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에 매몰된 ‘코리안 드림’
세계일보 | 입력 2011.01.13 21:19
가축 살처분으로 농장폐쇄 사태… 외국인노동자 등 대량 실직위기
[세계일보]“축산기술을 배워 귀국하고 싶었는데,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에서 언제 추방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쫓겨 나지 않고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베트남에서 온 탄(28)씨는 충남 천안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로 전화를 걸어 “구제역 발생 후 퇴직금을 받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지만
3개월 내에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불법체류자가 된다”며 이같이 호소했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운영하는 천안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에는 탄씨와 같이 구제역으로 인한 살처분으로 일자리를 잃을 처지에 놓인 외국인
농장 근로자들의 전화와 팩스 상담이 잇따르고 있다. 주로 중국과 베트남, 네팔 국적의 외국인 근로자들은 코리안 드림을 접은 채
강제 출국당할 것이란 우려 속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내국인 축산노동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천안의 양돈농장에서 일하는 이모(51)씨는 “대부분의 농가들이 많은 부채로 살처분과
함께 다시 일어설 여건을 마련하지 못할 것이고, 이 때문에 축산농가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실직할 것”이라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국을 가축전염병 공포분위기로 몰아넣은 초유의 구제역 사태로 농장 폐쇄가 이어지면서 축산노동자들의 대량실업이 구제역의 또 다른
그늘이 되고 있다.
양돈협회 등에 따르면 전국 8000여 양돈농가에서 일하는 노동자 3만여명의 절반 이상이 외국인이며 이 가운데 1만3000여명은
‘불법 체류’ 신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내국인 축산노동자들 대부분도 4대 보험에 가입되지 않는 등 불안한 고용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축산노동자들은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벼랑 끝에 내몰린 절박한 자신들의 처지 때문에 근무경력을 속이고 다른 농장을 기웃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농장주 중심의 현 구제역 피해 대책이 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돼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정부는 구제역 피해 발생 시 축산 농장주에게는 시가로 전액 보상과 함께 생계안정 자금, 경영안정 자금 등을 지원하고 중·고생
자녀들의 학자금도 면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축산농가에 고용된 근로자 지원 대책은 전무하다.
축산노동자들은 “사업주들의 피해가 크지만 그 안에서 목매고 어려움을 참아가며 생활한 많은 종사자들이 갈 곳을 잃고 있다”며
“막장에 가까운 열악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을 보호할 대책이 절실하다”고 호소했다.
천안=김정모 기자 race121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