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의료개혁이 성공하려면
이병기 부회장
경기도의사회
선진국 중 유일하게 민간 의료보험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미국은 인구의 약 15%에 달하는 국민이 아무런 보험도 들지 못하고 있고, 이중 수백만은 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재정적으로 큰 곤경에 처해 있다. 수천만의 국민은 보험없이 지내다가 의료비로 인해 파산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세계보건기구는 경쟁력 측면에서 미국의 의료체계를 37위로 평가했다. 최첨단 의료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이 이토록 비효율적인 의료서비스 제도를 갖게 된 이유는 진료 자체보다 진료 거부에 더 많은 돈을 들이기 때문이다.
민간 보험회사들은 손실이 발생하는 유감스러운 상황이 가능하면 일어나지 않도록 위험 선별을 한다. 즉, 보험사는 가입 신청자가 의료비를 많이 쓰게 되진 않을지 가족력이나 직업의 종류, 과거 병력이나 현재 갖고 있는 지병 여부 등을 조심스럽게 분석한다.
이런 과정을 통과하더라도 의료비를 실제로 청구할 경우 보험사들은 의료비 지급을 거부할 명목을 찾는다.
보험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악질이기 때문은 아니다.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은 환자를 솎아내지 않거나 의료비 지출을 회피할 방법을 찾지 않는 회사는 위험도가 높은 고객들을 떠맡아 다른 보험회사들이 짊어졌어야 할 모든 비용을 부담한 상태에서 파산에 이르게 될 것이다.
보험사는 신청자들을 가려내고 의료비를 지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데 어마어마한 액수의 비용을 들이고 있다. 그리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사와 병원들은 의료비를 받기 위해 보험사를 상대로 싸우는 데 많은 돈을 쓰고 있다.
미국 정부가 국민의료보험제도를 운영한다면 고위험 고객을 제거하는 과정이 필요 없어질 것이며, 누가 치료비를 내야 할지 싸울 일도 없을 것이다. 만약 보험약관에서 보장하는 치료라면 정부가 그 비용을 지급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의료보험제도는 민간의료보험제도보다 불필요한 행정절차가 훨씬 줄어들고 관리비도 적게 들 것이다. 예를 들어 메디케어는 재원의 2%만을 관리비 명목으로 지출하지만, 민간 보험사의 경우에는 관리비용이 15%에 이른다. 미국의 총 관리비용은 약 3000억 달러에 이른다.
여느 선진국과 달리 미국은 제약회사를 상대로 의약품 가격을 협상할 기관이 없다. 그 결과 미국은 외국에 비해 1인당 의약품 소비량이 적은데도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 반면 미국의사들의 높은 연봉으로 인한 전체 지출의 차이는 2% 정도 밖에 안 된다.
미국의 민간 보험사는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의료비를 크게 줄일 수 있는데도 예방적인 의료서비스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 비용을 지불해도 득을 볼게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보험사를 바꾸거나, 65세가 되면 민간보험에서 메디케어로 전환하기 때문에 예방적인 의료서비스를 통해 이익을 거두기가 어렵다.
미국인 대다수는 직장을 통해 민간보험회사에 가입할 수 있는데, 회사가 직장의료보험의 세금공제 혜택을 받으려면 노동자의 병력에 상관없이 똑같은 의료보험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보험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걸러내는 문제를 어느 정도 완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경제여건이 악화되면서 직장의료보험을 제공하는 회사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보험료의 인상으로 한 가족당 연평균 의료보험료가 1만 1000달러 이상에 이르고 있어 직장의료보험의 가입이 줄고 있다.
“새로운 의료 기술의 성과를 누리기 위해 의료보험제도는 가입자에게 더 많은 비용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이 비용을 보충하기 위한 방편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보험 밖으로 내몰았다. 한 사람이 최신의학기술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권리는 다른 사람이 기본적인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았다. 역설적이지만, 의료기술의 발달은 국민의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이 <건강보장 위기와 그 해결책>이란 책에서 주장한 말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의료개혁안이 성공하려면 취임 초기 지금과 같은 어려운 경제 여건 하에서 빠른 시행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금융위기와 실물경제 침체에 맞서 정부의 강력한 재정 확대 정책이 요구돼온 상황에서, 의료보험을 잃고 걱정하는 많은 실업자들과 중산층을 구제하는 한 방편으로 의료개혁의 당위성이 부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의료 개혁안을 거세게 반대해온 보험업계와 제약업계에도 미리 협조를 구할 필요가 있다. 개혁안이 국민의 의료선택권을 박탈하는 듯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며, 이미 좋은 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을 보상률이 낮은 보험에 가입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시켜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개혁이 국가 세수의 증대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 비춰지는 부분도 반대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관리 비용의 절감·의약품 비용의 인하·효율성 증대 등의 개혁을 통해 그동안 낸 보험료 수준으로도 충분히 비용을 충당할 수 있다는 설득도 필요하다.
어떤 지역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들에게 똑같은 보험료로 보험을 제공하는 지역사회 등급평가제도, 저소득층 가정을 위해 메디케이드에서 지원하는 보조금 제도, 자동차 소유주가 자동차 보험에 가입해야 하는 것과 같이 모두가 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한다는 의료보험 의무가입제도, 메디케어를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도록 공공부문과 민간부문 간의 경쟁 도입 등을 바탕으로 사회보장제도 성격의 국민의료보험제도를 경제적 효율성과 정치적 현실성을 고려하여 가능한 빨리 시행 하여야만 할 것이다.
이병기 부회장 경기도의사회 (webmaster@dailymed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