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질병과 차별 그리고 차별금지법 / 김정범

[왜냐면] 질병과 차별 그리고 차별금지법 / 김정범
왜냐면

  

“B형간염 예방위해 술잔 돌리지 말자”
“입술 접촉으로도 에이즈 전염된다”
이런 식의 잘못된 통념으로 인한
사회적 차별로 이삼중의 고통
경제활동 제약받아 국가도 손해
차별금지법은 7가지 항목 다시 살려야

우리나라에서 ‘B형간염’ 보유자들은 전인구의 약 5∼10% 정도 된다. 이들은 취업할 때 제한을 받고 있으며, 직장을 다니면서도 부서 배치나 승진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다. 또 전인구의 20% 가량 되는 고혈압 환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차별이 만연해 있다 보니 당사자들조차도 이와 같은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연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차별이 많은 경우 잘못된 지식이나 옳지 않은 사회적 통념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준다. 고혈압이 심장이나 뇌혈관 질환의 위험요인이지만 적절한 관리와 치료를 한다면 혈압이 정상인 이들과 다를 바 없다. B형간염은 타인에게 감염시킬수 있다는 우려가 문제가 되는데, 출산 때 모자 사이 수직감염, 수혈, 빈번한 성적접촉 등이 감염의 원인이지 단순히 술잔을 같이 나눈다거나 음식을 같이 먹는다거나 해서는 전염되지 않는다. 에이즈 역시 마찬가지다. 단순한 입술 접촉으로도 간염이나 에이즈가 옮는다거나 모기가 에이즈를 옮긴다거나 하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마치 의학적으로 사실인 양 잘못 알려져 있다. 이러한 잘못된 사회적 통념이 생긴 데는 국가나 이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잘못이 크다. 심지어 에이즈 환자의 손조차 잡지 않으려는 의료인이 아직도 있을 정도다. 정부 역시 과거 한때 ‘B형간염을 예방하기 위해 술잔을 돌리지 말자’라는 잘못된 켐페인을 벌이는 바람에 잘못된 지식이 확산되도록 조장한 책임이 있다.

질병이나 병력을 이유로 고용을 기피하는 것은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졌다. 이러한 질환자나 병력을 가진 이들을 차별하는 관행이 광범위하게 남아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 인권 후진국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여러 문제점을 파생시킨다.

우선 인권적 측면에서, 질병이나 장애 그 자체로 말미암은 고통에다 불이익과 인권침해로 비롯된 소외가 더해져서 당사자가 받는 고통은 가중된다. 둘째, 해당 질병의 예방과 관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전염성 질환에 대한 전통적인 공중보건 정책은 감염인을 격리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감염인을 강제로 등록하게 하는 등 실명 관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 통념화돼 있다. 이로써 당사자들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 질병을 감추게 되고, 나아가 치료나 관리마저 소홀히 하게 된다. 세계적으로도 에이즈 감염자들의 실명관리 및 강제검진 방식은 효과가 거의 없으며, 감염자의 신고나 실명관리보다는 자발적인 상담을 통해 관리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이라는 게 증명됐다. 에이즈 경우도 최근에는 복합요법의 발전으로 마치 당뇨나 고혈압 환자처럼 적절한 치료와 관리만 하면 장시간 별다른 증상 없이 생활할 수 있다. 에이즈 감염인들도 사적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비밀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셋째, 질환 혹은 병력을 가진 이들에 대한 근거 없는 차별로 말미암은 국가적으로 손해가 크다. 이들은 차별로 고용 및 직장 등에서 경제활동을 제한당하는 만큼 생활이 어렵다. 그만큼 국가는 이들에 대한 복지비용을 추가로 치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이들의 신체조건에 맞게 작업환경을 만들어서 그들의 잠재능력을 이끌어내는 것이 이들의 삶의 질과 우리 사회 수준도 높이는 일이다. 이것이 진정한 복지다.

따라서 국가적으로 차별을 철폐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차별이나 배제에는 제도적인 요인과 함께 사회적 문화적 요인이 깊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차별금지 켐페인이나 선언적 법률만으로는 단시간에 해소하기 어렵다. 미국의 장애인 차별금지법은 강력하다. 취업, 직장에서의 부서배치나 승진, 희롱, 보험 등 일곱 가지 구체적 항목을 명시해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특정질환이나 병력을 가진 이들의 차별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법위반 사항이 적발되면 징벌에 가까운 벌과금을 물림으로써 적극적으로 차별을 해소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그 시안이 입법예고됐다. 그런데 정부내 검토 과정에서 병력에 의한 차별 등 일곱 가지 항목이 삭제됐다. 만약 이대로 제정된다면 차별 금지는 선언에만 그치고 법이란 이름으로 오히려 차별을 온존시키고 합법화할 우려가 높다. 우리 사회에서 각종 차별을 구체적인 수준에서 실효성 있게 철폐하기 위해서는 차별금지의 목표를 명확히 하는 올바른 차별금지법이 제정돼야 할 것이다.

김정범/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