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유럽發 재정위기 폭탄’, 다음은 어디로?
한국은 안전? 공적부문 부채 700조…수출 감소 우려도
기사입력 2010-02-09 오후 12:07:45
최근 전 세계 주식시장을 강타하고 있는 그리스, 스페인 등 일부 유럽국가 재정위기의 출발점은 2008년 가을 미국발 금융위기다. 금융위기를 대응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부가 금융기관들의 부실 자산을 떠안는 등 과다 재정지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국가부채가 급증함에 따라 발생한 일이다.
유럽발 재정위기의 시발점, 미국발 금융위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시장 실패의 결과다. 시장주의자들은 인간이 합리적인 결정을 하기 때문에 내버려둬도 시장이 자기조절기능을 갖는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시장에서 인간의 행동을 결정짓는 힘은 ‘이성’보다 ‘탐욕’이 더 컸다. 탐욕에 눈이 어두워진 수많은 인간들이 시장에 뛰어들었고, 과도한 열망은 거품을 키웠다. 실물경제의 10배 정도의 규모로 커진 금융경제는 ‘꼬리’가 아니라 ‘몸통’이 돼 버렸다. 그러다 결국 거품이 터져버렸고 시장의 한구석이 무너졌다.
터진 거품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나섰다. 부실한 금융시스템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극도로 위축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재정을 풀었다. 숨이 막 넘어갈 것 같은 환자에게 일단 인공호흡기를 붙여 놓은 셈이다.
문제는 이런 위기 대응책이 민간의 부실을 정부의 부실로 그대로 이전하는 것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라는 거품 파열을 과도한 재정 지출이라는 새로운 거품으로 덮으면서 일시적으로 위기가 해소된 것처럼 보였지만 진정한 문제해결은 아니었다. 결국 전 세계가 재정을 풀어 거품 붕괴의 고통을 최소화하려 했지만 그리스, 스페인 등 ‘약한 고리’를 통해 문제가 불거져 나올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의 지난해 재정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12.7%(294억 유로)로 유럽연합(EU) 가이드라인 3%의 4배가 넘는다. 그리스의 국가부채는 GDP 대비 112%로 증가했다.
그리스 다음으로 지난해 재정적자 규모가 큰 나라는 아일랜드로 GDP의 12.5% 수준. 스페인도 지난해 GDP의 11.2%의 재정적자를 기록했다. 스페인은 18%에 달하는 높은 실업률로도 크게 고통 받고 있다.
또 포르투갈과 이탈리아가 지난해 각각 GDP의 9.3%와 5.3%의 재정적자를 기록했다.
▲ 이번 유럽 재정위기의 핵심인 그리스의 국회의사당. ⓒ연합
동유럽→남유럽 ‘폭탄 돌리기’
재정위기는 예상치 못한 일이 전혀 아니다. ‘닥터 둠’이라 불리는 마크 파버 <글로벌붐앤둠> 발행인 등 적지 않은 전문가들이 저금리 정책과 확장적 재정정책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2008년 9월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미국발 금융위기도 이미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을 거치면서 예견된 일이었으나 막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PIGS 국가’의 재정위기를 이들 국가가 자력으로 해결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재정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세금을 많이 걷거나 재정지출을 줄이거나. 하지만 현 경제상황에서는 두 가지 모두 할 수 없는 일이다. 세금을 많이 걷으려면 경기가 좋아져야 하는데 이들 국가들은 모두 올해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할 가능성이 크다.
재정 지출을 줄이면 경기가 악화된다. 그리스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공공부문 노동자의 임금 삭감, 증세 등 긴축정책을 발표했지만 그리스 최대 노동조합 전그리스노동조합연합(GSEE)이 공공부문 근로자와 연대 파업 방침을 발표하는 등 내부 저항에 부딪혔다. 또 한국이 지난 97년 외환위기 직후 IMF가 요구하는 긴축정책을 받아들였다가 오히려 문제가 악화됐던 것처럼 섣부른 긴축정책은 위험하다.
또 일시적 자금유입을 통해 위기 국면을 넘기는 것도 기대하기 힘들다. 이들 국가는 유로화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어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통화가치가 급락해 환율 변화를 노린 자금 유입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프랑스, 독일 등 유럽연합(EU) 내 다른 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들 국가들이 안정된 상태라면 가능한 일이지만 문제는 이들 국가도 지난해 큰 폭의 재정적자를 기록하는 등 어려운 상태다. 프랑스도 지난해 재정적자가 GDP 대비 8.3%를 기록했다.
유럽 내에서 보면 위기가 동유럽에서 남부유럽으로 옮아간 셈이다. 동유럽 금융위기는 2009년 2-3월 국제공조로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났으나 대외 채무를 비롯한 신용문제의 해결 속도는 여전히 미미하다. 부실채권 비율이 늘어나고 있어 동유럽 대출 익스포저가 높은 금융기관들의 추가적인 부실 상각과 실적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다. 때문에 남부 유럽의 재정위기에 뛰어들 주변 국가들의 여지는 더 줄어든다. 프랑스, 독일 등 유로존 국가들은 현재 안고 있는 부실도 감당하기 힘든데 위험자산에 속하는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국채를 더 감당해야 한다는 얘기다.
PIGS국 국채, 2분기가 더 위험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PIGS 국가가 발행한 국채의 원금과 이자지급이 오는 3~9월에 집중돼 있다. PIGS 국가에 돌아오는 만기국채(원금과 이자 포함)는 1~2월은 2억 유로(약 3200억 원)에 불과하지만 3월(216억 유로,·약 34조6000억 원)부터 크게 늘어난다. 특히 2분기 530억 유로(84조8000억 원), 3분기는 772억 유로(123조5000억 원)에 달한다. 2분기 이후 만기도래하는 국채들은 규모가 크고 신용등급 하향조정 우려로 연장이 쉽지 않다. 오바마 미 대통령의 대형은행 규제 정책으로 위험자산에 대한 기피분위기가 확산되고 해외투자에 대한 회수가 시작되는 흐름도 이들 국가들에는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실제 올 들어 포르투갈, 그리스 등이 발행한 국채의 금리가 치솟았지만 신규 발행은 여의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면 사실상 유로존이 깨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국에는 독일, 프랑스 등이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미 발행한 그리스의 국채를 대부분 소화하고 있는 게 유럽 국가들이다. 또 유로화 가치 폭락도 계속 방치할 수 만은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 프랑스 등이 관광개발권 이양, 공무원 감축 등 가혹한 구조조정을 강제하는 대가로 만기가 돌아오는 그리스 국채의 보증을 설 것이란 전망이다. 문제는 동유럽발 위기가 PIGS국 재정위기 해결에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해결 방식이 ‘폭탄 돌리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재정적자의 복수, 최후의 위기 도래?
그리스 등 일부 유럽국가의 재정위기보다 더 큰 위험 요인은 선진국 재정위기다. 대우증권은 2일 “선진국 국가들도 유럽과 마찬가지로 상반기 중 정부국채 만기가 집중돼 있다”며 “미국은 상반기 중에 1조 6000억 달러의 만기가 도래한다. 영국도 상반기에 1370억 달러의 국가부채 만기가 돌아오는데 이중 600억 달러가 정부 부담”이라고 지적했다.
물론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 재정위기가 당장 일어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투자은행의 위기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 위기의 근본 원인이 해소되지 않는 한 위기는 극복된 게 아니다. 유예됐을 뿐이다. 선진국 재정위기도 마찬가지 위험 요소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우증권은 “중장기적으로 볼 때 선진국이 갖고 있는 위험은 취약해진 수급 여건 속에서 금리 상승이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동안 금리가 낮게 유지된 덕분에 국채에 대한 이자 부담은 제한적이었지만 국채발행이 급증한 가운데 금리가 상승할 경우 이자를 갚아 나가는 것도 벅찰 수가 있다”고 지적했다. 재정위기의 심각성은 ‘최후의 안전판’인 ‘정부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파버는 “경제 시스템 내 많은 빚이 민간에서 정부로 이동했다”며 “재정 파산이 5년 내에 올 수도 있고 10년 또는 15년 내에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정부 부채에 대한 이자 부담이 급증해 돈을 찍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이로 인해 초인플레이션과 경제시스템 붕괴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각국 중앙은행들이 금융위기를 촉발했던 저금리 정책을 유지함으로써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위험을 국가재정을 통해 해결하는 것은 가장 손쉬운 해결방법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미래세대에 리스크를 떠넘기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 과연 안전할까?
이명박 정부는 유럽발 재정위기에 대해 한국은 전염 가능성이 낮다는 입장이다. 기획재정부는 7일 “가장 취약한 그리스의 경우 국내 금융회사의 익스포져는 지난해 9월 기준으로 3.8억 달러로 전체 익스포져 534억 달러의 0.72%수준에 불과하다”며 “국내 금융시장의 경우 미치는 직접적인 파급효과는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재정부는 또 “우리나라의 국가부채가 35.6%로 다른 나라에 비해 낮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공기업과 공적금융기관의 부채까지 포함한 공적영역의 부채는 700조 원 안팎으로 GDP의 70%에 가깝다.
규모도 규모지만 위험한 지점은 빠른 증가 속도다. 9일 한국은행 자금순환 통계에 따르면, 일반정부와 공기업의 부채를 합한 금액은 작년 9월말 현재 610조8074억 원으로 전년 같은 시기의 496조556억 원보다 23.1% 늘어났다. 관련 통계가 나오기 시작한 2004년 이후 최대의 증가율이다. 국민주택기금과 예금보험기금 같은 공적금융기관 부채까지 합치면 700조 원 안팎으로 국민 1인당 1500만 원에 달한다.
이명박 정부의 주장과 달리 한국의 정부부채가 ‘안심해도 될 형편’은 아니라는 사실은 최근 한국이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빠른 속도로 신용부도스왑(CDS) 프리미엄이 치솟고 있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지난 5일 한국의 CDS프리미엄은 128bp로 지난달 15일 이후 3주 동안 42bp나 급증했다. CDS프리미엄이 높아지는 것은 부도 위험이 증가한다는 의미다.
한국의 CDS프리미엄은 지난해 3월3일 465bp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지난 1월11일 76bp까지 떨어졌으나, 최근 유럽발 재정위기 가능성이 불거지면서 다시 급증했다. 이런 상승폭은 그리스(94bp 증가)에 비해서는 절반 수준이지만 스페인(45bp)과 비슷한 수준이다. 아시아권 중에서는 필리핀(+53bp)를 제외하곤 가장 상승폭이 크다.
이와는 별개로 유럽발 재정위기가 한국경제에 간접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크다. 바로 수출 감소다. 조복현 한밭대 교수는 “한국경제가 수출주도 경제로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서 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 시장인 중국, 미국, 유럽 모두 수출 여건이 크게 나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최근 중국은 긴축 정책으로 돌아섰고, 미국은 실업률이 지난 1월 다시 10%대 아래로 떨어지는 등 더딘 회복 상황을 보이고 있는데 유럽마저 재정위기의 여파로 경기가 나빠지고 있다. 지난해 ‘빠른 회복세’의 원동력이었던 수출이 크게 줄어들 경우 이명박 정부가 장담하는 ’5% 경제성장’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가 될 수 있다.
/전홍기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