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평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운동의 궤적과 전망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운동의 궤적과 전망  

진보평론  제17호  
김세균  

1. 들어가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진척됨과 더불어 국제연대투쟁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이 과정은 동시에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투쟁의 필요성을 더욱 절박한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 글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세계변혁이념이자 자기해방의 이념으로 출현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proletarian internationalism)의 관점에서 노동자계급의 그간의 국제주의적 실천의 역사를 개관해 보고, 이에 기초하여 그러한 실천의 미래를 전망해 보려고 한다. 노동자계급의 그간의 실천 속에서 어떤 교훈을 끌어낼 수 있고, 이를 통해 그 실천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구명해 보는 것이 이 글의 중심적인 관심사이다.

2.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민족국가(내지 국민국가)로 분열된 자본주의세계에서 계급적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추구해야 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해방이념으로 출현했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먼저 자본이 그 본성상 처음부터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운동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이 왜 ‘세계국가’ 내지 적어도 자본주의가 최초로 출현한 유럽에서 ‘범유럽적 보편국가’의 성립을 가져오지 못하고, 오늘날과 같은 많은 민족국가 내지 국민국가들의 수립을 동반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현대 세계에서 특정의 인간군은 자신의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하려고 할 때에만 ‘민족’으로서 출현하게 되며, 또 자신의 국가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민족다운 민족’이 된다. 때문에 우리는 ‘민족’ 개념을 현대 세계에서 하나의 국가적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고 있거나, 아니면 아직 국가적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국가적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인간군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민족 개념을 이렇게 규정하면 그 나름의 통합력을 지닌 국가적 공동체의 ‘국민’은 ‘민족’과 동의어가 되며, 그러한 ‘국민국가’ 역시 ‘민족국가’와 동의어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예를 들어 중국에 사는 조선족은 과거에는 한민족의 일원이었다고 할지라도 중국 국민으로 살기를 원하는 한 기본적으로 중국 민족의 일원이자 중국 민족을 구성하는 많은 소수 종족들 중의 하나이다. 때문에 중국의 조선족은 한민족에 대해 과거에는 하나의 민족에 속했던 특수한 역사적 인연을 지닌, 한민족과 구분되는 다른 민족의 일원이라는 관계를 가지게 된다. 이와는 달리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쿠르드족은 아직 자신의 국가를 지니지 못한 민족다운 민족은 아니지만 자신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하나의 민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쿠르드족의 운동이 특정 국가 내부에서 독자적인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운동으로 축소되면, 쿠르드족은 민족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크게 보면 다른 민족 내부의 한 종족으로 편입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의 논의와 관련하여 또한 우리는 인종적, 언어적 공통성 등이 민족형성에 크게 작용하지만 민족형성문제가 그 공통성의 문제만으로 축약되지 않는다는 점, 민족은 최종적으로는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여기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어렵다. 다만 자본주의의 발전이 근대민족국가의 수립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지만 그 수립이 모두 자본운동의 결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 자본주의는 오히려 근대민족의 모태가 된 이전의 민족태를 주어진 조건으로 하여 발전했다는 점, 자본주의의 발전에로 모두 환원될 수 없는 절대주의국가의 성립과 국가들 간의 전쟁 등이 근대민족국가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 근대민족국가가 수립된 이후부터 자본주의는 이 민족국가를 기반으로 하여 발전하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할 수 있다.
자본주의세계가 민족국가적 구분에 기초하여 조직되면서 이들 부르주아 민족국가들 간의 공존과 협력을 추구하는 ‘평화주의’나 세계적 보편국가의 수립 또는 국가적 경계를 넘어서는 인류적 공동체를 구상하는 ‘사해동포주의’가 부르주아 국제주의 내지 보편주의 이념으로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식민지 확보를 둘러싼 제 민족국가들 간의 갈등과 세계시장에서의 제 국민자본들 간의 경쟁이 두 차례에 걸쳐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키는 등 부르주아 국제주의나 영구평화의 실현은 실현 불가능한 유토피아적 이상에 불과했다. 게다가 비유럽권 전체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반식민지로 떨어짐으로써 유럽의 민족국가들이 피억압민족의 민족해방 욕구를 억압하는 거대한 제국주의적 전쟁장치로 기능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부르주아국가들 간의 관계는 커다란 변모를 겪게 된다. 그 변화의 핵심은 무엇보다도―소련체제 붕괴 이전에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부르주아국가 모두의 가장 중요한 공통이익이었던 점이 크게 작용하는 가운데―세계자본주의체제가 미국의 강력한 헤게모니 하에 조직되고, 제 국민자본들 간의 융합이 크게 진척됨으로 말미암아 제국주의국가들 간의 협력이 크게 진척된 반면, 이들 국가들간의 갈등이 전쟁으로까지 발전하는 사태가 방지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본융합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국가적 소속이 완전히 폐기되는 것은 아니며, 기존의 민족국가들이 많은 변형을 겪어 왔고 또 앞으로도 겪게 되겠지만 세계자본주의체제의 민족국가적 분할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자국 자본의 운동을 보호하거나 (자국 자본중심의 발전이 불가능한 나라의 경우) 더 많은 자본을 자국으로 유치하려하는 민족국가들 간의 경쟁 및 타국에 대해 정치적․군사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민족국가들 간의 경쟁 등이 결코 해소될 수 없다. 이처럼 민족국가들 간의 경쟁과 갈등이 자본주의 운동의 지양될 수 없는 내적 요소를 구성하는 한, 자본운동의 지구화가 아무리 진척된다고 할지라도 그 본래적 이념에 합당한 부르주아적 국제주의의 구현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이 사실과 관련하여 다음의 몇 가지 점들을 더 지적해야 한다.
1) 부르주아국가들 간의 관계가 기본적으로는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경쟁관계에 의해 특징지어는 이상, 부르주아국가들 간의 공존과 협력이 아무리 진척될지라도 자국 발전을 우선시하는 ‘민족주의’는 자본주의체제의 불가피한 내적 요소를 구성하며, 또한 그러한 한 (사태의 발전에 따라서는 전쟁까지도 몰고 올 수 있는) 부르주아국가들 간의 갈등과 대립 역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 제국주의국가들의 민족주의는 타국을 지배하거나 종속시키려는 ‘팽창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지닌다. 이러한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그것이 비자본주의권의 문명화에 일정하게 기여하는 한에서는 진보적이지만 기본적으로는 반동적이다. 이와는 달리 제국주의적 민족주의에 맞서 출현한 과거의 식민지․반식민지 및 종속국들의 민족주의는 ‘저항적 내지 방어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지닌다고 하겠다. 그러나 저항적 민족주의는 그것이 피억압․피착취민족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이지만, 그것이 아무리 진보적일 때에도 민족의 이름으로 민족 내부의 억압과 차별 등을 봉합하는 측면을 지니고 있고 민족국가들 간의 공존공영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국이익의 추구를 앞세운다는 점에서 많든 적든 반동적인 성격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3) 자본주의세계가 민족주의를 자기구성의 내적 요소로 지님에 따라 부르주아적 국제주의 내지 보편주의는 일반적으로 헤게모니 국가와 자본의 세계적 팽창을 위한 이념이거나, 제국주의국가들 간의 공동이익을 추구하고 하위국가들을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포섭시키는 이념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점에서 부르주아적 국제주의 내지 보편주의는 민족주의의 지양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의 외연의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민족주의들 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이념의 성격을 지닌다.

이처럼 자본주의가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민족국가적 구분에 기초하여 운동하고 있고, 민족주의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무엇보다도 그러한 민족적 구분을 넘어서는 계급적 단결에 기초해서만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달성할 수 있음을 천명하는 이념이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에 대해서는 다음의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1) 자본운동과 자본주의적 착취-억압의 국제적 성격은 노동자계급운동이 국제주의적이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물질적 조건을 이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운동은 민족국가적 분리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운동하고 있다. 이때 민족주의는 ‘인류의 민족적 구분’을 가장 중시하고 민족개념을 계급개념보다 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며 ‘민족적 이익의 확보’를 최상위의 가치로 내세운다. 이와는 달리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인류의 계급적 구분’을 가장 중시하고 계급개념을 민족개념보다 더 보편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며 민족적 이익을 넘어서는 ‘세계 노동자계급 전체의 보편적 이익의 확보’를 최상위의 가치로 내세운다. 실제로 계급적 이익보다 민족적 이익을 앞세우는 이상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한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일반적으로 세계시장에서의 자국자본의 경쟁력 확보나 더 많은 자본유치 등을 통한 자국 발전의 도모 및 타국에 대한 자국 우위의 확보 등을 내세우는 부르주아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또 종속되는 한 국가경쟁력의 확보와 이를 위한 노사협조주의적 관계의 형성 등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한 제 국민자본들 간의 경쟁과 민족국가들 간의 갈등을 매개로 민족적 소속을 달리하는 노동자들간의 경쟁과 갈등 역시 불가피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그러한 한 노동자계급이 수용하는 민족주의가 설령 저항적 민족주의일지라도 민족 내부의 계급적 억압-차별의 해결이 부차화될 수밖에 없고, 저항적 민족주의가 (조건이 주어지면) 팽창적 민족주의로 발전하려는 경향을 제어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저항적 민족주의운동과 결합한다고 할지라도 그 결합은 원칙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관철하기 위한 전술 이상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서는 일국적 수준에서는 기업주의적 의식이나 노사협조주의적 의식의 극복이, 그리고 국제적 수준에서는 무엇보다 민족주의의 극복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2)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노동자계급의 해방이 일국적 수준의 해방이 아니라 오직 세계적 수준의 해방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는 설령 일국 수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자본주의에 의해 전면적으로 포위된 조건 속에서는 그 사회주의체제가 오직 세계 노동자계급 전체의 강력한 연대를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음을, 그리고 일국사회주의는 현실사회주의의 역사가 말해주듯 그런 조건 속에서는 자본주의권의 압력에 압살당하거나 그렇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발전이 많든 적든 왜곡되지 않을 수 없음을 가리킨다. 물론 사회주의혁명이 세계자본주의체제의 패권국가인 미국에서 가장 먼저 성공한다면 사정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세계자본주의체제를 유지시키는 가장 강력한 고리로 기능하고 노동자계급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계급적 헤게모니가 가장 강력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점에 비춰 볼 때 미국혁명이 세계혁명의 출발점이 되기란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설령 미국 노동자계급의 힘이 혁명을 성취시킬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그 한계 내에서도 미국 노동자계급의 힘이 얼마만큼 성장-발전하는가는 세계혁명의 장래와 관련하여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에 속한다.
때문에 혁명이 ‘동시혁명’이나 ‘연속혁명’의 형태로 성취되고 주요 선진국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성취되는 것이 사회주의체제의 왜곡 없는 발전의 필수조건을 이룬다고 하겠다. 나아가 일국 수준의 사회주의체제 역시 자신을 세계적 수준에서의 노동자계급투쟁의 한 부분으로 포함시키고 자국 노동자계급의 이익보다 세계노동자계급 전체의 공동이익을 우선시할 때에만 민족적 구분을 넘어서는 노동자계급 전체의 해방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3) 세계혁명이 성공할지라도 인간의 사회적 삶은 (자본주의세계 속에서도 국가적 공동체들이 그간 많은 변형을 겪어 왔고, 또 앞으로도 많은 변형들을 겪게 되겠지만) 예를 들어 오늘날의 유럽공동체(EU) 소속의 국가들이 그 실현가능성이 얼마나 높은 지는 미리 예측하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나의 ‘유럽연방공화국’으로 통합될 가능성을 우리는 부인할 필요가 없으며, 그 공화국이 통합력을 지닌 공동체로서 발전하면 오늘날의 유럽의 제 민족들은 하나의 유럽민족으로 통합될 것이다. 그런데 유럽공동체의 형성-발전 및 (미래에 실현될지 모르는) 유럽공동체의 유럽연방공화국으로의 발전은 유럽공동체 소속 국가들 간의 경쟁과 갈등을 지양하는 것이긴 하지만, 세계적 수준에서는 미국과 일본 등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거나 더 이상 열등한 지위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자구책의 성격을 지닌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자본주의세계에서 사회적 삶의 기본단위를 이루며, 계급적 착취와 지배를 관철시키는 ‘국가적 공동체’의 형태로써 출현하지만 변혁 이후에는 생산자대중의 직접적인 자기통치체제로 성장-발전할 ‘민족공동체’를 기본단위로 하여 행해질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세계에서 민족공동체들 간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민족공동체들 간에 지배와 종속, 착취와 피착취 및 수탈과 피수탈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경쟁과 갈등관계에 의해 특징져진다. 이와는 달리,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민족공동체들 간의 지배와 종속, 착취와 피착취, 수탈과 피수탈 관계를 없애고, 생산력 발전의 수준이 높은 공동체가 발전 수준이 낮은 공동체를 지원함으로써 민족적 공동체들 모두의 균등적 발전을 보장하는 진정한 우호적 협력관계여야 함을 지시한다. 또한 민족공동체들 간의 교류와 소통은 시장적 교류와 소통과는 구분되는, 상호협력과 연대적 관계의 확대-심화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인류적 공동체는 상호협력과 연대적 관계를 무한히 확대-심화시켜 나가는 제 민족적 공동체들의 민주적 네트워크체제여야 함을 지시한다. 이러한 제 민족적 공동체들의 수평적 네트워크체제는 최종적으로 민족적 공동체간의 구분이 소멸한 단일의 코뮨적 세계공동체로 성장-전화해 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네트워크체제가 처음부터 단일의 코뮨적 세계공동체로 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이러한 세계 공동체의 형성을 변혁의 당면 목표로서 내세우는 것 역시 옳지 않다.
4)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세계 노동자대중의 단결과 그 단결에 의거하는 노동자대중운동을 역사 발전의 기본 동력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국가간의 전쟁과 같은 폭력의 행사 그 자체를 배격하는 사해동포주의나 세계평화주의와는 구분된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는 폭력 사용 그 자체를 절대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폭력이 역사의 진보를 촉진시키거나 지체시키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파악하며, 반동적 폭력에 대한 대항폭력을 조직하거나 역사의 진보를 촉진시키는 혁명적 폭력을 원칙적으로 옹호하는 동시에 침략을 당한 민족의 방어적 전쟁의 수행을 지지한다.

3.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운동의 궤적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운동의 그간의 역사를 거시적 관점에서 개관해보면, 우리는 초기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노동운동의 대두와 더불어 싹트기 시작한 그 운동이 굴절을 거치는 가운데 레닌 지도 하의 제3인터내셔널에서 그 정점에 도달하게 되며, 이후 점차 왜곡되고 퇴조하는 과정을 밟다가 19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최종적으로 파산했음을, 그리고 이를 통해 그 운동의 역사적 대순환이 막을 내린 후 1990년대 중반이후 새로운 조건 속에서 새로운 형태를 띠고 다시 싹터 오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운동의 그간의 역사를 크게 보아 초기 운동의 시기부터 1980년대 말․90년대 초까지의 시기와 1990년대 중반이후의 시기로 나누어 고찰하려고 한다.

1) 초기 운동의 시기부터 1980년대 말, 90년대 초까지

이 시기의 운동은 다시 크게 보아 ① 초기운동의 시기부터 제1인터내셔널 해산까지, ② 제2인터내셔널의 시기, ③ 제3인터내셔널의 시기, ④ 제2차 대전이후의 시기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1) 제1인터내셔널 해산까지

노동운동의 조직에서 국제적이라는 표현이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1856년에 창립된 ‘국제협회’(International Association)의 전신인 ‘국제위윈회’(Committee International)가 결성된 1855년이다. 그런데 초기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유입이 노동자층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이를 배경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이념은 그 이전부터 이미 초기 사회주의-공산주의 노동운동에서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어 1846년 ‘런던 공산주의자 교육협회’는 독일 프롤레타리아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나는 민족에 속하기 전에 인간이며, 인간으로 태어났지, 독일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나는 인류사회에 속하지 독일 연방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 나는 인간적 이해를 지니며, 그것이 다른 것들과 충돌할 경우 나는 인간적 이해를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시킬 것이다” “Adresse des Bildungsvereins in London an die deutschen Proletaria(Sept. 1846)”, abgedr. Der Bund der Kommunisten. Dokumente und Materialen, Bd. 1: 1836-1849. Berlin, 1970.
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의인동맹’(League of the Just)의 창설자로서 독일의 대표적인 초기 공산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던 바이트링(F. Weitling)은 ‘인민들의 신성동맹’, ‘노동자들의 신성동맹’, ‘인류의 위대하고 보편적인 가족’ 등과 같은 개념을 사용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이 오직 국제주의적 실천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맑스가 개입하기 이전의 사회주의-공산주의 노동운동이 대변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이념은 부르주아 사해동포주의의 지평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초기 사회주의-공산주의 노동운동의 발전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이념의 정립과 국제주의적 실천에 있어 맑스가 행한 공헌은 결정적이다. 맑스가―맑스 자신은 만년에 자신의 이론을 ‘맑스주의’로 명명하려는 시도에 대해 끝까지 반대했지만―‘맑스주의자’로서 행한 최초의 정치적 개입은 엥겔스, 지고, 바이데마이어, 베에르트, 프라일리그라트, (훗날 맑스가 『자본』에서 헌사를 바친) 빌헬름 볼프 등과 더불어 1846년 초에 결성한 ‘브뤼셀 공산주의자 통신위원회’에서의 활동이다. 이어 맑스는 1847년 6월 ‘의인동맹’을 재조직한 ‘공산주의자동맹’(the Communist League)에 가담했으며, 관헌들로부터 ‘맑스-엥겔스 도당’이라고 불리기도 한 이 조직의 회원들이 검거되고 재판에 회부됨에 따라 1852년 11월 공식 해산될 때까지 이 조직의 지도적 인물로서 활동했다. ‘동맹’의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맑스는 1848년 엥겔스와 더불어 이 조직의 강령이 된 「공산주의자당선언」을 작성했으며, 1848-49년의 혁명적 정세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지도하고 각국 노동자세력들의 혁명적 연대를 위해 애썼다. 동시에 이들의 운동이 ‘과학적 공산주의’ 사상과 결합할 수 있도록 그 당시 혁명적 인텔리들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조류들과 줄기차게 논전을 벌였다. ‘공산주의자동맹’은, 그 성원의 수가 많을 때에도 400명을 넘지 못한 사실에서도 드러나다시피, 초기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의 여러 분파들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동맹’은 혁명적 노동운동의 여명기, 즉 프롤레타리아운동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아직 미숙하고 조직적으로 취약한 시기에, 그리고 그 운동의 지도적 성원이 이제 막 노동자가 되기 시작한 직인이나 날품팔이들이었던 시기에 ‘과학적 공산주의’ 원리를 제창하면서 그것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려 활동한,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조직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동맹’은 이후에 설립된 각종 대규모 혁명적 노동자 조직들과 공산주의자 조직들의 선구자이자 제1인터내셔널의 맹아이기도 했다.

그런데 맑스가 엥겔스와 더불어 작성한 「공산주의자당선언」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가 견지해야 할 기본 원리들이 (‘선언’의 내용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는 한계를 지니지만) 거의 온전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K. Marx/ F. Engels,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in: MEW Bd. 4, pp. 459-493 참조.

1)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갖고 있는 않은 것을 그들에게서 빼앗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선언」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공산주의자동맹’의 구호로 끝나고 있듯이, 전 세계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해방을 위해 국적을 넘어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해야 한다.
3) 노동자계급에게 조국은 없지만, 우선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자신을 ‘민족적 계급’(national class)으로 상승시키고 자신을 민족으로 형성해야 한다. 때문에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지가 생각하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에서 ‘민족적’이다.
4)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배는 민족들 간의 대립을 최종적으로 소멸시킬 것이다. 계급적 착취가 폐기됨에 따라, 한 민족에 의한 다른 민족의 착취도 폐지될 것이다.

‘동맹’이 해산된 이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실천이 본격화된 것은 1864년 9월 각국 노동자들의 국제적 단결을 기할 목적으로 영국, 프랑스 및 기타 여러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운동 조직이 결성한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즉 ‘제1인터내셔널’이 결성되면서부터이다. 이 협회의 결성은 1862년 제3차 세계산업박람회가 런던에서 개최된 것을 계기로 1862년 5월 영국의 노동자들이 프랑스노동자들에게 ‘국제적 형제애의 축제’를 개최하자고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제1인터내셔널은 유럽과 미국의 수십만 노동자들을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기치 아래 집결시키고 노동운동을 처음으로 강력한 사회변혁의 요인으로 국제무대에 등장시킨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최초의 국제적 대중조직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활동을 통해 맑스주의적 공산주의사상을 대중적으로 보급하고 독일 및 그 밖의 나라들에서 맑스주의적 프롤레타리아정당이 건설될 수 있는 선결조건을 창출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중요성을 지닌다. 이 조직 속에서 맑스는 총평의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는데, 맑스에 의하면 제1인터내셔널의 역사란 “노동자계급의 현실적인 운동에 역행하여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자기주장만을 고집하는 온갖 종파와 아마추어적인 실험에 맞서 싸운 총평의회의 지속적인 투쟁과정”이었다. 실제로 맑스는 이 조직 속에서 투쟁 슬로건 및 강령의 작성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프루동주의, 자유주의적 노동조합주의 및 바쿠닌파의 무정부주의와 계속 투쟁하는 과정에서 이후의 맑스주의적 정치노선의 제반 원칙들을 부단히 발전시킬 수 있었다.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맑스와 엥겔스의 활동은 맑스주의가 유럽사회주의 운동에서 점차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1인터내셔널은 대외적으로는 1870년 3월의 노동자봉기에 의해 생겨난, 역사상 최초의 프롤레타리아국가라 할 수 있는 ‘파리코뮨’이 붕괴된 이후 부르주아지의 ‘반(反)인터내셔널’ 캠페인이 본격화됨으로 말미암아 1873년 이후부터는 대외적 활동을 사실상 중단하게 된다. 더욱이 파리코뮨 이후 인터내셔널의 내부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정당으로의 조직화, 기존 국가장치의 분쇄―이 ‘분쇄’ 테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국가권력 장악을 통한 기존 국가장치의 ‘활용’을 옹호한 「공산주의자당선언」에서의 주장을 교정한 것으로 맑스가 파리코뮨의 경험을 일반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이 정식화한 것이다―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의 수립 및 집중적인 국제연대투쟁의 전개 등을 옹호한 맑스파(‘총평의회 지지파’)와, 국가의 즉각적인 폐지와 집중화 반대 등을 주창한 바쿠닌파와의 갈등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국제연대투쟁에서도 민주성과 더불어 집중성의 확보가 요구된다고 파악한 반면, 바쿠닌파는 인터내셔널이 민족적-지역적 노동단체들의 느슨한 연대적 조직체가 되어야 하고 이들 단체들의 자연발생적인 저항들을 단지 조절하고 감독하는 역할만을 떠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간의 갈등은 바쿠닌파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하여 인터내셔널 본부를 1872년 암스테르담 회의의 결정에 따라 뉴욕으로 옮긴 이후에 더욱 첨예화된다. 이로 인해 인터내셔널이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대중조직에 걸 맞는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하지 못하고, 나아가 각국에서 맑스주의와 융합한 사회주의적 정당운동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을 배경으로 제1인터내셔널은 1876년 7월 필라델피아 회의의 결정에 따라 정식으로 해산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이후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과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자본주의 타도를 상징하는 조직체로서 일정하게는 ‘신화화’되기까지 했다. 또한 제1인터내셔널이 제창한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과 보편적 해방의 이념은 그 이후 제2인터내셔널을 창립시키는 강력한 추동력으로서 작용하였다. 지금까지 논의한 맑스와 엥겔스의 정치적 활동 및 제1인터내셔널에 대해서는 Institute of Marxism-Leninism, Karl Marx, A Biography, Moscow, 1973; Walter Euchner, Karl Marx, Muenchen, 1983; David McLellan, Karl Marx , His Life and Thought, New York, 1973; Auguste Cornu, Karl Marx et Friedrich Engles, 3 vols., Paris, 1955-70; Iu. M. Steklov, History of the First International, New York, 1968; 정운형,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의 투쟁」, ꡔ이론ꡕ제3호, 1992년 가을호 참조.

(2) 제2인터내셔널의 시기

맑스주의 운동의 초기 시기는 맑스-엥겔스가 맑스주의의 이론적 정초가 마련하고, 그들의 저술활동 및 ‘공산주의자동맹’과 ‘제1인터내셔널’에서의 활동을 통해 이른바 맑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룹이 생겨나며, 여기서 더 나아가 맑스주의적 사회주의가 점차 제반 다른 사회주의조류들에 대해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획득해간 것으로 특징져진다. 그러나 이 시기 유럽에서는 근대적 산업프롤레타리아계급의 운동이 아직 본격적으로 대두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운동 역시 아직 대중운동과 융합하지 못한 활동가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그 이후의 시기에 이르면 유럽에서 근대적 산업프롤레타리아계급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형태 역시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되고 노동조합을 통한 대중파업을 전개하는 형태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정당이 건설되고 정당을 통한 정치투쟁이 전개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 노동자계급의 운동이 전투적-변혁적 성격을 띠는 가운데 영국을 제외한 대륙의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적어도 그 운동의 초기 국면에서는) 맑스주의와 노동운동이 광범하게 융합하는 현상이 생겨난다.
노동운동이 각국에서 대중적 노동조합운동 및 독자적 정치운동으로 성장하고, 각국의 사회주의세력들에게 인터내셔널의 재건이 중요한 과제로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을 배경으로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위한 요구 역시 증대한다. 이를 배경으로 1877년 겐트(Gent), 1881년 쉬르(Chur), 1886년 파리, 1888년 런던 등지에서 유럽 노동자들의 국제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이 곧바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립으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다. 이어 1889년 7월 14일 파리에서는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두개의 국제노동자대회가 개최되었는데, 프랑스 노동당 내부의 개량주의분파였던 ‘가능주의자들’이 주최한 노동자대회가 한번의 대회로 끝난 반면, 맑스주의 분파였던 ‘게에드주의자들’이 주최한 대회는 그 이후 유럽의 거의 모든 노동자정당 및 노동조합들을 포괄하는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합체로서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대회로 발전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게에드주의자들이 주최한 대회가 맑스주의를 수용하고 있었던 각국의 노동자정당들의 대표를 망라했을 뿐 아니라, 이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시 유럽 노동운동의 당면 투쟁과제였던 8시간 노동일 쟁취를 위한 투쟁을 전 유럽적 수준에서 힘차게 전개함으로써 그 대회가 유럽노동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2인터내셔널이 창립된 시기에 유럽 전체의 사회주의운동을 이론적-실천적으로 지도한 정당은 독일의 사회민주당이다. 독일 사민당이 제2인터내셔널 전체를 지도하는 정당으로 성장한 데에는―그리하여 당시 제2인터내셔널에 비판적이었던 세력은 이를 ‘인터내셔널의 독일화’라고까지 비난했다―독일 사민당이 유럽의 노동자정당 중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성장한 사실 이외에도, 1893년의 추리히(Zurich)대회에 이어 1896년의 런던대회에서 일체의 합법적 정치투쟁과 의회전술 및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적 개량 등을 거부한 아나키스트들을 인터내셔널로부터 축출하자는 결의를 통과시킨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런데 제2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가 아나키즘 조류에 대한 대항을 중시해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운동과 연합한 것은 제1인터내셔널이 남긴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이후에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 자체의 개량주의화를 촉진시키는 부정적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그와는 별개로, 유럽에서 사회주의적 노동운동의 최전성기라고 불리기도 하는 제2인터내셔널의 시대가 개막되면서 맑스주의는 유럽 노동운동 전체를 대변하는 명실상부한 지도적 이념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카우츠키주의’에 의해 대변되는 제2인터내셔널의 맑스주의는 그 시기 노동운동의 특수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지형에 영향을 받으면서, 맑스-엥겔스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초된 ‘고전적 맑스주의’의 특정 요소들을 발전시키고 다른 요소들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그 나름의 독특한 특징을 지닌 맑스주의로서 발전된 것이었다. 이때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가 고전적 맑스주의의 제 요소들 중 자신의 이론적 기반으로 수용한 것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노동자계급의 성장을 통한 혁명의 도래를 ‘이미 예정되어 있는’ 역사발전의 법칙으로 이해하고 싶은 주관적 희망과 결부되고, 그러한 확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간주된 ‘진화론적-다윈주의적’, ‘경제결정론적’ 역사발전관이었다. 이로써 성립된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는 ① 역사발전을 생산력발전으로 환원시키는 ‘생산력주의적 역사발전관’, ② 자본주의 모순의 지속적인 상승적 확대-심화라는 단선적 발전과정의 산물로서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몰락을 예견하는 ‘진화론적-다윈주의적 경제적 파국론’, ③ (이러한 경제과정이 수반하는) 계급관계의 단순화 경향과 노동자계급의 증대하는 궁핍으로부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힘의 지속적인 증대 및 그들에 의한 국가권력의 장악의 필연성을 직접적으로 도출하는 ‘경제주의적 정치관’, ④ 유럽 혁명과정을 자본주의의 세계적 확장 및 그것과 결부된 전 세계적 수준에서의 모순들의 복잡한 연관으로부터 사고하지 못하는 ‘유럽중심주의적 세계관’ 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그런데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의 이러한 생산력주의적, 경제주의적, 다윈주의적 역사발전관 및 정치관은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의 다수층으로의 전화, 노동자계급의 궁핍의 계속적인 증대 및 이에 기초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힘의 지속적인 증대와 이들의 사민당으로의 결집에 대한 ‘주관적 낙관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부터 ‘혁명적 파국’의 도래를 기대하는 ‘실천적 대기주의’를 낳았으며, 이는 다시 일상투쟁에서 의회적-합법적 투쟁만을 중시하는, ‘이데올로기적 혁명주의’ 내지 ‘혁명적 수사주의’와 결부된 ‘실천적 개량주의’를 산출하였다. 김세균, 「제3인터내셔널 운동과 마르크스주의」, ꡔ이론ꡕ제3호, 1992년 겨울, 55쪽 이하 참조. 그리고 카우츠키주의에 대해서는 G. Steenson, Karl Kautsky, 1854-1938, Pittsburgh, 1978; M. Salvadori, Karl Kautsky and the Socialist Revolution 1880-1938, London, 1979 등 참조.
그리하여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 운동은 최초에 노동자계급이 구사해야 하는 다양한 여러 전술들 중의 하나로서 인정한 ‘의회전술’을 점차 노동자계급 운동의 유일한 전술로서 절대화시켜 나갔으며, 그러한 전술을 절대화시켜 나가는 만큼 운동의 국가화-민족주의화 역시 진척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 하에 놓이는 만큼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는 그 이후 ‘개량주의’를 공공연히 내세우는 세력이 대두하고 그들이 제2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발언권을 신장시켜 나가는 사태에 직면하여 이론적-실천적으로 무능력을 노출하게 된다. 이 사실은 1900년 파리 대회가 드레퓌스 사건 이후에 있었던 밀레랑(Alexandre Millerand)의 내각 참여를 원칙상의 문제가 아니라 전술상의 문제라는 이유를 들어 용인하고, 1904년의 암스테르담 대회가―대중파업을 (여러 부수 조건들을 부쳐) 매우 한정된 개량적 실천을 위한 수단으로서 인정하면서도―총파업을 사회주의적 목표를 달성시키는 유효한 전술적 수단의 하나로서 인정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데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가 개량주의의 대두에 무능력을 보인 것은 무엇보다 최초 독일사민당 내부에서 제기되어 이후 인터내셔널조직들 전체로 확산되어간 ‘수정주의논쟁’이다. 베른슈타인(E. Bernstein)이 대변한 ‘수정주의’는 자본주의의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 부르주아민주주의의 확대 및 이 속에서의 사민당의 괄목할만한 의회진출 등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는데, 경제적 파국론의 부정, 사회발전의 질적 단절의 계기 내지 혁명의 부정, 계급투쟁에 대한 민주주의(적 절차)의 우위, 사회주의적 최종목표의 폐기, 민주주의에 의한 경제통제의 확대-심화 및 개량의 누적을 통한 자본주의의 사회주의로의 점진적인 성장-전화 등을 그 중요한 이론적 특징들로 지니고 있다. 이 수정주의는 독일사민당 내부에서는 1898년의 슈튜트가르트 당대회, 1899년의 하노버 당대회 및 1903년 드레스덴 당대회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1905년의 암스테르담 대회 등에서 기존의 사민당 노선 및 인터내셔널 노선이 확정됨으로써 공식적으로는 패배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 맑스주의’가 고수한 것은 강령상의 맑스주의적 최종목표와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론’에 불과했다. 게다가 수정주의는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가 이미 실행하고 있었던 ‘실천적 개량주의’와 ‘의회주의’ 및 이와 결부된 민족주의에의 굴복 등을 이론적으로 공공연하게 정식화한 것이었던 만큼, ‘수정주의논쟁’에서 실제로 승리한 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 맑스주의’가 아니라 사실은 수정주의였다. 이로 인해 제2인터내셔널 속에 수정주의 조류가 확산되고, 여기서 더 나아가 수정주의가 지니고 있었던 ‘맑스주의적’ 요소들까지도 폐기하는 개량주의 조류가 확산되는 가운데, 제2인터내셔널 및 특히 독일사민당의 실질적인 주도권은 부르주아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비맑스주의적 개량주의세력에게로 이전되어 갔는데, 이러한 사태 발전은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를 무력화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다른 한편, 세계대전이 임박해지는 정세 속에서 제2인터내셔널은 ‘전쟁반대’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누차 결의하고 천명한다. 그러나 1914년에 막상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개량주의세력의 주요 거점이었고 당권을 실질적으로 쥐고 있었던 독일사민당의 의회 프랙션이 자국 전쟁을 지지하고 전쟁국채 법안을 승인한 데에 이어, 프랑스의 사회당이 대독전쟁 수행을 지지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은 사실상 와해되기에 이른다. 부르주아민주주의에 굴복한 제2인터내셔널이 전쟁발발과 더불어 부르주아민족주의에까지 완전굴복하면서 제2인터내셔널은 최종적으로 붕괴되기에 이른다. 제2인터내셔널의 활동 및 수정주의논쟁 등에 대해서는 W. Abendroth, Sozialgeschichte der europaeischen Arbeiterbewegung, Frankfurt/M., 1969.; J. Braunthal, Geschichte der Internationale, Bd. 1, Berlin(Ost), 1978.; I. Krivoguz, The Second International 1889-1914, Moscow, 1989; James Joll, The Second International, 1889-1914, New York 1955; 강신준, 「제2인터내셔널 시기의 마르크스주의」, ꡔ이론ꡕ제3호, 1992년 겨울.; Bo Gustafsson, Marxismus und Revisionismus, Vols. 3, Frankfurt/M. 1972; L. Labedz (ed.), Der Revisionismus, Koeln/ Berlin, 1966. 참조.

(3) 제3인터내셔널의 시기

인터내셔널의 기치 아래 단결하였던 유럽의 사회주의 세력은 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보아 비맑스주의적 개량주의 세력 내지 사민주의 세력과, 맑스주의적 혁명세력 내지 공산주의 세력으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이와 더불어 전쟁 기간 중 자국 부르주아지에 협력하였던 독일의 우익 사회주의 세력은 전쟁에서의 독일 패배와 더불어 몰아닥친 1918-19년의 노동자 봉기 및 평의회운동을 진압하는 데에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타국의 사민주의세력 역시 전후에 이르러 부르주아지와의 협력 노선을 강화하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에 대해 적대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다. 이들 우익 사회주의세력은 1919년 2월의 베른(Berne)회의를 통해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했는데, 제2인터내셔널을 재건시키면서 이들 세력은 맑스주의와 결별하고 의회주의적 길을 걸을 것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다른 한편 맑스주의 운동 내부에서는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다양한 조류들이 나타나는데, 그러한 조류 중 중요한 것으로는 레닌 이론, 평의회 공산주의노선을 주창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 그 자체만을 중시한 게오르그 루카치(G. Lucacs), 칼 코르쉬(Karl Korsch), 안톤 판네쾨크(Anton Pannekoek) 등의 급진좌파적 맑스주의, 개량과 혁명의 상호관련성 및 사회주의로의 다양한 민족적 길을 강조하는 오토 바우어(Otto Bauer), 막스 아들러(Max Adler) 등의 오스트로 맑스주의 및 서구적 상황에 적합한 형태로 레닌 이론을 변형-발전시키면서 ‘시민사회에서의 헤게모니’ 및 ‘진지전’을 강조한 그람시 이론 등이 있다. 이중에서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한 이후 맑스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국제적 헤게모니 이념이 된 것은 레닌 이론이다.
레닌의 이론과 실천은 러시아적 현실과 대결하면서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의 한계를 돌파해 나가고, 러시아혁명을 세계혁명과의 관련 속에서 포착하는 과정에서 발전하였다. 이 과정에서 레닌은 생산력주의적 역사발전관을 폐기하고 생산력 발전에 대한 계급투쟁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하였으며, 대중의 자생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에 전위의 목적의식적이고 집중적인 지도를 결합시킬 것을 옹호하였다. 또한 근본적 모순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회적 모순들의 복잡한 다원적 구조 및 그 운동 양상에 대한 전면적 분석을 통해 ‘구체적-정세적 진리’를 발견할 것과 이를 통해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개입이 집중되어야 할, ‘사슬 전체를 움켜쥘 수 있는’ 핵심고리를 포착할 것을 주창하였다. 나아가 레닌은 자본주의의 제국주의로의 발전을 통한 자본주의적 모순의 전 세계적 확장과 그 모순구조의 복잡화 및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접합 등을 파악함으로써 제국주의시기에 있어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지닌 일반적 측면을 해명하는 동시에, 그 시기 혁명의 구체적 계기로서 ‘제국주의 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 및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운동과 혁명적 농민의 운동 및 식민지-반식민지에서의 민족해방운동과의 결합’을 제창하였다. 또한 러사아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는 혁명이후의 계급투쟁의 구체적 상황 분석에 입각하여 그의 사회주의관을 끊임없이 ‘교정’해 나갔다. 총괄하면 레닌 이론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관점 하에 혁명적 변혁을 추구하는 맑스주의의 기본 입지점에 근거하여 역사과정에 대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혁명적 개입을 위한 ‘구체적 진리’의 포착을 지향하는 이론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로써 그의 이론은, 비록 여러 한계들도 지니고 있었지만,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를 특징지은 경제주의적 정치관 및 진화주의적 역사발전관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단절했으며,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가 질식시킨 혁명적 맑스주의의 전통을 복원하고 그 이념을 변화된 상황에 적합하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레닌의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로부터의 단절은 초기의 수정주의 비판 및 제2인터내셔널 맑스주의의 러시아 대변자인 플레하노프 중심의 멘셰비키와 논쟁하는 과정에서 이미 준비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의 동요 및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투쟁으로부터의 이탈이 가속화되면서 전면화된다. 이와 더불어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들이 자국 전쟁을 지지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이 사실상 붕괴된 이후 레닌은 1914년 9월에 발표한 「전쟁과 러시아사회민주당」이라는 글에서 “모든 선진국에서 전쟁에 의해 사회주의 혁명의 슬로건이 일정에 오르게 되었다”고 선언하면서 ‘세계전쟁의 내전으로의 전화’ 및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W. I. Lenin, “Der Krieg und die russische Sozialdemokratie,” in: Werke, Dietz Verlag Berlin, 1977, p. 20 참조.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은 처음 몇 개월간의 애국주의적 열기가 식어버린 다음 대중의 반전감정이 다시 고조되기 시작한 것을 배경으로 하여 사회주의자들의 국제반전회의가 1915년 침머발트(Zimmerbald)에서, 이어 1916년 킨탈(Kientahl)에서 개최된 것을 계기로 다시 모색되기 시작한다. 이들 국제회의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전쟁 반대에는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지만, ‘제국주의전쟁을 세계혁명으로 대응하자’는 레닌의 제의는 소수의 지지만을 획득했다. 그러나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하고, 전후 초기에 유럽 전역에서 대중이 급속히 급진화되는 가운데 혁명적 노동운동세력이 광범하게 진출하게 되자, 전쟁과 혁명이 가져온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를 프롤레타리아혁명의 계기로 전화시키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조직 건설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세력의 주요 당면 과제로서 제기된다. 이에 1919년 1월, 8개국 맑스주의 정당 대표 및 미국 사회주의노동당의 비공식대표자 1명은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열고 러시아 공산당의 이름으로 각국의 혁명세력에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의 건설을 위한 세계대회를 개최하자는 호소문을 발송했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립을 논의하기 위한 국제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이 결의되었다. 이로써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국제조직으로서 레닌 지도 하의 러시아 공산당을 주축으로 하는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이른바 ‘제3인터내셔널’이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과는 달리 개량주의세력과 혁명적 맑스주의세력 사이에서 중간입장을 취한 세력들은 오스트로 맑스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1921년 비인(Wien)회의에서 ‘국제 사회주의정당 사업공동체’, 이른바 ‘제2.5인터내셔널’이라는 미니 인터내셔널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제2.5인터내셔널은 창립 이후 정치적 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 입지가 갈수록 축소되다가 1923년 5월의 함부르크(Hamburg) 대회를 통해 재건된 제2인터내셔널과 통합하여 ‘사회주의노동자인터내셔널’이라는 조직을 창설하였다.

제3인터내셔널의 활동은 ‘누가 운동을 지도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할 경우 ① 레닌 지도 하에서 활동한 초기(제3인터내셔널 창립대회가 열린 1919년 3월부터 제5차대회가 열린 1924년 6월 이전까지), ② 스탈린 지도체제에로의 이행기 내지 제 분파들 간의 갈등이 노출되는 속에서 스탈린 지도가 확립되어 간 중기(제5차대회가 열린 1924년 6월부터 제6차대회가 열린 1928년 7월 이전까지), ③ 스탈린의 전일적 지도체제가 확립된 후기(제6차대회가 열린 1928년 7월부터 제3인터내셔널이 해산된 1943년 6월까지)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그런데 창립 대회 직후 카우츠키 우파라고 할 수 있는 온건 사회주의자인 필립포 투라티(Filippo Turati)가 이끈 ‘이태리 사회당’의 가입신청이 제3인터내셔널에 의해 받아들여진 데에서도 드러나다시피, 제3인터내셔널의 창립 초기에는 혁명적 열기가 고조된 당시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우익 사민주의의 애국주의적-비혁명적 노선에 반대하는 다양한 조류의 사회주의세력―레닌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은 물론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스트 및 평의회주의자들까지 포함하여―들이 제3인터내셔널로 집결하게 된다. 이때 제3인터내셔널로 집결한 서구사회주의자들이 대체로 인터내셔널이 상이한 여러 분파들의 독립성이 보장되는 속에서 다양한 혁명세력들이 서로 협력하는 다원적인 국제적 연합체가 되기를 원한 반면, 러시아 공산당은 다가오는 혁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규율 있고 중앙집권적인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전위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 문제는 1920년 7월에 열린 제3인터내셔널 2차 대회의 주요 의제로서 다루어지는데, 이 대회에서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국제적 지도부로서의 코민테른의 위상에 걸맞은 활동을 확보하고 동요분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의 코민테른 가입을 막아 제3인터내셔널이 제2인터내셔널의 전철을 밟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노동자운동 내부의 모든 주요 부서로부터 개량주의자와 ‘중앙파’ 지지자를 축출하고, 개량주의와 ‘중앙파’의 정책 및 ‘암스테르담 노동조합인터내셔널’과 완전히 절연할 것, 코민테른의 모든 결의와 결정을 준수하고 당 명칭을 ‘공산당’으로 개칭할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공산주의인터내셔널 가입조건」, 「공산주의인터내셔널 가입조건」(한글로 표기한 것임), ꡔ코민테른 資料集ꡕ제1권(이하 ꡔ자료집ꡕ으로 표기함), 大月書店, 1978, 214-218쪽 참조.
이른바 ‘21개조 가입조건’을 제시하고, 이 조건을 대회 결정사항으로 통과시켰다. 코민테른이 제시한 이 가입조건은 개량주의 세력과 혁명세력이 대체로 한 정당 내부에서 활동해온 전통을 지닌 유럽의 사회주의운동에 커다란 충격을 던져 주었으며, 이 결정에 따라 인터내셔널 노선을 따르는 세력들은 공산당으로 집결하거나 공산당을 창당하게 된다. 그 한 예로서 1920년 12월 ‘프랑스 공산당’은 ‘노동자인터내셔널 프랑스지부’의 다수파가 분리되어 나와 창건했다. 그리고 1918년 12월에 창건된 ‘독일 공산당’의 경우 위의 코민테른 결정이 있은 이후인 1920년 12월 ‘독일독립사회민주당’(USPD)의 다수파가 합류해 옴으로써 당세를 크게 강화시킬 수 있었다. 1921년 1월에는 ‘이태리 사회당’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소수파가 ‘이태리 공산당’을 창당했다.
혁명세력이 개량주의세력으로부터 조직적-사상적으로 자립해 나옴으로써 맑스주의운동은 하나의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혁명이 저지된 상황에서 제3인터내셔널이 세계변혁을 주도적으로 성취해 내는 데에는 레닌 시대부터 이미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으며, 나아가 혁명정당의 ‘국내적’ 민주집중제 모델을 국가 소속을 달리하는 혁명세력들의 국제적 연합체의 조직원리로까지 끌어올린 것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점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한 한계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레닌 지도 하의 코민테른은 혁명세력의 국제적인 민주적 연합체로서의 성격을 일정 정도까지는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이 시기의 코민테른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념에 충실했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이념이 가장 대중적으로 확산되었던 점에 비추어 레닌 지도 하의 제3인터내셔널의 시기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운동의 정점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레닌 사후 코민테른을 스탈린이 지도하면서부터 제3인터내셔널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1924년 6-7월에 열린 코민테른 제5차 대회의 결의, 즉 코민테른을 ‘레닌주의사상으로 무장된 단일의 세계적인 볼셰비키정당’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당의 볼셰비키화’를 요구한 결의 「전술에 관한 테제」, ꡔ자료집ꡕ제3권, 1980, 43-62쪽 참조.
는 이후 유럽의 공산당들 속에서 그 이전까지의 지도층을 대신하여 규율에 익숙하고 스탈린 노선에 충실한 새로운 젊은 좌파들에게로 당권이 이전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으며, 이를 통해 각국 공산당에서 ‘당의 스탈린주의화’가 결정적으로 촉진되었다. 나아가 이 시기에 이르면 타국 혁명세력의 소련 지도노선에 대한 의존도가 심화되고 제국주의로부터 포위된 소련을 방어하는 것이 국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긴급한 과제로 인식되기 시작하며, 소련지도부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요구하고 ‘사회주의 모국론’을 제창한 스탈린의 노선이 코민테른 내부에서 전일적으로 관철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런 사태진전을 배경으로 하여 코민테른은 점차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국제적 지도부로서 기능하기보다는 소련의 대외정책을 타국 혁명세력들에게 관철시키는 소련 공산당의 국제부로 전락하게 된다.
다른 한편, 코민테른의 운동노선은 ① 혁명적 위기가 지속되는 속에서 전면적 공세를 위한 준비가 강조된 제1기(1919년 3월 창립대회부터 1921년 6월의 제3차 대회 이전까지), ② 퇴조기의 정세 속에서 일상적 투쟁의 강화를 위한 ‘노동자통일전선’이 강조된 제2기(1921년 6월의 제3차대회부터 1928년 7월의 제6차대회 이전까지), ③ 혁명적 정세가 재도래했다는 인식 하에서 ‘계급 대 계급 전술’이 채택된 제3기(1928년 7월의 제6차대회부터 1935년 7월의 제7차대회 이전까지), ④ 파시즘의 공세와 전쟁이 진행되는 정세 속에서 반파시즘-반전 ‘인민전선 전술’이 채택된 제4기(1935년 7월의 제7차 대회부터 1943년 6월 코민테른이 해산되기까지)로 나누어 고찰될 수 있다. 그런데 코민테른 내부에서는 제1차 대전에 의해 조성된 혁명적 정세로부터 영향을 받고 사민주의적 개량주의에 대한 반발이 확산되면서 계급투쟁의 객관적 조건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무시한 채 혁명을 조급하게 앞당기려는 ‘극좌주의’―예를 들면 정치문제와 조직문제에 있어서 유연성의 결여, 당면요구 및 선거활동의 무시, 보수적 노동조합에서의 활동을 거부하는 혁명적 이중조합주의 노선 등이 그런 흐름에 속한다―가 창립 초기부터 주류적 조류로 조성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코민테른에서의 레닌의 활동은 적어도 제2차 대회이후부터는 이러한 ‘좌익급진주의’ 조류에 대한 경고와 투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닌은 1920년 4월 「‘좌익급진주의’, 공산주의 내의 소아병」을 집필하였다. Lenin, “Der ‘linke Radikaismus’, die Krankheit im Kommunismus,” in Werke 31, pp. 1- 106 참조.
또한 레닌은 노동자계급의 전투적 투쟁이 헝가리, 프랑스, 영국, 이태리 등지에서 개량주의 세력이나 파시스트들의 도움을 받은 부르주아지의 공세에 밀려 일련의 패배를 경험하고, 카프반란을 성공적으로 봉쇄한 여세를 몰아 1920년 3월 독일 공산당이 주도하여 일으킨 이른바 ‘3월행동’(Marzaktion)이 유혈적으로 진압되자 혁명이 퇴조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다. 그 후 코민테른 제3차 대회 석상에서 코민테른의 전술을 ‘자본주의제도에 대한 직접적인 혁명적 강습전술’로부터 ‘자본주의의 요새를 포위하는 전술’로 전환시킬 것을 요구한다. 「전술에 관한 테제」, 앞의 책, 421-443쪽.
이로 인해 코르쉬, 판네괴크 등의 유럽의 ‘급진좌파’ 세력은 레닌의 논문 「‘좌익급진주의’, 공산주의 내의 소아병」이 코민테른 운동의 개량주의화에 제일보를 내딛게 했다고 비난한다. Paul Mattick, “Lenin’s Philosophy,” in A. Pannekoek, Lenin as Philosopher, London, 1975 참조.
그러나 레닌의 지침은 코민테른 내부에 좌익급진주의적 조류가 강력했던 관계로 잘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지노비예프의 지지를 얻어 독일 공산당이 일으킨 1923년 5월 독일 작센 지방에서의 노동자봉기 및 동년 12월 불가리아에서 공산당이 일으킨 12월 폭동은 혁명세력에게 엄청난 타격을 입힌 모험주의적인 거사였다. 그런데 이러한 실패들은 당지도부의 지도노선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코민테른이 ‘당의 볼셰비키화’를 강력하게 추진하게 되는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공식노선으로서 기본적으로 견지되고 있었던 ‘자본주의의 요새를 포위하는 전술’은 스탈린의 지도체제가 확립되어 간 시기인 1928년의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계급 대 계급전술’이 채택됨으로 말미암아 최종적으로 폐기된다. 코민테른 제6차 대회가 ‘계급 대 계급 전술’을 채택한 것은 그간의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기가 이제 대규모적인 경제공황의 국면으로 이행하고 있고, 이로 인해 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도 혁명적 위기가 성숙하고 있다는 정세판단 「국제정세와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임무에 관하여(테제)」, ꡔ자료집ꡕ제4권, 1981, 302-306쪽; 「공산주의인터내셔널 강령」, 같은 책, 337쪽 참조.
과 더불어, 파시즘의 위협을 자본주의 몰락의 징후로 보아야 하고 경제적 파국에 의해 파시즘은 자동 붕괴할 것이라는 (1922년 11-12월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서 지노비에프가 대변한 적이 있는) ‘자본주의 몰락의 불가피한 한 단계로서의 파시즘관’ 이에 대해서는 ꡔ자료집ꡕ제2권, 1979, 581쪽 참조.
, 파시즘과 더불어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를 구하려는 부르주아지의 두개의 반동적 대응형태 중의 하나라는 ‘사회파시즘으로서의 사민주의관’ 및 혁명적 위기국면에서는 사민주의, 특히 ‘좌익 사민주의’가 혁명의 진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주요 타격대상으로서의 (좌익)사민주의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국제 정세와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임무의 관하여(테제)」, ꡔ자료집ꡕ제4권, 308-310, 314-315쪽; 「공산주의인터내셔널 강령」, 같은 책, 333-335쪽 참조.
제6차 대회의 정세분석은 1929년의 대공황의 도래, 1939년의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민족해방운동의 더 한층의 고양 등에 의해 그 분석의 정확함을 일정하게 입증해 주었다. 그러나 코민테른 제6차 대회의 정세관은 자본주의가 대공황의 시기로 돌입하는 중차대한 시점에서 그러한 대공황의 시기에는 위기에 대응하는 부르주아지의 반동 역시 비상하게 증대하게 되고, 또 이로 인해 혁명 세력이 엄청난 패배를 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무시한 채 그러한 반동이란 단지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라고 바라보는 ‘경제주의적 정치관’ 및 제2인터내셔널의 파국론을 연상시키는 낙관적인 혁명주의 정세관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었다. 당시 혁명좌파의 정세관을 대변하고 1928년의 ‘대전환’ 이후 스탈린이 지지한 이러한 정세관은 이후 혁명세력이 그러한 반동, 특히 당시 정치적 힘을 신속하게 증대시키고 있었던 파시즘에 대항하는 전인민적 투쟁의 조직화 문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혁명의 진전을 더디게 한다고 파악한 사민주의 세력, 특히 (전인민적 투쟁의 조직화가 문제된다면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맹세력이 되어야 할) 좌파 사민주의세력의 타도에 힘을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파시즘의 발흥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길을 봉쇄했다. 이는 이후 특히 1933년의 히틀러의 집권은 유럽의 노동운동이 역사상 가장 심대한 패배를 경험하도록 만든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극좌적 전술’은 부르주아지의 반동이 힘을 엄청나게 증대시키는 정세 속에서도 혁명적 위기의 출현을 바라는, ‘절망’에 가까운 기대 속에서 힘을 소진하고 있었던 유럽의 공산당들에게 독일 등지에서 파시즘에 의한 권력 장악 및 이로 인한 세계대전의 위협이 가중되는 정세 속에서 더 이상 견지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기에 이른다. 이를 배경으로 코민테른의 마지막 대회이자 최대의 대회이기도 한, 1935년 7-8월에 열린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는 ‘계급 대 계급 전술’을 최종적으로 폐기하고, 그 전술을 대신하여 노동자통일전선의 구축에 기초한 전면적인 ‘반파시즘-반전 인민전선 전술’을 공산주의자들의 기본전술로서 제시하게 된다. 이 대회에서 새로이 채택한 인민전선 전술의 내용에 대해서는 D. Dimitrov, “Die offensive des Faschismus und die Aufgabe der kommunistischen Internationale im Kampf fuer die Einheit der Arbeiterklasse gegen den Faschismus,” in Gegen Faschismus und Krieg: Ausgewaehlte Reden und Schriften, Reclam, 1982.
이러한 전술 변경에는 1934년 증대하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처하여 노동자계급이 반파시즘 운동을 전투적으로 전개하고 이에 힘입어 결성된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파시즘 세력의 진출을 효과적으로 저지한 프랑스에서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고, 디미트로프(D. Dimitrov)와 톨리아티(P. Togliatti)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러나 인민전선 전술로의 전술변경의 구체적 신호는 1934년 6월의 소련 공산당의 방침 속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F. Claudin, The Communist Movement: From Comintern to Cominform, Penguin, 1975, pp. 171-177; P. Spriano, Stalin and the European Communists, Verso, 1985, p. 16 참조.

인민전선전술은 파시즘을 ‘주적’으로 규정하는 가운데 모든 반파시즘세력들 간의 연합을 추구하고, 나아가 반파시즘 민주주의투쟁을 통해 사회주의로의 길을 모색한다는 특징을 지닌 것이었다. 그리고 ‘반파시즘 인민전선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파시즘 세력에 의해 점령당한 지역에서는 ‘반파시즘 민족해방운동’의 형태로 발전한다. 여기서 전쟁 전의 ‘반파시즘 인민전선 운동’에서는 독점부르주아세력이 연합 (내지 동맹)의 대상에서 기본적으로 배제되었다면, ‘반파시즘 민족해방 운동’은 ‘애국적인’ 독점부르주아세력까지 연합의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연합의 범위를 더욱 확대하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반파시즘 민주주의투쟁 및 민족해방운동에서 공산당세력은 어디에서나 그 운동의 주도적 세력 내지 주요 분파의 하나로서 활동했다. 이를 통해 공산주의 세력은 전후에 프랑스, 이태리, 그리스 등지에서 대중적 기반을 지닌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게 되며, 또한 그러한 활동에 힘입어 동유럽에서는 소련군의 진주라는 객관적으로 유리한 조건 속에서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인민전선 운동’과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두 가지 점을 더 지적할 필요가 있다.
1) ‘인민전선 전술’을 채택함으로써 공산주의세력은 그 이전의 주관적 혁명주의로부터 벗어나 구체적 상황에 적합한 정치노선을 채택하는 정치적 능력을 입증했다. 그러나 그 전술을 채택한 시기의 코민테른은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국제적 지도부라기보다는 ‘소비에트 권력의 방어’와 ‘모스크바에의 충성’을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최고의 임무로서 규정한 스탈린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기관으로 전락해 있었다. 때문에 그런 능력 역시 오직 소련 대외정책에의 종속이라는 한계 내에서만 발휘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소련이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1939년 8월 독일과 ‘독소 10개년 불가침조약’을 체결했을 때 인민전선 전술은 사실상 폐기되기에 이르며, 이 조약의 체결로 인하여 특히 프랑스 공산당이 국내에서 엄청난 궁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인민전선 전술은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과 더불어 다시 소생할 수 있었다.
2) 인민전선 전술에서 반파시즘 민주주의 투쟁의 최소목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회복’이고 그 최대목표는 ‘사회주의로 전화하는 인민민주주의의 실현’인데, 이 문제가 그 당시의 논의에서는 대체로 불명료하고, 임기 변통적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런데 코민테른은 국제 반파시즘 연합으로 추진된 서방진영과 소련의 협력이 절정기에 달한 1943년 6월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이 해산은 대의기구에서의 토론을 거치지 않고, 단지 코민테른 상임집행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이를 통해 그 기구가 당시 소련의 대외정책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음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코민테른의 해산은 동시에 소련이 자본주의국가들과의 협력과 자국의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노선을 방기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제3인터내셔널의 활동에 대해서는 V. V. Zagladin, The World Communist Movement, Moscow, 1973; The USSR Academy of Sciences, The International Working-Class Movement, vol. 5, Moscow, 1981; W. Z. 포스터, ꡔ세계 사회주의운동사ꡕ제2권, 동녘, 1988; 김세균, 「제3인터내셔널 운동과 마르크스주의」, ꡔ이론ꡕ제3호, 1992년 가을. 참조.

(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코민테른이 해산됨으로 말미암아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세계 혁명세력의 구심적인 국제조직은 부재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소련은 국제적으로 제3세계의 사회주의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는 등 크게 보아 진보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그 진보적 역할이란 소련을 사회주의적 강대국으로 발전시킨다는 민족주의적 목표에 종속된 것이었다.
코민테른이 해산된 이후에도 각국의 공산당들은 스탈린 사망 이후 ‘평화 공존’과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제창한 소련 노선을 추종하고 소련 지도를 수용했었다. 그러나 1956년 2월에 개최된 소련 공산당대회를 계기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중소분쟁’으로 인해 세계 사회주의진영은 결정적으로 분열되었으며―중소분쟁 이후 중국은 ‘제3세계주의적 입장’에서 반제적 비동맹운동 등을 주도했지만, 1971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미국과 극적으로 화해함으로써 반제노선을 최종적으로 포기했다―1970년대에 이르러 유럽의 주요 공산당들이 소련으로부터의 자주성 확보 등을 내세우는 ‘유로코뮤니즘’노선을 채택함에 따라 공산주의세력 내부의 분열은 더욱 확대되기에 이른다.
한편, 스탈린 체제를 비판한 트로츠키는 소련 체제를 ‘관료제적으로 왜곡된 노동자국가’로 파악하는 가운데 1938년 제3인터내셔널에 맞서 제4인터내셔널을 조직했다. 그리고 전후 소련체제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토니 클리프(Tony Cliff) 등이 중심이 되어 트로츠키주의의 새로운 분파가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오늘날 ‘국제사회주의자흐름’(International Socialists Tendency)으로 결집하고 있다. 소련이 몰락되기 전까지는 이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운동의 영향력은 극히 미약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나름으로 그 영향력이 증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사회주의세력의 양대 분파 중의 하나인 ‘사민주의분파’가 미국을 추종한 반면, ‘공산주의분파’는 대부분 소련 노선을 추종했다. 그 바람에 이 양대 분파들 간의 관계는 (전후 초기를 제외하면) 악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데탕트 체제’의 수립과 서유럽 공산당의 방향 전환 등에 힘입어 1970년대 이후 그들의 관계가 점차 호전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유로공산주의세력의 실질적인 사민주의화란 대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민주의세력은 19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ocialist International)을 창설했는데, 현재 이 조직에 가입한 정당과 단체들의 수는 총 141개에 이른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홈페이지 http://www.socialistinternational.org/를 볼 것.
이 조직은 국제적으로는 대체로 ‘미국의 제2중대’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이른바 ‘제3의 길’이라는 변형된 형태의 신자유주의노선을 내세우고 있는 데에서 드러나다시피) 여전히 세계변혁노선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노선에 대해 적대적이다.
다른 한편, 전후에 오면 공산권의 노조들이 중심이 되어 ‘세계노조연맹’((WFTU)이 설립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세계노조연맹에 가맹하지 않았던 미국의 AFL 등이 중심이 되어 ‘세계노조연맹’과는 별도로 ‘국제자유노조연맹’(International Confederation of Free Trade Union: ICFTU) http://www.icftu.org/를 볼 것
을 설립하였다. 냉전체제 하에서 WFTU에 대항하여 설립된 이 연맹은 애초에는 반공주의, 노사협조주의 입장을 강력하게 대변했다. 그러다가 1968년 혁명의 영향으로 유럽의 가맹 조합들이 이 노선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자 이에 반발한 미국의 AFL-CIO가 1968년 탈퇴했다가 1982년에 복귀했다. ICFTU는 조직적으로는 느슨한 연대체 이상의 조직이 아니며, 변혁적 노동운동의 국제적 연대체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총괄하면, 제2차 대전 이후 노동운동과 좌파정치운동은 민족국가체제에 재포섭되어 갔으며, 또 그 결과로서 선진국에서는 코포라티즘적 계급협조주의가, 후진국에서는 근대화 이데올로기가 노동자대중에게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로 인해 이 시기에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에 걸맞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적 실천은 행해지지 못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레닌 지도 하의 인터내셔널 활동 속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던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적 실천이 그 이후에는 계속 왜곡되고 퇴조하는 과정을 밟다가 19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세계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면서 최종적으로 파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전후에는 의미 있는 국제주의적 실천은 오히려 새로운 사회운동인 평화운동,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에 의해 일정하게 담보될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에 절정에 달한 베트남전 반대투쟁은 전후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국제연대투쟁이었다.

2)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시 동터 오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운동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노동운동과 좌파정치는 전반적으로 부르주아민족국가체제에 재포섭되어 갔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운동의 가장 중요한 추동력이었던 소련의 정치 역시 민족주의화의 경향을 밟다가 최종적으로는 와해되었다. 게다가 1980년대 초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에 노동자계급은 계속 수동적으로 밀리기만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저항이 본격적으로 출현하면서 정세는 크게 변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그들의 불만과 요구를 제도화된 신자유주의적 지배구조 내지 신자유주의적 지배연합 속에 참여하고 있는 정당과 노조 등을 통해 국가로 대변할 수 있는 길이 봉쇄됨으로 말미암아 대체로 그러한 제도화된 틀을 깨고 나서는 ‘직접적인 대중투쟁’의 형태로 전개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로 인해 이 투쟁은 대체로 사민주의정당과 노조상층부의 통제를 넘어서는 투쟁으로 발전하고 있고, 노조상층부가 이들의 조직으로부터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마지못해서라도 투쟁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을 만들고 있다. 노동자들의 이러한 ‘직접적인 대중투쟁’은 체제내적 운동의 한계를 일정하게 벗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계급적 지배질서 자체에 대한 저항 및 대항권력의 창출을 위한 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이 실제적으로 대항권력의 창출을 위한 운동으로 얼마만큼 성장할 수 있는가는 그 투쟁이 앞으로 얼마만큼 사민주의적, 계급타협주의적 노조의 통제를 벗어난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투쟁의 성격이 어떠하든, 이러한 투쟁은 이전에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되어온 계급투쟁 내지 계급정치를 재활성화시키는 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의 재활성화와 더불어 좌파 정당-정치조직들의 혁신과 이들의 연대를 위한 새로운 모색 등도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미국노동당’(LPUSA)의 출범(1987년), 이탈리아에서 ‘재건 공산당’의 출범, 덴마크에서 ‘적록동맹’의 결성(1989년), 스페인에서 ‘통합좌파’의 출현, 포르투갈에서 ‘좌파블록’의 결성(1989년), 캐나다에서 ‘반자본주의적 좌파를 위한 체계적 운동’(Structured Movement for Anti-capitalist Left)의 조직화(2000년), 프랑스에서 주요 트로츠키조직인 LO와 LCR의 유럽의회진출을 위한 선거연합(1999년), 스코틀랜드 사회주의당(SSP)의 출현과 성장, 선거연합인 ‘사회주의동맹’(Socialist)으로의 영국좌파들의 결집 등은 대표적인 좌파정당운동의 혁신 노력들에 속하는 것들이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을 배경으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등에 반대하는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투쟁 역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1990년대 중반이후의 시기를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적 실천의 새로운 모색기이자 그러한 실천의 새로운 여명기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새롭게 활성화되기 시작한 국제연대투쟁으로서는 현장활동가들의 (밑으로부터의) 새로운 수평적인 국제연대 모색 및 이러한 연대에 힘입은, 다국적 기업의 신자유주의적 경영합리화 등에 대항하는 노동자들 간의 국제적 연대투쟁 및 국경을 넘어서는 실업자투쟁 등이 중요하다. 그리고 호주의 ‘민주사회주의당’(DSP)이 주도하는 ‘Links’ 프로젝트, 제4인터내셔널 주도의 ‘국제적 좌파연대회의’ 및 그리스 공산당 주도 하에 1997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 ‘세계 공산당-사회당대회’ 등은 맑스주의 좌파정치세력의 새로운 국제연대운동으로서 중요성을 지닌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이후의 국제연대투쟁은 이제 막 다시 동터 오르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운동과는 일정하게 구분되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연대투쟁들이 강력하게 대두하고 있는 것에 의해 특징지어지는데, 이러한 투쟁들의 흐름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오늘날 세계적 수준에서 전개되고 있는 국제연대투쟁은 그 속에서 노동자대중 및 노동자정치세력 역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긴 하지만, 신자유주의와 전쟁 및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매우 다양한 조류와 성격의 운동세력들이 ‘합류’해 운동을 토의하고 새로운 투쟁을 만들어나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나아가 정치조직보다 사회운동조직들이 운동을 주도하고 있고, 연대투쟁은 주로 긴급한 당면 과제 해결을 위한 투쟁으로 전개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 비춰 본다면, 우리는 과거 노동자계급의 국제조직으로 등장한 ‘인터내셔널’의 활동이 중심을 이룬 ‘구(舊)국제주의’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국제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국제주의’와 관련된 논의로서는 피터 워터만, 「1848년의 국제주의로부터 1998년을 위한 국제주의로- 맑스주의」, 1848년의 ꡔ선언ꡕ; 그리고 1845-6년의 ꡔ독일 이데올로기ꡕ; 카피레프트, ꡔ읽을꺼리ꡕ제3호, (http://copyle.jinbo.net/reader/reader1.htm); Editors, “Toward a New Internationalism,” Monthly Review, vol. 52, no.3 등 참조.

2) 2001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는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계 각지의 모든 세력들을 결집시키는 국제회의로서 이전의 인터내셔널을 대신하는 새로운 국제연대회의체로 발전하고 있다. ‘세계사회포럼’ 홈페이지는 http://www.forumsocialmundial.org.br/home.as p이다. 그외 딕 니콜스,「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ꡔ진보평론ꡕ제9호; 임필수,「세계화와 세계 사회운동」, ꡔ사회진보연대ꡕ제37호(2003년 7/8월호); 전소희, 「세계사회포럼의 성장통(成長痛)」 등을 참조할 것.

3) 1999년의 시애틀 투쟁을 필두로 하여 이후 워싱턴, 멜버른, 프라하, 니스 투쟁 등으로 이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투쟁은 WTO회의를 무산시킬 정도로 갈수록 강력한 국제연대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원영수, 「시애틀에서 워싱턴, 프라하, 멜버른, 서울까지- 반지구화 투쟁의 국제적 확산과 한국 노동자계급운동의 과제」, ꡔ현장에서 미래를ꡕ제60호, 2000년 11월호.

4) 미국의 부시정권이 전쟁 노선을 추구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보다 노골적인 ‘무장한 세계화’로 발전하고 있는 정세 속에서 ‘반전반제투쟁’ 역시 광범위한 수의 세계민중들을 동원하는 위력 있는 국제연대투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4.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의 전망(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