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5년간 속고, 또 盧 닮은 대통령인가” ‘한미 FTA 시대’, 기어이 오는가 <3> FTA와 공공 정책

  
  ”5년간 속고, 또 盧 닮은 대통령인가”  
  ’한미 FTA 시대’, 기어이 오는가 <3> FTA와 공공 정책  

  2007-12-06 오전 6:11:16    

  
  이번 대선만큼 다양한 경제 성장을 약속하는 어음이 뿌려진 선거도 없었을 것이다. 상당히 완숙한 경제인 한국 자본주의로서는 대단히 부담스러울 7%니 8%니 하는 경제 성장률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되고 있는데, 이는 사실상 사회 경제 구조 자체에 상당한 변동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각 후보들은 자신들의 공약이 바로 그러한 사회 경제 구조의 재구조화를 노리고 있는 것이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알고 있을까. 현재 진행 중인 한미 FTA는 바로 그러한 정부 주도의 대규모 사회 경제 구조 변화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적어도 외국 투자자의 이익을 크게 건드리지 않는 한으로 제약하는 온갖 장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들은 그 수많은 공약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의 정책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도록 한미 FTA의 문제점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한미 FTA를 통해 한국 국가의 공공 정책이 무력화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한미 FTA 에 포함되어 있는 투자자-국가 분쟁 절차(Investor-State Dispute : ISD)에 기인하는 것이다.
  
  ISD란 무엇인가
  
  이 제도는 외국 투자자의 재산이 투자 대상국 국가의 전횡에 의해 부당하게 침해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20세기 후반에 국제법적으로 제도화된 장치이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낯선 나라에 투자하는 외국 투자가로서는 가장 두려운 사태에 해당하는 것이 그 나라 국가가 예측 못할 이유로-이를테면 갑자기 혁명 정부가 들어선다든가-자신의 투자를 완전히 망쳐버리는 사태일 것이다. 이런 경우에 어디에 호소할 것인가. 당연히 투자 대상국의 법원이나 법 체계는 그 나라 국가에 유리한 방향으로 작동할 확률이 높으니 크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때 ISD는 투자 대상국 국내의 법적 체계 이외에 대안이 될 수 있는 분쟁 해결 절차를 제공하는 장치인 것이다.
  
  분쟁의 소지가 생겨날 경우, 투자자는 자신의 변호사를 내세워 투자 대상국 국가에게 자신을 대표할 변호사를 파견하라고 요구한다. 이 두 명의 변호사는 이러한 분쟁을 해결하는 절차로서 사전에 합의된 바의 절차-한미 FTA의 경우 ICSID와 UNCITRAL이라는 두 개의 절차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에 따라 자신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맡을 변호사를 선임한다. 이 세 명의 변호사가 그 합의된 절차에 따라 심의를 진행하여 투자 대상국 국가의 조치가 부당하게 그 외국 투자자의 이익을 침해한 것인가의 여부 그리고 그랬을 경우 어느 만큼의 배상을 치러야 하는가를 모두 결정하는 판정을 내린다. 이 판정은 국제법적인 강제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기에 투자 대상국이나 투자자 모두 그것에 따라야 한다.
  
  따라서 ISD는 투자자 쪽이든 투자 대상국 쪽이든 특정한 국가의 국내법에 근거하여 진행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으로 믿어지는 국제법의 여러 규칙들과 해당되는 FTA 또는 BIT(양자간 투자 협정)에서 합의된 사항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 요컨대, 외국 투자자는 자신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보이는 투자 대상국 국가의 행동에 관한 한 투자 대상국의 법적 정치적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공간으로 끌고 나가 심사할 수 있는 권리를 쥐게 된 것이다. 이는 여러 모로 19세기의 서양 열강들이 주변부 반주변부 국가들에서 누렸던 치외법권(extraterritoriality)과 닮은 점이 있다.
  
  왜 공공 정책이 문제가 되는가
  
  이렇게 설명을 해놓고 보니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고 거리낌 없이 투자하도록 유도하는 데에 대단히 효과적인 제도로 보인다. 사실 투자자로서는 투자 대상국 내의 어떤 정치 세력이나 혹은 국민들 전체가 민족주의적 감정이건 외국 투자자의 성공에 대한 질투이건 숱한 예측 못할 요인들로부터 자신의 투자를 빼앗아갈 조치가 취해질 위험에 항상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ISD 제도는 그러한 위험에서 투자자들을 보호해줄 ‘방패’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1990년대 초 이래 지금까지의 경험을 보았을 때에 ISD 제도는 투자자를 보호하는 ‘방패’라기보다는 투자 대상국의 국가 주권을 공격하는 ‘창’의 성격을 훨씬 더 많이 띠게 된다는 점이다. ISD가 문제 삼는 투자 대상국 국가의 조치란 외국 투자자의 재산이나 그 소유권을 직접 침해하는 것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건 간접적으로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 목적과 동기가 정당한 것이건 아니건, 외국 투자자의 재산권뿐이 아니라 심지어 그 재산 가치에 큰 영향을 줄만한 국가 정책은 모조리 ISD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 좁은 의미에서의 경제 정책 뿐이 아니라 국가가 자국 국민들의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취하는 일체의 정책이 ‘외국 투자자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에서만 가능하도록 제한되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ISD가 문제로 삼는 국가 정책이란 외국 투자자의 공장과 광산을 강제로 뺏는다든가 그 은행 계좌를 그냥 동결시켜버린다든가 하는 직접적인 또 무지막지한 행동만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국민들의 이익을 위해 일상적으로 해오던 바의 선량한 공공 정책 일반이 ‘외국 투자자의 이익을 침해하는가’라는 잣대에 걸려 철퇴를 맞게 되는 것이다.
  
  첫째, ISD에서는 간접 수용(indirect expropriation)의 개념이 채택되어 있다. 수용이란 국가가 공공의 목적을 위해서 개인의 사적 소유를 적절한 절차와 보상을 통해서 가져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관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사적 소유권이 이전되는 경우만이 아니라 그 재산 가치가 심하게 훼손되는 경우도 소유권이 침해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수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간접 수용이라는 새로운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가 공공의 이익을 보호한다는 목적에서 일정한 조치나 규제를 취했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외국 투자자의 자산 가치-소유권이 아님에 주의하라-가 심하게 떨어지게 되면 국가는 그 투자자에게 적절한 금전적 보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수용이란 국가가 사적 소유를 제한하는 행위의 정당성을 전면적으로 인정하는 행위이다-단,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 그 ‘공공 정책’이 아무리 고상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또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아무리 절실한 것이라고 해도, 또 아무리 일상적으로 해온 것이라 해도 그것은 외국 투자자의 금전적 이익을 크게 건드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그게 아니라면 정당한 보상을 하든가 그 조치를 철회해야만 한다.
  
  둘째, ISD라는 분쟁 절차는 이러한 국가 정책이 갖는 공공성의 문제가 반영되기 힘들거나 전혀 반영되지 않을 수도 있는 구조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일방적인 결정권을 쥐게 되는 그 세 명의 변호사들은 거의 항상 통상 전문 변호사들로서 문제가 된 사안의 경제적, 금전적 측면만을 주로 고려하게 되어 있다. 절차의 진행은 원칙적으로 비밀이며 그 세 명 이외의 이해관계 당사자 그 누구도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심의 과정에서 그들은 해당국 내의 법적 절차는 완전히 무시해 버릴 권한을 갖게 된다. 그야말로 “치외법권”이 되는 것이다.
  
▲ 멕시코 과달카사르 마을 담장에 ‘메탈클래드는 물러가라’고 적혀 있다. ⓒ 프레시안

  메탈클래드 대 멕시코 사건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미국의 메탈클래드는 멕시코 내에서 폐기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폐기장 주변의 환경이 급격히 악화되자 멕시코 정부는 폐기장 허가를 취소하였고, 메탈클래드는 이를 자신들의 투자에 대한 부당한 침해라고 ISD 제도를 발동하였다. 2000년에 나온 판정문은 다음의 점들이 주목할 만하다. 첫째, 자신들은 멕시코 정부의 동기가 공공의 복리였는지의 여부를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이 오로지 상업적 측면만을 고려하였다고 명시하였다. 둘째, 사건에서 핵심적인 관건이었던 폐기장 허가의 권한이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어느 쪽에 있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멕시코 내 법조계의 일치된 견해를 무시하고 정반대의 판단을 내려버렸다. 셋째, 아무리 목적이 선량하다고 해도 투자자의 재산권을 훼손한 행위는 모두 수용에 해당한다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 결과 판정문은 메탈클래드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상원 의회의 판단
  
  지난 2004년에 미국과 FTA를 체결한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에도 이 ISD 제도에 대한 경각심이 대단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이 제도의 성격을 어떻게 판단하였고 어떠한 결론을 내렸는가가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줄 것이다.
  
  특히 각급 지방정부에서 ISD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빅토리아 주의 주지사는 이 제도가 북미 지역에서 “주정부 및 지방정부의 주권과 통제력을 침식”하고 ‘지역 내 기업체보다 외국 투자자들에게 더 유리한 대우”를 해주는 데 이용됐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이러한 발언은 오스트레일리아 의회에서 인용되기도 했다).
  
  마침내 2003년 11월 오스트레일리아 상원의 외교안보통상 자문위원회는 미국과의 무역 협정에 관한 포괄적인 보고서를 제출했고, 이 보고서에서 투자자 보호 조항을 협정에서 뺄 것을 강력하게 권유한다. 먼저 이 보고서는 나프타 11장이 투자 기업들이 투자 대상국 정부를 자기 뜻대로 좌지우지한다는 비판을 광범위하게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한다.
  
  그런가 하면 분쟁에 대한 심판이 벌어지는 ICSID나 UNCITRAL은 기본적으로 상업적 분쟁 조정을 모델로 한 것이어서 “절차나 공청의 투명성이라는 기본원칙을 갖추지 못한 특별한 심판소이자, 분쟁이 벌어져도 공공에 알릴 의무도, 국내 행정법에서와 같은 공공이익에 대한 요건 같은 것도 없다”는 문제점도 지적한다.
  
  게다가 미국 기업이 투자자 보호조항을 이용해 다른 나라 정부를 압박하는 사안들을 보면, UPS 대 캐나다 사건에서와 같은 공공서비스, 메탈클래드 사건이나 에틸 사건에서와 같은 환경과 보건 등 다양한 쟁점들에 걸쳐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자문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한다.
  
  ”본 위원회는 나프타를 모방한 자유무역협정은 지방정부, 주정부, 중앙정부 등 모든 차원에서 정부의 규제에 도전할 수 있을 만한 부당한 권력을 미국 기업들에게 넘겨주게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6.130)”
  
  결국 오스트레일리아는 ISD를 FTA에서 제외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실제로 많은 사례가 있는가
  
  이번 한미 FTA에서 이 ISD 문제를 놓고 벌어진 논쟁 가운데에서 정부와 정부 쪽 입장을 지지하여 “ISD가 별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던 논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문제가 있다. 이는 오로지 NAFTA에서 생겨난 ISD 분쟁 사례들만을 논의의 기초로 삼는 경향이다. ISD로 인하여 국가의 공공 정책이 문제가 되고 큰 액수의 사건들이 터져 나오는 생생한 현장을 보려면 최근에 그런대로 일정한 가이드라인이 생겨난 것으로 보이는 NAFTA보다 그 밖의 사례들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http://ita.law.uvic.ca/index.htm 에서는 공개된 각종 판정문과 자료를 볼 수 있고 정기적으로 나오는 소식은 http://www.iisd.org/investment/itn를 참조할 수 있다.)
  
  몇 가지의 유명한 사례들만 보자. 아르헨티나는 지난 2001년의 외환 위기 당시 정부가 불가피하게 내렸던 외환 시장 통제 조치의 결과 아르헨티나에 들어와 있는 여러 외국 투자자들로부터 알려진 것만으로도 40건이 훨씬 넘는 ISD 소송에 휘말려 있고 그 청구액 총액은 400억 달러에 이르고 있으며, 이미 한 건에서 패배하여 1억 7000만 달러의 배상 판정을 받은 바 있다. 외환 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내리게 되는 외환 통제 정책이 ISD의 대상이 되고 “간접 수용”의 판정을 받게 된다면 그 기준에서 벗어날 ‘공공 정책’이 과연 있을 것인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캐나다의 경우 ‘공공 서비스’에 해당하는 우체국의 택배 서비스가 소멸할 위기에 처했다. 미국의 택배 회사 UPS가 캐나다의 택배 서비스 회사인 퓨롤레이터가 캐나다 우체국 시설을 이용하는 등 각종 특권을 누리는 것이 NAFTA 위배라고 ISD 제도를 발동한 것이다. 퓨롤레이터는 비록 사기업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원래 90년대 초까지 캐나다 우체국에서 맡아보던 전국 택배 서비스의 일부를 민영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그 지분도 거의 전부 (공기업인) 캐나다 우체국이 가지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공공 서비스 부문의 편제는 국가 기구, 공기업, 사기업이 혼재되어 있는 실정이다. 최근 나온 판정에서 UPS는 캐나다 정부에 패배하였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러한 ISD제도를 이용한 공공서비스 부분의 공격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있다. UPS 사건 판정이 나오기 전 많은 캐나다 변호사들은 “다음은 CBC라고 말한바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도 수도, 의료, 환경, 등등 공공 정책과 관련된 ISD의 사례들은 부지기수이다. 위의 웹사이트를 꼭 방문해보기를 권할 뿐이다.
  
  왜 하필이면 한미 FTA의 ISD가 문제인가
  
  정부와 관변 지식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이 ISD는 이미 전 세계 거의 모든 FTA나 BIT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이미 우리가 싱가포르등과 맺은 FTA에도 들어가 있다. 왜 굳이 한미 FTA만을 문제로 삼는가”라고. 그 대답은 정부가 한미 FTA의 필요성으로 설파하고 있는 다른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한미 FTA는 단순히 몇 가지 물품의 관세를 인하하거나 교역의 확장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산업 구조와 정치 경제 체제를 미국 식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 즉 일종의 경제 통합에 있다는 것이다.
  
  즉 현재 한미 FTA가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두 나라의 산업 구조와 경제 체제의 환경이 급속하게 하나로 통합되어 동아시아에서의 “비교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구가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올 것으로 기대되는 투자자들이다. 금융, 서비스 업을 필두로 하여 전방위적으로 들어올 이 미국 투자자들에게 “글로벌 스탠더드”에 가까운 미국식의 사업 환경을 제공하고 또 그들이 가장 사업하기 좋도록 하는 것이 한미 FTA 가 지상 과제로 삼는 바이다.
  
  그렇다면 미국 투자자들과 현존하는 한국 국내의 여러 법적 제도적 장치와 여러 공공 정책들이 충돌하게 될 가능성은 예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굳이 한미 FTA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미국과의 FTA란 어느 나라에게서나 그 규모와 깊이에 있어서 다른 FTA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충격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특히 우리의 경우엔 그것이 현재의 지배 세력들이 의식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바라는 데에 있다.
  
  이 시리즈의 다른 글들에서 우리는 FTA가 각각의 공공 부문에서 어떤 충격파를 가져올 것인지를 볼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실제로 터진다면 이를 고치고 대처할 수 있는 유일의 방책은, 정부의 적극적인 공공 정책이다. 그런데 그러한 공공 정책이라는 선택의 여지를 극적으로 줄이는 장치가 바로 이 ISD라고 할 수 있다. “외국 투자자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도로” 그 범위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이 ISD야말로 한미 FTA가 국내의 여러 공공 서비스에 가져올 부정적 충격을 제도화시키는 것으로서 그 극점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본대로, ISD는 한국 국가의 헌정 주권 위에 군림하는 초헌법적 권위이며, 그것이 우선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바는 외국 투자자의 이익 보호이다.
  
  후보들은 모두 자신이 집권하기만 하면 전 세상을 들었다 놓을 수 있을 것처럼 호언장담을 아끼지 않고 있다. 우리는 2002년에도 그러한 후보를 본 바 있고 그의 실제 능력이 어떠한지도 몸 아프게 겪은 바 있다. 과연 ISD로 상당한 공공 정책의 제약이 존재하는 가운데에도 그러한 실력들을 보여줄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말해주기 바란다. 스스로가 약속하는 계획이 실현되려면 ISD가 없어야 하며 그것을 포함한 한미 FTA 논의를 원점으로 우선 돌릴 필요가 있다고.  
    
  

  홍기빈/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