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의사와 고문자 500년간 동업했다
기사입력 2008-11-13 19:15
[한겨레] ‘고문에 가담한 의사들’ 번역한 이화영 교수
‘인권 의학’ 한국에 첫 소개
“고문 피해자 치유센터 절실”
2004년 5월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미군 교도소에서 미군에게 학대받고 고문당한 이라크 포로들의 비참한 모습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전쟁 포로의 아픔을 치료하고 고문·학대로부터 이들을 지켜야 할 의사가 오히려 고문을 도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스티븐 마일스 미네소타 의대 교수가 이를 책으로 써서 폭로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인권 의학’을 가르치는 이화영(사진) 연세대 의대 외래교수가 최근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해 <배반당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백산서당)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의사가 고문에 가담했다니까 잘 믿어지지 않죠? 고문의 역사를 보면 의사는 고문 피해자가 고문 동안 숨지지 않도록 도왔고, 고문 상처가 남지 않도록 하고, 고문받다 숨지면 고문 증거가 될 만한 기록을 지우기까지 했습니다.”
전쟁이나 독재의 역사에서 적어도 지난 500년 동안 의사와 고문자는 동업자였다고 저자는 고발한다. 독재와 전쟁에 반대한 많은 이들이 고문을 받았고, 그들 가운데 20~50%가 고문을 당하는 동안 의사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는 기록도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인권 유린과 의사 사이의 관련성을 연구한 기록을 보면, 미군의 의사들은 최근까지도 가혹한 심문을 할 수 있도록 의학적으로 돕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고문에 가담하도록 압박받는 의사들을 ‘위험에 놓인 의사들’이라고 저자는 부른다.
이 교수는 ‘아픈 사람들은 누구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의료 현장에서 이런 원칙이 지켜지도록 구체적인 행동 양식을 가르치는 인권 의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했다. 2007년 연세대 의대에서 강의를 시작해 내년엔 아주대 의대에서도 강의한다. 치료로부터 소외돼 있거나 그들만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한 치료를 받다가 오히려 상처가 커지는 이들, 곧 고문·가정폭력·성폭력의 피해자, 자살자 가족, 이주 노동자, 새터민, 결혼 이주 여성 등을 대하는 의사들의 태도를 가르친다.
이 교수는 “미국 등 전세계 70여 나라에 고문 피해자를 위한 치유센터가 있다”며 “하지만 과거 군사독재 시절 고문을 받은 뒤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숱한 우리나라에는 아직 치유센터는 물론이고 사회적 관심조차 희박하다”고 말했다. 그가 인권 피해자들의 치유와 의료 활동가들의 훈련 등을 위한 치유센터 건립에 힘쓰는 이유다.
1983년 이화여대 의대를 나와 종양내과 전문의로 국립암센터 등에서 일하다 미국 조지메이슨대에서 국제분쟁을 연구한 그는 “단순한 질병 치료 중심에서 환자의 인권을 보살피는 방법을 배우는 일은 병원의 전공의 및 직원들, 교수, 의대생 등 치료에 관련된 모두에게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글·사진 김양중 의료전문기자 himtra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