의 입장이었던 것’처럼 포장되고 있는 것은 △배기량 기준 자동차 세제의 변경 △위생검역(SPS) 접촉점(contact point) 대신 위원회(committee) 설치 △최혜국 대우(Most-Favored-Nation Treatment)는 한미 양국이 미래에 체결한 FTA에 한정해 적용 △섬유 제품의 원산지 기준의 원칙으로 원사 기준(Yarn Forward) 적용 △의약품-특허권의 연계 허가 △입법예고기간의 연장(20일 이상→40일 이상) 등이 있다.
’한국경제 선진화의 계기’로 포장되고 있는 것에는 △저작권 보호기간의 연장(저작자 사후 50년→70년) △스크린쿼터는 현행유보가 아니라 미래유보 적용(현행 연간 73년에서 더 늘릴 수 없음) △민간 사업자의 통신서비스 기술선택의 자유에 대한 원칙적인 인정 △동의명령제(Consent order, 경쟁당국과 경쟁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있는 기업이 위법 여부를 따지지 않고 쌍방합의를 통해 사건을 종료하는 제도)의 도입 등이 있다.
◇작은 것 얻어놓고 ‘뻥튀기’…’본질 흐리기’도 다반사
정부의 마지막 홍보 전략은 ‘뻥튀기’다. 별 이득이나 실효성이 없는 것들을 놓고 이것을 대단한 성과인양 과장광고를 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이미 미국에 개방돼 있는 쌀 시장’은 지켰다는 허황된 수사다.
정부가 홍보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한반도 역외가공지역(OPZ, Outward Processing Zone) 위원회의 설치’에서는 한미 간의 동상이몽이 두드러진다. 한국은 위원회의 설치 자체를 두고 ‘개성공단산 상품의 한국산 인정’이라는 원래의 요구를 받아낸 것처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으나, 미국 측은 벌써부터 ‘우리가 위원회 설치하자고 했지, 언제 개성공단(Kaesung Industrial Complex)을 인정해 주겠다고 했냐’며 반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부가 고의로 본질을 흐려서 홍보하고 있는 것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지적재산권에도 비위반제소(Non-Violation Complaint, 협정을 위반하지 않아도 기대이익이 침해됐다고 판단한 경우 한 국가가 다른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허용하라는 미국 측 요구를 물리쳤다는 선전이다. 그러나 실제 협상 결과는 미국 요구를 ‘물리친 것’이 아니라 ‘유예한 것’에 불과하다. 만일 WTO에서 지재권 관련 비위반제소를 허용한다는 결정이 나오기만 하면 우리도 자동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기간통신 사업자에 대한 외국인 지분 제한(49%)을 지켰다는 것이나 프로그램 공급자(PP)에 대한 외국인 지분 제한(49%)을 지켰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유선통신과 무선통신에서 각각 업계 1위인 KT와 SKT를 제외했다고는 하지만, 정부는 기간통신 사업자에 대한 외국인 간접투자 제한(15%)을 협정 발효 2년 후 완전히 풀어주기로 했다. PP에 대한 외국인 간접투자 제한(50%)도 협정 발효 3년 내에 없어진다. 사실상 전면개방으로 가는 것이다.
▲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된 2일 밤 서울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시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FTA 담화를 경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현종 “재협상 없다”…이혜민 “재협상 가능성 있다”
물론 세계 최대의 ‘통상 깡패국가(rogue state)’인 미국을 상대로 10개월이라는 초단기에 협상을 마무리한 한국 정부로서는 ‘이 정도가 어디냐’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 또 협상을 끝내고 보니 ‘못한 것’보다는 ‘잘한 것’을 홍보하고 싶은 것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한미 FTA 협정문 전문이 공개되기도 전에 일단 협상 결과를 장밋빛으로 포장·홍보하려는 정부의 얄팍한 수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정부 관계자들이 아직 어느 수위까지 협상 결과를 발표해도 될지 ‘입’을 제대로 맞추지 못해 하나의 사안을 놓고 각각 엇갈린 발언들까지 내놓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미 FTA 재협상이 가능할지’ 여부다.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4일 오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 출석해 미국 측의 요구든 한국 측의 요구든 “원칙적으로 한미 FTA 재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강하게 개진했다. 하지만 이날 협상단의 ‘넘버 3′에 해당하는 이혜민 한미FTA 기획단장은 전직 경제부총리와 관료 등의 모임인 ‘한국선진화포럼’에서 노동과 환경 분야에서 4월 중순 이후 재협상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 협정문에 실제로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협상에서 논의된 후 한미 FTA와 별도로 관철된 미국 측 요구사항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전자 변형 생물체(GMO)의 위생검역절차를 완화하라’는 미국 측 요구였다.
미국은 엉뚱하게도 한미 FTA 섬유 분야의 협상에서 이 요구를 지렛대로 사용했으며, 결국 한국은 GMO 관련 기술적 협의를 추진해 미국 측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한미 FTA 협상과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위생조건에 대한 기술적 협의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해괴한 논리가 되풀이된 지점이다.
마늘’밀실’협상의 주역 한덕수, 한미FTA로 총리 자리 꿰차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한미 양국이 주고받았던 문서들은 한미 FTA 협정이 발효된 후 3년 후에나 공개되는 것으로 한미 양측이 합의가 이뤄졌다. 정부는 “원래 미국은 10년을 요구했었다”며 이마저도 협상 성과로 포장하려는 모양이지만, 한미 FTA가 발효된 지 3년 후면 협상 결과를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2002년 한중 간 마늘 협상 시 국민들, 농림부, 청와대 모르게 중국의 통상무역보복 위협과 마늘시장 수입안정장치를 맞바꾸는 ‘빅딜’을 했다가, 나중에 그 사실이 발각돼 청와대 경제수석에서 경질된 전력이 있는 한덕수 씨는 한미 FTA를 발판으로 해서 최근 총리 자리를 꿰찼다. 그는 벌써부터 ‘한미 FTA 총리’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한덕수 총리는 총리 인준 청문회에서 “절대로 이면합의는 없다”면서 “마늘 협상의 교훈 때문에라도 한미 FTA 협상 결과를 국민들에게 낱낱이 공개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하지만 한미 FTA 협정문 전문의 공개는 정부의 융단폭격 식 홍보로 한미 FTA에 대한 찬성 여론이 이미 확산됐을 가능성이 높은 5월 말에야 있을 예정이다.
노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