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존재를 부정하고 ‘가스통’을 들었나?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고엽제전우회와 에이전트 오렌지
기사입력 2010-06-24 오전 11:12:53
한국 정부의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에 의문점을 지적한 문서를 참여연대가 유엔에 보냈다고 300명의 고엽제 전우회 회원들이 참여연대 앞에서 항의집회를 하다 승합차에 LPG 가스통을 매달고 돌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백주(白晝)에 대한민국 국가원수가 근무하는 청와대 본관에서 1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일이다. 구글 어스로 재보니 그 거리가 직선 860미터다.
고엽제전우회는 테러리스트인가?
수도 한복판에서 차량에 가스통을 매고 건물로 돌진하는 행위는 테러 행위에 다름 아니다. <조선일보> 류의 극우 논객들이 좋아하는 비유에 따르자면, 미국 워싱턴의 백악관 반경 1킬로 안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총기 사용에 별다른 제한을 받지 않는 미국의 공권력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지금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 테러 용의자의 혐의 가운데 하나도 차량을 이용해 프로판 가스를 폭발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엽제전우회는 테러리스트 조직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국가 권력이 일부러 은폐하려 했던 슬픈 상흔을 지닌 역사적 피해자들의 단체다. 고엽제전우회는 고엽제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민주화 이후인 1990년대 초 모임이 시작되어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 12월 국가보훈처로부터 사단법인 허가를 받은 공식 조직이다. 이 조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고엽제가 뭔지 알아야 한다.
전우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고엽제란 “인류 역사상 가장 독성이 강한 물질인 다이옥신(dioxin)이 함유되어 있는데 (중략) 다이옥신이 얼마나 독성이 강하냐 하면 치사량이 0.15그램인 청산가리의 1만 배, 비소의 3천 배에 이르는 독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다이옥신 1그램이면 사람 2만 명을 죽일 수 있는 지구상에서 독성이 가장 강한 독극물이다. 이것은 잘 분해되지도 않을뿐더러 용해도 되지 않아서 인체에 극히 적은 량이 흡수되었다 해도 점차로 몸속에 축적되어 10년~25년이 지난 후에도 각종 암, 신경계 손상, 기형유발, 독성유전 등의 각종 후유증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고엽제 피해자는 왜 발생했는가? 전우회 홈페이지의 설명을 들어보자.
“베트남 전쟁기간 중 베트콩의 은둔지와 무기 비밀수송로로 이용되어온 정글을 제거하고 시계를 청소하기 위해, 또 베트콩 경작지 농작물 제거를 위해 1960~1971년까지 베트남 국토의 15퍼센트에 해당되는 60만 에이커의 광범위한 지역에 2000만 갤런의 고엽제를 살포하였다. 그 중 80퍼센트에 해당하는 1600만 갤런의 고엽제를 한국군 작전지역에 살포하였다.”
한국 정부는 1964년 7월 18일부터 1973년 3월 23일 사이 연인원 31만 명의 군인을 베트남전쟁에 보냈다.
▲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공중에서 고엽제를 살포하고 있는 장면 ⓒ미 공군박물관
아무런 주의나 경고도 없었던 고엽제
전우회 홈페이지에 따르면 “베트남에서 고엽제 사용에 관한 별다른 지시나 주의사항도 없었고, 특히 비행기로 공중 살포 시에는 모기에 물리지 않는다고 고엽제가 쏟아지는 곳을 쫓아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더 맞으려 했다. 부대 주변에서 제초작업을 하는 병사들은 고엽제 가루를 철모에 담아서 맨손으로 뿌리기도 했다. 작전 기간 중에는 흐르는 물을 수통에 담아서 거기에 소독약 몇 알만 넣어 마셨다.
이러다 보니 그 고약한 다이옥신은 우리 참전 용사들의 눈, 코, 입, 피부 등을 통해 아무런 여과 없이 전신에 숨어 축척 되었다. 이와 같은 피해는 국적에 관계없이 미군을 위시한 모든 나라의 장병들이 모르는 사이에 많은 양의 다이옥신을 몸속에 축적시켜둔 채 전쟁은 끝났다. 적을 섬멸하기 위하여 뿌렸던 고엽제가 10~25년이 지난 후 부메랑이 되어 이와 같이 우리 노병을 죽이고 있다.”
미군 화학전의 일환으로 살포된 고엽제
고엽제전우회가 말하는 고엽제는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로 미군이 1961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남에서 제초전(除草戰, herbicidal warfare)의 일환으로 살포한 맹독성 제초제다. 제초전은 화학전의 일환으로 적이 먹는 식량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적이 숨는 식물계를 파괴하는 전쟁 방식을 말한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화학전을 벌였고, 그를 위해 사용한 무기가 에이전트 오렌지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미국 정부가 에이전트 오렌지의 위해성을 전쟁 당시 이미 파악해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베트남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480만 명의 베트남 국민이 에이전트 오렌지에 노출되었고, 그 중 40만 명이 죽거나 장애인이 되었다. 그리고 50만 명의 신생아가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남한에도 뿌려진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 개발의 단초를 개척한 사람은 미국의 식물학자인 아더 갈스턴(Arthur Galston)이다. 미국의 일리노이 대학에서 수학한 그는 1943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2차 대전 중에는 미국 해군성의 ‘천연자원 담당관’으로 복무하다가 1946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제대했다.
일찍부터 에이전트 오렌지의 위험성을 깨달은 그는 1965년부터 미국 정부에 사용 중지를 요청하는 로비를 벌였고, 베트남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걸고 당선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1971년 마침내 사용을 금지시켰다. 아더 갈스턴은 2008년에 죽었다.
미국 정부는 1940년대 중반부터 화학전의 일환인 제초전을 실험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세계 각지에서 실험을 거듭했고, 실전 투입은 1961년 8월 10일 베트남에서 처음 실행되었다.
그런데 에이전트 오렌지가 베트남에만 뿌려진 게 아니었다. 인접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에도 무차별 살포되었고, 대한민국의 남방한계선 인접지역에도 뿌려졌다.
2000년 7월 대한민국 국방부는 ‘고엽제가 사용된 남방한계선 인접지역의 범위에 관한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에 따르면, “①남방한계선에 설치된 철책에서 남쪽 또는 북쪽으로 100미터까지의 지역, ②남방한계선에 인접하여 설치된 관측소·지휘소 기타 주요 군사시설의 주변지역, ③남방한계선에 설치된 철책 주변에 있는 전술도로에서 왼쪽 또는 오른쪽으로 30미터까지의 지역”에 에이전트 오렌지가 살포된 것으로 인정되었다.
고엽제전우회가 “1967년 10월 9일부터 1970년 7월 31일 사이 대한민국 남방한계선 인접지역에서 군인이나 군무원으로서 복무하거나 고엽제 살포 업무에 참가하고 전역‧퇴직한자”를 지원 대상으로 보는 것에 미루어보면, 베트남전쟁이 한창이고 북한 특수군의 청와대 습격 등 남북관계가 최악이었던 1960년대 후반 남방한계선 주변에 집중적으로 뿌려진 것으로 보인다.
고엽제 문제 외면했던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고엽제전우회는 고엽제 피해자들의 권익을 위한 단체라는 목적을 지녔지만, 지금 모습은 창립 목적에서 많이 일탈해 있다. 고엽제 피해자들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 활동보다는 우익단체의 행사에 참가해 공권력이나 (자신들이 ‘친북좌파’로 낙인찍은) 시민단체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다.
전우회 홈페이지를 보면 이런 설명이 있다.
“1978년부터 미국에서는 (고엽제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발전되기 시작했다. (중략) 미국에서는 이처럼 요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한민국 제5공화국 정부에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철저한 보도통제와 억압으로 (실제로 1984년 <중앙일보>에서 고엽제 문제를 보도하였으나 타 언론사에 보도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음) 독재 정권하에 있는 한국에서는 대부분 그런 사실을 모르거나 입이 막혀 참전용사들은 베트남 풍토병이라는 원인 모를 질병에 시달리다가 수많은 참전 군인들이 40대의 아까운 나이에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1978년이면 박정희 정권 시절이다. 1984년은 전두환 정권 때다. 친미 보수우익이 판을 치던 군사독재 하에서는 누구도 고엽제 문제를 자유롭게 꺼낼 수 없었다. 군사 정부는 고엽제 문제를 소상히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철저한 보도통제와 억압”으로 일관하였다.
이런 상황은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변하기 시작했다. 정치와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고엽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군사독재에 부역한 장성들은 “고엽제 문제를 향토병 문제”라고 주장하며 물타기를 시도했다. 이 때문에 1994년 6월 고엽제 피해자들이 5공 실세였던 “박세직 씨가 주도하던 대한해외참전전우회를 항의 방문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께 드리는 청원문”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며 만들어진 조직이 고엽제전우회였고, 고엽제 피해자의 대부분은 안락한 후방이 아닌 전투현장에서 생사를 넘나들었던 일반 사병들이었다. 그런 고엽제전우회가 자신들의 존재를 부정하려던 자들이 주도하는 각종 시위에 참가해 불법적인 폭력행사를 서슴지 않고, 고엽제 문제를 세상에 드러내는데 수고한 민주화 세력을 ‘친북좌파’로 몰고, 거기에 더해 유엔이 인정한 한국의 대표적인 시민단체 사무실로 LPG 가스통을 단 차량을 몰고 돌진하는 사태까지 이른 오늘의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 지난 17일 서울 종로 통인동 참여연대 건물 앞에서 한 고엽제 전우회 회원이 승합차 앞에 가스통을 매달고 건물을 향해 운전하자 경찰이 제지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1999년 5월 대한해외참전전우회가 <김대중 대통령께 드리는 청원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는 지난 1991년 월남전 참전을 했던 호주의 한 교민에 의해서 최초로 고엽제란 병명을 알게 되었고, 1984년 미국ㆍ뉴질랜드ㆍ호주의 월남전 참전 군인들은 고엽제 피해 보상을 위하여 미국의 제약회사와 협상을 한 결과 1억8000 달러의 고엽제 기금을 설치하기로 하고, 그 보상지급이 이미 종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실로 경악을 금할 수 없는 정부의 처사에 불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우리 정부에서는 월남전 참전 고엽제 피해자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984년) 당시 정부와 미국의 한국대사관은 월남전 고엽제 피해에 관한 협상 당시의 사실을 전혀 확인ㆍ파악할 수 없었는지? 정보화 시대를 맞아 미국에서 큰 문제로 야기되었던 고엽제 피해보상 문제를 어떻게 하여 우리 정보기관에서는 파악조차도 할 수 없었는지? 한국의 언론 특파원들은 어떻게 하여 이러한 사실을 기사화하지 않았는지?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도 대미보상 등 정부가 당연히 도와야 할 사항을 당사자(참전군인)들의 책임으로만 전가하고 있는 정부의 처사는 무엇인가? (중략) 더욱이 정부가 전사상자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한 수령 근거와 지급 근거마저도 확인 제시하지 못하고 어느 개인의 소장 복사본으로 일부분이 확인되었다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지?”
진짜 책임자들에게는 물어나 보았나?
외국의 고엽제 피해자들이 에이전트 오렌지를 만든 미국의 제약회사 다우 케미컬, 몬산토, 다이아몬드 알칼리를 상대로 벌인 소송에서 이긴 게 1984년이었다.
당시 주미대사는 류병현 씨였다. 류 씨는 베트남전쟁 당시 맹호사단장이었으며, 합참의장을 끝으로 군문을 떠나 최장수 주미대사를 역임했다. 그는 1978년 창설된 한미연합사의 초대 부사령관이기도 했다. 1978년은 미국에서 고엽제 관련 소송이 시작된 해다.
1984년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부장은 노신영 씨, 국방부 장관은 윤성민 씨, 주한 미대사는 리차드 워커였다. 한국 대통령은 전두환 씨, 미국 대통령은 한미동맹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 로날드 레이건이었다.
이들 모두는 고엽제 피해자 소송에 대해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한미동맹의 열렬한 수호자인 이들 중 누구도 대한민국의 고엽제 피해자들에게 소송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재미난 사실은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씨가 1983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 하버드대학과 버클리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지냈다는 점이다. 채 씨는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6.25참전유공자회장이다. 비슷한 시기 현 유엔 사무총장인 반기문 씨도 하버드대학교 케네디스쿨에서 유학 중이었다. 이들이 에이전트 오렌지 문제를 국내에 제기했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대한해외참전전우회가 (자신들이 친북좌파라고 비난하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던졌던 질문을 고엽제전우회는 베트남전쟁에서 자신들을 지휘했던 장군들과 군사독재에 부역했던 고급 관료들에게 던진 적이 있는가? 김대중 대통령에게 던졌던 질문을 이명박 대통령에게는 던져보았던가?
시민단체 간부에게 린치를 가하고, 사무실로 LPG 가스통을 매달고 돌진하는 것은 고엽제전우회의 설립 목적 어디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가스통을 매달고 참여연대로 향하기보다 860미터 떨어진 청와대로 가서 대한민국 정부가 고엽제 피해자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게 고엽제전우회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을까?
국민들은 고엽제전우회 내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쇠파이프·야구방망이·목검 등으로 무장한 용역업체 직원 100여명을 동원해 폭력 사태를 일삼은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고엽제 피해자들에게 우호적이었던 많은 국민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LPG 가스통으로 대변되는 고엽제전우회의 최근 행태는 국민 다수를 고엽제 피해자들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윤효원 ICEM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