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촛불 “광우병으로 죽으면 대운하에 뿌려주오”
1%를 위한 정책 대전환 필요하다 ③의료 민영화
당연지정제 전면 재검토가 불안 ‘씨앗’ 뿌려
‘고급 의료서비스’ 가면 뒤엔 의료보장 ‘축소’
“의료 민영화, 당신이 사랑하는 미국도 이미 그 실패를 인정한 정책이란 걸 모르나요?”
17일 개축 공사 중인 서울시청 본관 앞을 둘러친 안전벽에는, 촛불 시민들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이명박 삼행시부터 ‘뽀뽀뽀’를 개사한 풍자 노래까지, 촛불의 목소리는 현 정부의 각종 정책들을 비판한다. 여기에 흔히 등장하는 걱정거리가 ‘의료 민영화’ 문제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쇠고기 재협상 말고도 5대 정책 의제로 시민 토론의 장을 넓히기로 했고, 19일에는 의료 민영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의료 민영화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 영리병원 허용, 민영 의료보험 활성화 등의 정책 흐름을 관통하는 열쇳말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복지국가 구호를 먼 나라 풍문으로나 들어 본 촛불 시민들에게, 국민건강보험은 중산층과 서민에게도 두루 혜택이 돌아가는 소중한 사회보장 방책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현행 건강보험은 보장성 비율이 64%에 그쳐 ‘병원 할인 쿠폰’이란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촛불 시민들은 그나마 지켜야 할 사회보장 제도로 건강보험을 첫손에 꼽았다.
촛불집회에 나온 정아무개(30·여·웹디자이너)씨는 “평생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르는 병을 앓고 있는데, 민영 의료보험은 가입 조건이 까다로워 가입하기도 어렵다고 들었다”며 “지금도 약값 부담이 적지 않은데 건강보험이 흔들릴까 참 불안하다”고 말했다.
“의료 민영화 반대”가 촛불집회의 주요 구호로 떠오른 것은 하루이틀 누적된 불안의 결과가 아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미 지난해 대선 때 건강보험의 뼈대를 흔드는 ‘당연지정제 폐지’를 요구했고, 당시 이명박 후보 쪽은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호응해 불안의 씨를 뿌렸기 때문이다.
의사협회와 일부 병원 자본들은 현행 의료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의료산업이 경제 성장과 높은 이윤을 가져올 잠재력을 지녔음에도, 건강보험 당연지정제와 영리병원 불허 등 현행법과 제도가 이를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주수호 의협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획일적이고 규제 일변도의 하향 평준화식 의료사회주의” “의료탄압 정책”이라고 현행 의료체제를 공격했다. 이들은 의료 민영화 정책이 고급 의료서비스 선택권을 보장하고, 의료관광 활성화로 외국인 의료 수요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촛불 시민들은 그 뒷면에 감춰진 것은 없는지 묻는다. 많은 이들이 의료 민영화 정책이 대다수 중산층과 서민들에게는 의료 보장 축소로 돌아올 것이라 의심하고 있다. 서울광장 인근 직장에 다닌다는 김혜련(37·경기 과천시)씨는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식코>를 봤다”며 “의료보험도 없고 돈도 없는 환자를 차로 실어내 길에 버리는 미국 같은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민영 의료보험이 지배하는 미국 의료 시스템을 고발한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는 지난 4월 국내 개봉 뒤, 촛불을 들고 나선 김씨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경계심을 일깨웠다. 의료 민영화 정책으로 의료산업이 성장한다고 해도, 국민이 누리는 의료 보장의 수준이 훼손된다면 거센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이들은 경고한다.
보건복지가족부가 이런 불안과 의구심을 그저 ‘괴담’이나 ‘유령’으로 치부하려는 것은 잘못된 대응이란 지적도 나온다. 의료 민영화 흐름을 좇는 정책은 분명 이어져 왔고, 달라진 점은 전문가들에게만 머물던 논쟁이 촛불을 계기로 일반 시민들에게 옮겨 붙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촛불집회에 10여 차례 참가했다는 이애숙(18·고3)양은 “촛불집회에서 이런 문제들이 있었구나 싶어 가슴이 뜨거워졌다”며 “의료 민영화 문제도 다음 아고라 등에 올라오는 글을 읽고, 이게 누구를 위한 것인지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의료 민영화는 누리꾼 논쟁의 중심지인 다음 아고라에서도 가장 달뜬 이슈다. 최근엔 ‘제주특별자치도 의료 민영화 반대’가 단 며칠 만에 서명 목표를 채우며 청원 베스트에 올랐다.
현 정부가 ‘1%를 위한 정부’로 정체성을 의심받는 ‘신뢰의 위기’에 놓인 점도 의료 민영화를 유령이나 괴담으로만 넘길 수 없게 한다. 다음 아고라에서 누리꾼 ‘woorihana’는 “겉으로는 의료 민영화 안 하고 건강보험 체계 유지한다면서 뒤로는 민영화를 추진하는 이명박 정부 물러가라”고 댓글을 달아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지난 16일 촛불집회에서 만난 맹행일(67)씨는 “젊은 시절 동남아 지역에서 일하면서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달은 사회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며 “의료 민영화 정책을 포함해 현 정부가 그런 사회를 부추긴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