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SSM법이 아니라 한-EU FTA가 실패한 것”

‘통상 귀족’ 김종훈이 말하는 진실, 그리고 거짓말
“SSM법이 아니라 한-EU FTA가 실패한 것”
기사입력 2010-10-28 오후 5:25:21

기업형 슈퍼마켓(SSM) 논란의 중심에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섰다. SSM 가맹점을 규제할 수 있는 상생법(대·중소기업 상생협력에 관한 법률)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춤을 춘다. 유통법(유통산업발전법)과 상생법을 동시 통과시키겠다는 여야 합의가 그의 반대로 일거에 뒤집어지고, 여야가 다시 정기국회 기간 내에 순차 처리하기로 합의했지만 그의 반대로 이마저 어그러진 상태다.

김종훈 본부장의 ‘뚝심’은 일관적이다. 한국은 1990년대 유통시장을 전면 개방하면서 유통산업에 법적 규제를 가하기 힘들다는 게 요지다. 이 때 함께 개방한 가맹사업 역시 마찬가지다. 단어 하나하나를 해석하는데 복잡한 전문 지식이 요구되는 통상 협정문의 특성상 ‘외교 협상의 달인’이 제시하는 근거에 여론이 섣부른 반론을 달기 힘들다. 그래서 그의 말에 더욱 권위가 실린다.

▲ 26일 국무회의에 들어가고 있는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외교 통상 책임자인 그의 말에 국회도 요동친다. ⓒ연합뉴스

동네 상권이 ‘사라지는 전통’?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부터 시작해 2000년대 일련의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에 이르기까지 세계화와 개방의 화두는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고조된 일자리 감소와 청년실업, 내수경기 후퇴와 이에 따른 자영업의 몰락 등에 대해서도 세계화와 개방이라는 틀 안에서 해법을 모색하는데 그쳤다. SSM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해결책은 대자본과 중소자본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으로 대표되는 유통 서비스 산업의 ‘선진화’를 통해서 구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김종훈 본부장은 지난 22일 국회 지경위 국점감사에 출석해 “어릴 때 구멍가게가 있었던 자리에 지금은 슈퍼가 들어와 있다. 사라진 구멍가게를 지금 살려낼 수는 없다”며 “그렇게 사회는 발전하고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단순한 ‘발전’의 개념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그 저변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대형 자본을 육성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해 경쟁을 벌이는 사이 시장에서 밀려나오는 수많은 개인을 사라지는 ‘유물’ 취급 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한편으로는 사실상 일국의 대외 통상 책임자가 ‘동네 슈퍼’ 논란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국회 입법을 막는 모습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한-EU FTA가 비준을 남겨놓고 있는 상황에서 상생법을 통과시키면 유럽 국가와의 통상 마찰을 빚을 수 있고, 국제기구를 통한 분쟁 해결 절차를 밟으면 한국이 이기기 힘들다는 것이 명분이다.

FTA가 가장 완벽한 형태의 통상 모델이라면 김 본부장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예전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논란이 불거져 촛불시위로 이어졌듯, 한-EU FTA의 협상만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이에 반하는 가치를 배척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전문성으로 포장된 자유무역 협정의 실체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상생법을 향해 쏟아내는 김 본부장의 ‘전문가적 식견’에서 진실과 진실이 아닌 것을 가려내야 하는 이유다.

▲ 중소상인들은 김종운 본부장의 말처럼 “살려낼 수 없는 이들”이 될까? ⓒ프레시안 자료

“한국 사회에 ‘FTA 레짐’ 자리잡아”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주최한 ‘한-EU FTA와 상생법’ 토론회가 열렸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를 비롯해 최승환 경희대 교수, 심영규 동아대 교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황희석 변호사 등 통상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EU FTA의 협정문과 SSM 규제법 사이에 불거인 논란을 분석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 의원 측은 외교통상부에도 참석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날 토론회의 화두 역시 김종훈 본부장이었다. 이해영 교수는 “한국 사회에 일종의 ‘한-미 FTA 레짐(regime)’이 자리잡은 것 같다. 대중의 접근이 차단되고 정보 유통이 어려워 감시의 사각지대가 생기면서 ‘통상 귀족’이나 통상 특권층이 등장했다”며 “과거에 ‘안보 귀족’들이 간첩단 조작 사건을 만들어냈듯이 툭하면 WTO니 GATS(서비스협정)니 들이대면서 국민을 협박하고 사기를 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촛불 논쟁 때도 그랬듯 ‘통상 귀족’들은 100% 틀린 이야기를 하진 않는다”면서 “51% 맞거나, 혹은 51% 틀린 이야기로 대중을 약 올린다”고 덧붙였다. 그의 말처럼 참가자들은 그동안 김종훈 본부장과 외교부의 ‘약 올림’을 하나하나 짚어갔다.

1. 상생법은 너무 강력한 규제여서 외국 기업의 접근을 막는다?

상생법 개정안의 핵심은 가맹 SSM을 사업조정 신청 대상에 포함시키도록 하는 데 있다. 사업조정이 신청되면 중기청이나 지자체에서 영업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도록 권고할 수 있고 이후 조정 및 협의를 거쳐 주위 상권이 지나친 타격을 입지 않도록 품목이나 영업시간을 조정하게 된다.

하지만 김 본부장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업조정 제도가 강력한 권한을 갖는 건 아니다. 이정희 의원은 “정부가 유통산업에 사업조정 제도를 적용한 지난 2009년 7월부터 1년 동안 178건이 신청됐는데 이중 92곳이 자율조정하고 5곳이 조정을 권고받았다”며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담배·쓰레기봉투·소주 등의 일부 품목제한에 그쳤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게다가 중소기업청은 사업조정 제도에 벌칙 조항이 붙으면 통상 문제로 번질 수 있다며 사실상 (권고를 어긴 SSM에 대한) 처벌이 어렵다고 밝혔다”며 “사업조정 제도는 실효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한 제도”라고 덧붙였다.

황희석 변호사도 거들었다. 황 변호사는 “사업조정 제도의 절차를 자세히 살펴보면 조정 협의가 결렬되면 조정 권고를 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불이행 사실 공표를 한 후 공표를 이행하지 않으면 이행 명령을 내리는 복잡한 절차로 되어 있다”며 “다른 경제법규에서 바로 이행명령을 내리는 것보다 훨씬 미약하고 불이행에 따른 처벌 역시 약한데도 마치 SSM을 막는 마법의 부적인 것처럼 과대포장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 한국은 유통산업을 전면 개방했기 때문에 규제가 어렵다? 따라서 상생법은 한-EU FTA 협상에 걸림돌이다?

이해영 교수는 “지경위 국정감사에서 김종훈 본부장은 유통시장을 깨끗하게 개방했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4월 지경위 전문의원실이 작성한 상생법 개정안 검토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양허안에서 유제품 및 계란, 육류, 제과, 캔음료 등의 품목을 개방에서 제외했다. 외국 자본이 법인을 설립하는 상업적 주재의 경우 백화점과 쇼핑센터가 금지되어 있다.

하지만 한-EU FTA 협정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반면에 EU 국가 중 프랑스 등 7개 국가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 입점시 경제적수요심사를 거치게 하는 자국 규제를 협정문에 반영했다. 상생법이 국가간 분쟁을 야기시키는 이유는 한국의 유통시장 개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유통분야 협상을 한국에 유리하게 끌고가지 못한 통상교섭본부의 “실패”에서 비롯된 거라는 분석이다.

이 교수는 “WTO에서 예외로 인정하는 FTA 협상에서 GATS 양허안을 맞출 필요는 없었지만 EU는 이를 반영시켰다”며 “결국 한-EU FTA는 상호주의 관점에서 실패한 협상이고 스스로 실패한 협상문에 맞춰 상생법이 위배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승환 교수도 FTA가 “실패한 협상”이라는 데 동의하면서 “상생법 도입은 국제법상으로 타당하다. 통상교섭을 책임진 이들이 국제통상협상의 기본적인 규범적 측면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통상교섭본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끈질기게 협상해야 하는데 걸핏하면 ‘합의에 위배된다’, ‘양허안에 위배된다’라는 단정적인 말을 써 향후 실제로 분쟁이 발생할 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다”며 “국제기구에 제소하면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하는데 과거에도 다들 패소를 예측했던 사건에서 한국이 승소한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WTO가 최종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국제법상 합치 가능성을 부정해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마저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심영규 교수는 “(외교부가) 유독 가맹 점포에 대한 사업조정 제도만을 문제삼는 것도 모순”이라며 “논리적인 일관성을 가지려면 직영 점포 규제도 함께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심 교수는 “WTO는 무역자유화를 주창하지만 한편으로는 각국에 상당한 정책적 재량권을 부여한다”며 “SSM 규제가 외국 기업의 시장접근 제한이 목적이 아닌 한 정책적 재량권 내에 있는 조치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상생법 적용이 단지 영국 기업이 투자한 홈플러스 뿐 아닐라 국내 기업인 이마트, 롯데슈퍼의 SSM 등에도 적용되는 만큼 국제법을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정희 의원 “김종훈 본부장에 책임 물어야”

토론회의 결론은 SSM 규제가 한-EU FTA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한 규제마저 어렵게 만들도록 불리하게 체결된 협정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으로 모였다. 이해영 교수는 “유럽의회가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이행법안을 준비하고 있는데 조사권이 발동되면 SSM 법안은 시비거리가 다분해질 것”이라며 “미국 같은 나라들이 WTO에 위배되는 국내법 우선 조항을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고수하고 있는데 우리도 EU의 사정이 변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상충되는 부분에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희 의원은 김종훈 본부장을 직접 겨냥했다. 이 의원은 이날 CBS ‘뉴스쇼’에서 “정부관료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국회의 합의, 상인들의 합의가 무너져 (규제법안이) 6개월 동안 표류하고 있고 한-EU FTA도 구멍이 생기고 있다”며 “이런 점에 대해 명확하게 정부관료에 대해 책임을 물어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봉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