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4.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의 전망

4. 프롤레타리아국제주의의 전망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관철되고 그간에 누적된 모순들이 폭발하기 시작한 오늘날의 정세 속에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운동이 다시 동터 오르고 있지만 그것과 구분되는 새로운 국제연대투쟁들이 강력하게 대두하고 있는 오늘날의 조건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미래를 우리는 어떻게 전망할 수 있는가?

그 미래와 관련하여 우리는 일차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한편으로는 노동자대중을 분절화-파편화시키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삶의 세계적 연관성을 비상하게 높여 나감으로써 노동자들의 국제주의적 실천과 변혁운동들 간의 세계적 연관의 확보 필요성 역시 크게 증대시키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늦든 빠르든 노동자계급의 광범위한 저항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노동에 대한 자본의 새로운 ‘반동적’ 공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공세를 통해서도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축적위기가 해소되기는커녕 갈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고, 또 이로 인해 전후 세계자본주의체제가 오늘날에는 최종적 위기국면으로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축적위기는 자본주의체제의 더 한층의 반동화를 불러오고,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크게 약화시키는 측면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성장의 과실을 나누어 먹으려는 체제 내적인 분배투쟁을 대신하여) 전투적이고 변혁적인 노동운동의 폭발적인 등장을 가능케 하는 물질적 조건을 만들어 낸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선진 자본주의국에서 한때 죽은 것으로 간주된 ‘계급투쟁’이 부활하고 있는 현상은 그러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투적-변혁적 노동운동의 성장-발전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이름에 걸맞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적 실천 역시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비록 불균등적이고 아직 초기적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각국에서 전투적-변혁적 노동운동이 다시 소생하고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미래를 밝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현 시기에 전개되는 국제연대투쟁이 이전의 국제주의 운동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양상을 띠고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주의적 실천은 과거의 국제주의적 실천과 비교해 본다면 분명 장단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장점은 매우 광범위한 연대전선 틀이 국제적으로 조직됨으로써 신자유주의 반대투쟁과 반전반제투쟁의 저변이 확대되고 계급적 실천과 비계급적 실천들의 융합이 크게 진척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반면 그 단점은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조류들의 침투로 인해 연대투쟁이 항상 ‘최소주의적’ 실천 이상의 것이 되기 어렵고, 사민주의적-시민주의적 조류들이 운동의 향방을 좌지우지하는 경향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러한 새로운 국제주의적 실천이 지닌 장단점을 논하기에 앞서 그러한 형태의 운동이 현재의 조건 속에서 실제로는 불가피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국제연대투쟁의 형태라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다.

그 이유로서는 다음의 점들이 지적될 수 있다.
1) 기존의 변혁적-맑스주의적 실천이 거대한 역사적 패배를 경험함으로써 맑스주의와 대중운동과의 분리가 그간 크게 진척되었다. 또한 이러한 사정은 변혁적 정치조직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게다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운동이 이제 막 재출발을 시작함으로 인해 변혁적 노동운동세력이 국제연대투쟁을 주도할 만한 능력을 아직 갖추지 못하고 있다.
2)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진척은 한편으로는 다양한 요구의 다양한 운동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어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의 피해 등에 항의하는 이들 운동들 간의 국제연대의 필요성을 절박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3) 세계자본주의의 축적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자본주의체제의 반동화와 야만화가 한층 더 진척되고 있고 그러한 반동화와 야만화에 맞서는 세계적 수준의 광범위한 연대전선의 구축이 갈수록 요청되는 정세 속에 우리는 놓여 있다. 이와 관련해 현 시기에 전개되는 국제연대투쟁의 틀은 그러한 광범위한 연대전선의 구축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에 비추어 변혁적 노동운동세력에게 오늘날 국제연대투쟁의 현재적 흐름을 다른 흐름으로 대체하려 하기보다는 그 흐름을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적 실천의 현실적 조건으로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그 흐름이 보다 광범위한 대중적 연대운동으로 발전하도록 적극 노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흐름의 성격을 부단히 급진화시키고 그 흐름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을 각인시켜 나가는 전략을 강구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와 관련하여 국제연대투쟁에 개입하는 변혁적 노동운동세력의 기본전략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결합시키려고 했던 코민테른의 ‘(반파시즘 반전) 인민전선운동’과 같은 형태의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변혁적 노동운동세력에게는 객관적으로는 거대한 변혁이 요구되는 정세가 조성되고 있지만, 그 정세를 세계변혁의 계기로 만들어 낼 변혁적 노동운동 세력의 주체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객관적 정세의 조성과 주체적 능력 간의 괴리’ 내지 ‘객관적 정세의 조성에 미치지 못하는 주체적 능력의 지체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비상한 대처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일국적 수준에서는 물론 국제적 수준에서 좌파세력 전체가 차이를 넘어 연대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직적-사상적 자립성을 지닌 독자적 세력으로서 현 시기에 전개되는 제반 국제연대투쟁에 적극 개입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이와 더불어 현 시기에 요구되는 국제연대투쟁의 과제는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1) 미국이 군사주의적 노선을 강구하고 전쟁을 도발하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자본주의체제 반동화의 가장 야만적이고 극단적인 형태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보수적 지배층이 강구하고 있는 군사주의적 세계지배전략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전지구적인 수준의 투쟁을 조직하는 일이 국제연대투쟁의 가장 절박한 당면 과제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러한 투쟁을 조직하는 일은 한반도가 전쟁의 위협 아래 직접 놓여 있다는 점에서도 한국 노동자-민중에게 사활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이기도 하다.
2) 오늘날 제국주의는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성격을 지니며, 미국이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제국주의지배체제의 구심적 권력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현 시기에 전개되고 있는 ‘반세계화투쟁’과 같은 지구적 수준의 신자유주의반대투쟁 및 반미반제운동을 적극 조직해 나가야 한다.
3) 각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생존권투쟁 및 신자유주의반대투쟁과 반미반제투쟁을 국경을 넘어서 서로 지원하는 것 역시 국제연대투쟁의 중요한 과제에 속한다.
4) 자본운동의 지구화 등이 크게 진척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체제를 유지시키는 권력은 초국적 성격의 이런저런 국제레짐들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권력이 중심을 이루는 제 민족국가들의 국가권력들이다. 그러므로 ‘지구적 제국’의 출현을 주창하면서 국가변혁을 우회하는 투쟁을 통해 대안적 제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네그리의 견해와는 달리 Michael Hardt, Antonio Negri, Empire, Harvard University, Cambridge/London: 2000, pp. 160쪽 이하 등. 네그리의 견해와는 달리 우리가 ‘지구적 제국’의 성립에 대해 말하려면 초국적인 국제적 정치권력이 개별 국가권력에 대해 최상위 권력으로 확고하게 조직되어야 하고, 지구적 수준에서의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만이 아니라 지구적 수준에서의 노동력의 자유로운 이동이 확고하게 보장되는 것이 요구된다. (자본주의국가체제는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만이 아니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국가체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려면 국가는 강권의 합법적인 독점체로서 사회의 곁/위에 선 특수한 공적 권력체의 형태를 지니고 출현해야 한다. 때문에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만이 아니라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이 지구적 수준에서 보장되려면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가로막는 민족국가적 구분이 폐기되고, 전지구적 수준의 국가체제의 수립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이런 점에서 그런 국가체제가 수립되지 않는 한 지구적 제국의 출현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본운동은 지구적 제국 건설의 경향을 만들어내지만 이를 통해 민족국가적 분할을 결코 해체할 수 없으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지구적 제국의 전면적인 출현이란 자본주의체제 하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와는 달리 ‘지구적 제국’의 출현은 자본주의적 분할을 넘어서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전면적인 관철을 통해 지구적 수준의 코뮨적 공동체가 출현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때문에 자본지배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과제는 ‘자본주의적 지구제국’을 ‘대안적 지구제국’으로 전환시키는 것과 같은 단순한 반정립의 과제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경향성을 만들어내면서도 자본주의가 결코 실현시킬 수 없는 ‘지구적 공동체’의 건설이라는, 반정립의 추구를 넘어서는 과제를 달성하는 것이다.
, 국가변혁은 세계변혁의 가장 중심적인 과제에 속한다. 국가변혁을 매개함이 없이 세계변혁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국제연대투쟁의 가장 중심적인 과제 역시 최종적으로는 각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국가변혁운동을 서로 지원하고 국가변혁이 일국적 수준에서가 아니라 전세계적 수준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해 나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개별국가들 속에서 국가변혁을 위한 투쟁이 고양되어야 하는 동시에 변혁적 정치역량들 간의 국제연대가 요구되며, 이에 기초해 전개되는 제 국제주의적 실천에 계급성-변혁성을 각인시켜 나가는 노력이 요구된다.
5) 세계화-지구화과정은 어느 한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의 국제적 파급력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과정을 동반한다. 이 점에서 일국 수준에서 다른 나라의 운동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투쟁의 전형을 창출하는 것은 과거 어느 때 보다 더 큰 세계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6) 개별국가의 수준에서는 그 국가체제가 지닌 특수성을 고려하는 국제주의적 실천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평화적-민중적 통일을 위한 남북노동자들 간의 연대와 더불어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일체의 차별을 폐기하기 위한 투쟁을 조직하는 일, 미국의 전쟁책동과 일본의 군국주의화 등을 방지하기 위한 동북아시아 노동자들 간의 국제연대를 구축하는 일, 해외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착취에 반대하는 투쟁을 적극 조직하는 일 등은 한국노동자계급에게 요구되는 특수한 국제주의적 실천의 과제들이다.
5.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운동의 그간의 역사를 개관하고, 예견 가능한 운동의 미래 및 그 운동의 과제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우리는 초기 사회주의적-공산주의적 노동운동에서 출현해 굴곡을 거치면서 발전해온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운동이 레닌 주도의 제3인터내셔널의 활동에서 그 정점에 도달했다가 이후 왜곡-퇴조과정을 거쳐 1980년대 말과 90년대 초에 최종적으로 붕괴했다는 점, 그러나 그 운동이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변화된 지형 속에서 새로운 모습을 띠고 다시 동터 오르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이제 막 다시 동터 오르기 시작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운동의 발전을 촉진시켜 ‘객관적 정세의 조성과 주체적 능력간의 괴리’ 내지 ‘객관적 정세의 조성에 미치지 못하는 주체적 능력의 지체 현상’을 적극적으로 타개해 나가는 것이 요청된다는 점 등을 강조했다. 실제로 오늘날 인류는 지구적 수준의 거대한 변혁의 전야에 놓여 있다. 거대한 변혁의 시대는 그러나 반동과 야만적 폭력이 극에 달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반동과 야만적 폭력을 이겨내고 인류사회 전체의 진보적 발전을 이루어나가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입각한 사회정치적 실천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다시 살려내는 것은 변혁세력 모두가 복무해야 할 가장 숭고한 과제이다. 또한 그 원칙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적 힘으로 전화하는 만큼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앞으로 전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며, 그 원칙이 훼손되고 왜곡되는 만큼 그 운동은 해방의 잠재력을 상실한 종속적 운동으로 전락할 것이고, 또한 그런 만큼 부르주아 지배는 위기 속에서도 존속하고 장기화될 것이다. 노동해방과 인류해방을 위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원칙을 다시 살려내는 일에 우리 모두 함께 나서자.

김세균 • 서울대교수/ 정치학

2004-03-15 16:3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