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 감독 ‘식코’ 아픈 것도 죄악…돈 없으면 죽어라?
입력: 2008년 04월 02일 17:48:20
‘식코’는 ‘환자’라는 뜻의 속어다. 마이클 무어의 신작 ‘식코’를 보면 현재 미국의 상황은 이렇다. ‘아프고 돈 없으면 죽어라.’
감독 마이클 무어가 미국에서 제대로된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를 데리고 관타나모 기지로 접근하고 있다.
너저분한 옷차림, 뚱뚱한 몸집으로 익숙한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는 그간 미국 사회의 가장 깊숙한 상처를 건드려왔다. 대기업의 횡포(‘로저와 나’),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볼링 포 콜럼바인’), 9·11 테러(‘화씨 9/11’) 등이 그의 관심 대상이었다. 무어의 선동적이고 투박한 방식은 효과 만점이었지만 논란도 많았다. 목적을 위해 사실을 축소 혹은 과장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쏟아졌다.
이번엔 미국의 민간 의료보험 제도에 삐딱한 시선을 보냈다. 전세계 산업화 국가 가운데 미국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험제도가 없는 유일한 나라다.
소방, 치안, 교육은 공짜인데 아플 땐 왜 돈을 내야 할까. 영화에는 미국 환자들의 온갖 기막힌 사연들이 쏟아진다. 작업하다 중지와 약지 끝이 잘려나간 남자가 있다. 중지 접합에는 6만달러, 약지 접합에는 1만2000달러가 든다. 돈이 부족했던 남자는 중지를 포기하고 약지 접합 수술만 받는다. 21세에 자궁경부암에 걸린 여성이 있다. 보험료 지급을 청구하자 보험회사의 대답이 가관이다. “젊은 여성은 자궁경부암에 걸릴 수 없다.” 보험사의 심사위원들은 보험 지급 거부율을 높일수록 보너스를 받는다. 보험사들은 수천 가지 이유를 들어 보험 가입을 거부하고, 가까스로 보험에 가입했다 해도 수만 가지 구실로 지급을 거부한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힐러리 클린턴의 의료보험 체계 개혁은 보험사들의 강력한 로비로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니 극중 대사처럼 “안 아프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영화 ‘식코’의 한 장면. 미국의 정치인들이 등장하는 자료 화면 위에 그들이 민간의료보험사로부터 기부받은 정치 자금의 액수를 적어놓았다.
무어는 이례적으로 미국 바깥으로 카메라를 가져간다. 캐나다, 영국, 프랑스, 특히 쿠바는 적어도 의료 서비스에 있어서는 거의 지상낙원처럼 보인다. 무어의 선정적, 직설적 접근 방식은 영화 종반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만든다.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된 범죄자들은 최고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는다’는 미국 정부의 선전을 들은 무어는 환자들을 데리고 관타나모 기지로 향한다. 물론 접근을 거부당한 무어의 환자들은 쿠바에 내려 최상의 치료를 받는다. 한 환자는 “미국에서 120달러짜리 약이 여기선 5센트다. 박스째로 사가고 싶다”며 울먹인다. 실제로 ‘가난한 사회주의 국가’ 쿠바는 ‘세계 최강국’ 미국보다 영아 사망률이 낮고 평균 수명은 길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다큐멘터리는 현실과 접속했을 때 효과가 증폭된다. ‘식코’처럼 계몽적인 목적을 띤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미국 의료보험 체계의 문제를 파헤친 이 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흥미를 끌 수 있는 이유는 이명박 정부의 ‘의료보험 당연지정제’ 완화 논의 때문이다. 대운하, 영어 몰입 교육이 그렇듯이 이명박 정부는 아직 당연지정제 완화 혹은 폐지에 대해 이렇다할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총선 후 논의가 본격화된다면, 10년 후 ‘한국판 식코’가 제작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3일 개봉.
〈 백승찬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