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What·can·I·do·for·you?” (어디가 편찮으세요?)
김민아|국제부 부장대우
# 1997년 4월, 영국 옥스퍼드
대기실의 나무 의자는 조금 삐걱거렸다. 기다리고 있으려니,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직접 이름을 불렀다. 진료실에 들어섰다. 의사는 한 단어 한 단어씩 또박또박 발음했다. “What·can·I·do·for·you(어디가 아프시죠)?” 외국인에 대한 배려였다. 긴장이 풀렸다. “창문을 힘줘서 닫다가 손가락을 다쳤는데 자꾸 부어오르네요.” 의사는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통증이 심하지 않으면 곧 나을 겁니다. 1주일 지나도 이상하면 다시 와서 정밀검사를 해보죠.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미소를 띤 채 천천히 말했다. 병원에서는 돈을 받지 않았다. 손가락의 부기는 사나흘 만에 빠졌다.
# 2005년 11월, 미국 앤아버
“선진국 가운데 전국민 의료보험이 없는 나라가 미국 말고 또 있습니까?” 미국 출신으로 캐나다에 사는 저널리스트가 열변을 토했다. 세계 각국 기자들을 초청해 재교육하는 프로그램에서다. 이어진 저녁식사에서도 의료보험이 화제였다. 워싱턴의 잡지사에서 일하는 데릭(가명)은 프리랜서로 나서고 싶지만 의보 때문에 포기했다고 털어놨다. “가족 5명에게 들어가는 민간 의보료가 매달 1000달러(당시 약 100만원)쯤 됩니다. 지금은 회사에서 절반을 부담하는데, 회사를 그만두면 내야 할 보험료가 2배로 늘죠.” 캘리포니아에서 온 신문기자 앨리사(가명)는 의보 때문에 결혼한 경우라고 했다. 남자친구와의 동거생활에 만족했지만, 각자 내는 보험료가 아까워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이다. 의료보험이 인생을 바꿔놓고 있었다.
# 2009년 5월, 한국 서울
“의료 시스템은 민영 의료보험을 중심으로 시장 기능을 중시하는 미국식과 거의 공적 보험으로 가는 영국·유럽 시스템이 있는데 둘 다 문제가 있다. 영국은 거의 무료지만, 환자들은 병원에 가면 퇴원을 안한다. 병원 한 번 가려면 3~4개월 기다려야 한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5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강연 후 문답에서 한 말이다. 윤 장관이 밝힌 대로 미국식이든 영국·유럽식이든 문제는 있지만 옥석은 가려야 한다.
무상 운영되는 영국의 국가의료서비스 NHS는 진료 대기시간이 길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돼왔다. 그러나 응급 환자는 언제든 신속히 치료받을 수 있다. 기자도 응급 환자로 처리돼 곧바로 진료를 받았다.
무엇보다 대기시간이 왜, 언제 늘어났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1980년대 보수당 정부는 NHS 예산을 대폭 축소했다. 의사 부족으로 대기시간이 늘자 이를 줄이겠다며 일부 병원의 영리법인화를 허용했다. 의사들이 영리병원으로 몰렸고, 서민들이 이용하는 병원에는 의사가 줄어 대기시간이 더 늘어났다.
97년 5월 집권한 노동당 정부는 NHS 예산을 대폭 늘리고 의료진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해 대기시간을 상당히 줄였다. 가디언의 일요판 옵서버는 지난해 6월 사설에서 “서비스가 10년 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NHS를 만든 사람들도 이렇게 정교한 서비스가 제공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상찬했다.
미국 의료 시스템은 어떨까. 지난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저서 <미래를 말하다>에서 “2004년 미국은 1인당 의료비로 캐나다·프랑스·독일의 거의 2배, 영국의 2.5배나 지불했지만 기대수명은 가장 짧았다”고 지적했다. 세계보건기구는 2000년 보고서에서 미국의 의료체계를 세계 37위로 평가했다. 영국이 18위, 프랑스가 1위였다.
정부는 지난 8일 발표한 서비스산업 선진화 방안을 통해, 사실상의 의료 민영화 방침을 밝혔다. 영리병원 도입 여부는 11월까지 결정하겠다고 했지만, 윤증현 장관은 지난 15일 강연에서 “영리법인도 (허용)해야 한다”며 발표 시점만 미뤘음을 시사했다.
의료 민영화의 문제는 무엇인가. 비용 측면의 비효율도 크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최근 출간된 책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는 이렇게 썼다. “사적 기업의 소유자는 이윤으로 먹고 산다. 이는 비용 절감 노력으로 이어지는데, 이러한 노력은 ‘다른 일보다 많은 비용이 드는 일(예를 들어 많은 간호가 필요한 환자)’을 회피함으로써 이뤄진다. 사적 기업의 성격이 강한 시스템에서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미 소득과 교육이 양극화한 터에 기본적 사회안전망인 의료서비스까지 양극화할 경우 우리 사회의 불안과 황폐는 치유할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달을 것이다.
<김민아|국제부 부장대우>
입력 : 2009-05-19 18:37:10ㅣ수정 : 2009-05-20 02:4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