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운동과 근본적 사회 변혁

전쟁과 근본적 사회 변혁(다힘께 2002에서)

지배자들과 언론은 전쟁을 벌일 때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전쟁은 불가피하다”고 항변해 왔다. 항변의 이유로 나찌의 만행, 사담 후세인 같은 독재자들이 열거됐다. 지금은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오사마 빈 라덴이 그 자리에 앉혀졌다. 그러나 이 모든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벌이는 전쟁은 언제나 무고한 평범한 사람들의 목숨을 희생시켰다. 또, 지배자들은 전쟁 노력을 위해 국내의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노동자들을 더 한층의 궁핍으로 내몬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는 한편에서 전쟁에 대한 혐오를 낳는다. 전쟁에 대한 지배자들과 언론의 애국주의적·호전적 악선동은 처음에는 대중의 지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늘어나는 전쟁의 참상과 민주주의 박탈·내핍 강요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전쟁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많은 경우에 전쟁의 참상은 결국 사회 내의 계급 투쟁을 격화시켜 중대한 사회 변혁을 일으켰다. 지난 세기에 벌어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이것을 극적으로 보여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

20세기 초 식민지 쟁탈을 위한 경쟁은 제1차 세계대전을 불렀다. 전쟁이 계속된 4년 동안 모두 1천만 명이 죽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러시아 혁명과 함께 끝났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이 병사들을 몰살하고 농민의 경작지 소유를 인정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던 국내 지배자들을 용서하는 것을 뜻함을 알게 됐다. 1917년 10월 혁명은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반전 운동이었다. 그들은“빵, 평화, 토지”라는 볼셰비키의 슬로건 아래 싸웠고, 그리하여 러시아는 전쟁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0월 혁명은 다른 나라 ─ 특히 독일 ─ 의 성장하는 반전·사회변혁 운동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을 신속히 종결시켰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유럽은 전반적 위기로 빠져들었다. 191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대중 파업이 일어났다. 부다페스트 근처의 헝가리 최대 군수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들불처럼 확산돼 2백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결정적으로, 1918년 11월 4일 독일 대양함대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독일 제국이 붕괴했다. 카이저(황제)는 네덜란드로 도망갔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동부전선의 전쟁을 종결시켰다면 독일 혁명은 서부전선을 붕괴시켜 제1차 세계대전을 실제로 끝장낼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과 독일 혁명은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주었다. 헝가리와 바바리아와 핀란드와 라트비아에서 소비에트 정부들이 짧게나마 권력을 장악했다. 터키의 술탄(황제)이 타도됐다.
승전국들도 내전에 휩쓸렸다. 영국 군대는 1916년 부활절 봉기로 터져 나온 아일랜드 민족해방운동과 싸우면서 마비 상태에 빠졌다. 1919년은 1840년대의 차티스트 운동 이래 영국 국가가 직면한 가장 위험한 해였다. 항명과 병사평의회, 경찰 파업, 아일랜드 내전, 대규모 파업 물결, 투표권을 획득하려는 여성들의 투쟁 ─ 이런 투쟁들이 전쟁 중에 그리고 종전 직후 영국을 뒤흔들었다. 이탈리아는 1920년 9월의 공장 점거에서 절정에 이른“비에뇨 로소”(붉은 2년)를 경험했다.“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러시아 혁명가 레닌의 구호는 말 그대로 현실이 됐다. 전 세계 지배자들은 거의 5년 동안이나 계속된 유럽 강대국들을 뒤흔든 일련의 반란들에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순전히 민족주의에 근거해 치렀다. 그러나 참호 속에서 몇 년의 세월이 흘러가자 민족주의는 시들어 갔다. 결국 그 끝은 불만과 반란, 혁명의 물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제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에 사람들을 또다시 동원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연합국 지배자들은 이 전쟁이“파시스트의 위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떠한 면에서도 반(反)파시즘 전쟁이 아니었다. 연합국은 실제로 히틀러의 의도를 분쇄하고 유대인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유럽 지배자들 대다수는 좌익의 도전에 직면하면 언제나 파시즘을 옹호하고 찬양했다. 1944년 그리스에서 영국 군대는 레지스탕스를 공격하고 친파시스트로 구성된 정부를 임명했다. 사실, 영국이야말로 소련의 위협과 허약한 중부 유럽에서 프랑스가 세력을 확장할까 봐 두려워 히틀러의 재무장을 지원한 장본인이었다. 영국의 직접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독일의 재무장 계획은 무산됐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5천만 명이 죽었고, 3천5백만 명이 부상당했으며, 3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실종됐다.
전쟁이 끝나면서 서구 지배자들은 파시즘의 붕괴가 혁명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지배자들의 두려움은 현실이 됐다. 그리스,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에서 폭발적인 계급투쟁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파시스트 압제자와 싸웠고, 자본가들에 대항해 싸웠다. 영국에서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 더 많은 폭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헤일셤 경의 유명한 말이 유행하게 됐다.“그들에게 사회 개혁을 하사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당신들에게 사회 혁명을 선사할 것이다.”1945년 영국 노동당 정부는 영국 역사상 가장 체계적인 개혁 강령을 발표했다. 노동자들이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1943년 3월 초 순전히 경제적 요구들 ─ 폭격으로 인한 피해 보상과 임금 인상 ─ 로 시작한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파업은 곧 즉각적 평화와 독일과의 동맹 중단이라는 정치적 요구로 발전했다. 1944년 12월 시칠리아에서는 강제 징집 반대가 봉기로 나아갔다. 1945년 독일군이 무너졌을 때, 거대한 북부 산업 도시인 밀라노아 토리노의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장악해 버렸다. 2만여 명의 파시스트들이 총살당했다.
그리스는 가장 결정적 기회를 맞았던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리스에서 레지스탕스들은 1944년까지 7백만 명 인구 가운데 2백만 명에 이르는 지지자를 확보했다. 독일이 물러간 뒤 레지스탕스들은 나라 거의 전체를 통제하게 됐다. 처칠과 스탈린이 합의한 대로 영국이 점령군으로 들어오자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맞섰다. 그리스 주재 영국 대사는“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적어도 혁명 그 이상이다.”라는 편지를 처칠에게 보내야 했다.
유럽만이 혁명의 칼날 위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중국, 베트남, 알제리, 포르투갈령 식민지들에서 영웅적인 민족 해방 투쟁이 벌어졌다. 중동도 반란의 물결에 휩싸였다.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노동자·농민·소상인들은 양차 대전 사이에 영국 지배와 영국이 장려한 시온주의 정책에 반대해 총파업을 벌이며 완강히 저항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에 절정에 이르렀다. 전쟁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의 경제가 휘청거리자 제국의 속박이 느슨해졌고 이 틈을 이용해 반제 운동이 강화됐다. 1940년대 말 이란과 이라크에서 공산당은 일련의 파업 물결을 타고 급부상 했으며, 이 물결은 1948년 이라크에서 대규모 항쟁으로 발전했다. 날로 늘어나는 빈부 격차 때문에 엄청난 불만을 갖고 있던 이라크 노동자와 학생들의 파업과 대중 시위는 그  후에도 거듭 성장해 마침내 1958년 왕정을 타도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두 전선

이처럼 양차 대전은 인류 역사상 다른 어떤 전쟁보다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동시에, 거대한 격변을 낳았다.
물론 모든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의 러시아처럼 성공적인 결과에 이른다거나 또는 근본적 사회 변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전쟁의 규모와 주요 계급들 사이의 세력 균형, 특정 국가들과 세계 경제의 상황 등에 따라 그 수준을 달리하겠지만, 그럼에도 전시에는 모든 투쟁들이 마침내 필연적으로 격화된다. 문제는 이런 기회를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부시가 벌이는 전쟁은 석유와 전략적 이익을 위해 약소국을 상대로 벌이는 제국주의 전쟁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으로 중동은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다. 파키스탄은 반미·반전·반정부 시위로 엄청난 위기로 빠져들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중동 지역에서 줄곧 미국의 하위 파트너 노릇을 해 온 부패한 왕가 때문에 대중의 분노가 더욱 커지고 있다. 만약 미국의 공격이 계속된다면 중동 지역은 엄청난 격변에 휩싸일 수 있다. 그리고 세계적 규모에서 반자본주의 운동가들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반전운동을 건설해 세계 자본주의의 경제적·군사적 측면 모두에 맞서 싸우고 있다.
레닌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묘사한“전쟁과 혁명의 시대”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따라서 제국주의 전쟁을 계급 투쟁으로 전환시킨다는 일반적인 접근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윤을 위해, 전략적 이익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거대한 투쟁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공포를 끝장내기 위해서는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과 전쟁을 낳는 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을 서로 연결시켜야 한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지배계급을 특히 놀라게 했던 것은 반전 운동과 그 밖의 다른 투쟁들 ─ 흑인 해방 투쟁처럼 ─ 사이에 형성되고 있던 연대였다. 당시 세계 프로 권투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는 이렇게 말했다.“어떤 베트남 사람도 나를 깜둥이라고 멸시하지 않았다.”자본주의가 낳는 경제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군사적 야만인 전쟁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 반대로,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은 낮은 임금, 불결한 주거, 실업, 복지 삭감, 관료들의 부패, 민주적 권리 억압 등에 항의하는 투쟁과 연결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