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일수록 ’건보혜택 확대’ 마땅
보험료 체납 크게 늘고 의료양극화 심화
과감한 정부재정 투입 건보료 감면 시급
김양중 기자
‘서민 의료비 부담 줄일 특단의 대책을!’
경제난은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치명적이다. 몇 만원 때문에 아파 끙끙대면서도 병원에 가지 못하는 이들이 속출한다. 중병에라도 걸려 수천만원의 진료비가 예상되면, 아예 치료를 포기하는 일이 허다하다. 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서민들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주는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은 보험료 감면 대상자 확대 등 단기 대책과 더불어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혜택의 범위를 크게 넓히는 방안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건강보험 재정을 과감히 쓰라’고 권고한다.
■ 감면 등 보험료 체납 대책 마련돼야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10월 말 기준 지역가입자 가구 가운데 건강보험료 체납 가구는 205만3천가구다. 지역가입자 가구 넷 가운데 한 가구꼴로 보험료를 석달 이상 못 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7월, 70만가구에게 보험료를 탕감해 준 뒤에 나온 수치가 이 정도이니 경제 사정이 어려워 보험료조차 못 내는 가구가 얼마나 많은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이런 조처가 없었다면 체납 가구는 275만가구를 훌쩍 넘었을 것이다. 보험료 체납 가구는 경제난이 가중될수록 더 늘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 체납 가구는 2002년 지역 가입자 전체의 15%에서, 2004년 23%, 2006년에는 25%로 지속적으로 늘어왔다.
직원들의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기업 역시 빠르게 늘고 있다. 2006년 말 4만6천곳에서 2007년 말 5만3천곳, 지난해 10월 말에는 6만2천곳으로 늘었다. 돈이 있어도 내지 않는 일부 악질 체납자도 있지만 체납자의 80% 이상은 경제적 어려움이나 경제 상황의 악화에 따른 것이다. 조경애 건강연대 대표자회의 의장은 “보험료를 체납한 가구의 구성원은 중병에 걸리더라도 높은 의료비 부담으로 아파도 병원을 찾을 수 없다”며 “이들의 체납 보험료를 감면해주거나 체납이 되지 않도록 보험료를 감면해주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노숙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해 주는 주영수 한림대 의대 교수(앞줄 오른쪽 안경 쓴 이)가 지난달 26일 저녁, 서울역 지하보도에 설치한 간이 진료소에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노숙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 최근 3년 동안의 건강보험료 체납현황
■ 소득에 따라 진료비 차등화 방안 필요
경제난이 이어지면서 서민층에서는 보험료를 낼 수 있어도 비용이 걱정돼 병원을 덜 찾기도 한다. 2006년 보험료 기준으로 하위 소득 20% 계층의 병원 총진료비는 2조원에 못 미쳤다. 이에 견줘 상위 20% 계층의 진료비는 6조원으로 나타났다. 하위 소득 20% 계층이 상위 20%에 견줘 세배나 진료비를 덜 썼다. 병원을 찾은 방문 일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엿볼 수 있다. 하위 20%가 한해 병원을 찾는 날의 집계는 거의 5천만 일에 이른다. 반면, 상위 20%는 약 2억 일로 네배가량 많다. 보통 소득이 높을수록 질병에 덜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병원 이용과 진료비 모두 상위층이 더 많은 ‘역전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진석 서울대 의대 교수는 “저소득층이 고소득층보다 건강 상태가 전반적으로 열악한 만큼 입원 등에서 더 많은 의료서비스를 필요로 한다”며 “저소득층의 의료비 부담을 줄여주는 특단의 방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서민층에 한해 환자가 부담하는 진료비를 소득에 따라 차등적으로 대폭 낮추는 방안이 도입돼야 이들이 의료비 부담으로 치료를 중도에 포기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중장기적으로는 국민들의 건강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의료체계를 변경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곧 저소득층을 위한 건강증진사업, 의료수가제의 개혁, 주치의 등록제 등을 통해 서민층의 의료비 부담을 근본적으로 줄이는 의료체계 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소득계층별 건강보험료 진료비 추이(왼쪽)와 OECD 회원국 공공부문 의료비 지출 비율
■ 건강보험 누적 흑자 및 정부 재정 투입해야
모든 정책에는 돈이 뒷받침돼야 한다. 정부와 건강보험공단 및 관련 시민단체들의 추산을 보면 올해 말 건강보험 재정은 2조원가량의 누적 흑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하지만 정부의 계획을 보면 이 가운데 2700억원 정도만 건강보험 적용 범위 확대에 쓰고 나머지는 쌓아 둘 계획이다. 이 때문에 경제위기 속에 의료비 부담으로 치료를 포기하는 국민들을 위하기보다 건강보험 재정 안정화에 더 역점을 둔 조처라는 비판이 나온다.
전문가들과 시민단체들은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유럽 주요 국가의 국민들이 의료비 걱정을 하지 않는 이유는 공공보험의 높은 보장성 덕분”이라며 “국민들이 의료비 부담으로 치료를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 누적흑자분과 정부 재정을 과감히 투입해 건강보험 보장성을 크게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강보험이 보장하는 보험 혜택의 범위를 넓히는 게 궁극적으로 서민층의 의료비 부담 문제를 푸는 열쇠라는 지적인 것이다. 임준 가천의대 교수는 “민간보험의 천국이었던 미국 역시 최근 경제위기에 대한 대처법으로 공공보험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이를 본격 시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건보 재정을 당장이라도 서민층 의료비 지원에 써야 한다는 주장도 거세다.
김양중 의료전문기자 himtra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