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촛불 켜놓고 수술…내일은 더 나빠질 것”

“촛불 켜놓고 수술…내일은 더 나빠질 것”
[한겨레 2006-09-30 16:42]  이라크 의사가 전하는 바그다드 상황

“전기가 끊겨 촛불을 켜놓고 환자들을 수술할 때면 절망스럽다. 수많은 환자들이 몰려오지만 약품도, 기구도 제대로 없다. 내일은 더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게 이라크의 현실이다.”

27일 <한겨레>와 만난 이라크 의사 하이셈 카심 알리(37)는 “의사로서 매일 너무나 많은 비극들을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바그다드 중부에 있는 알시파병원의 의사이자 적신월사(이슬람권의 적십자사)의 자원활동가로도 일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전 전쟁을 막기 위한 ‘인간방패’로 이라크에 갔던 한국인 평화운동가들과의 인연으로 지난 8일 한국에 왔다.

가난한 사람들과 아이들이 가장 큰 희생자라고 하이셈은 강조했다. “미국 점령 뒤 생필품 값은 전쟁 전의 10배 이상으로 올랐다. 우유도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친지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정신적 장애를 겪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의사로서 나는 미군이 화학무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추측한다. 이전에 없던 심각한 피부병 환자들과 암 환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그는 “이라크 내전은 이미 진행중”이라면서도 “내전의 씨를 뿌린 것은 미국”이라고 단언했다. “미국은 점령 초기부터 이라크인들을 종파별로 분열시키고 증오하게 만들었다. 한 미군 장교로부터 이라크인들을 고용해 상대편 종파 사람들을 죽이도록 공작을 벌였다는 말을 분명히 들었다. 이라크가 분열되면 점령과 군사 주둔에 유리하기 때문에 미국이 의도적으로 분할통치를 하고 있다.”

하이셈의 가족은 시아파지만 형수는 수니파다. 오랫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이 지내던 두 종파가 점령 이후 점점 증오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으며, 이라크 친미정부의 정치가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정치적 이권과 자리를 지키는 데만 관심이 있다고 그는 절망했다.

그는 미군과 서방언론들이 이라크 내전 상황만을 부각시키지만, 실제로는 이라크인들의 미군 점령에 대한 저항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저항세력들은 이라크인이 아닌 미군과 미군기지를 공격한다. 내전과 알카에다 공격만 강조하는 것도 이라크인들의 계속되는 저항과 비참한 삶을 은폐하려는 미군의 정책이다.”

그는 미군의 존재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미군이 지나갈 때는 도로가 2~3시간 동안 통제된다. 그동안 이라크인이 도로에 들어가면 그들은 마구 총을 쏜다. 탱크가 민간인 차를 치는 일도 일어난다. 미국은 이라크 곳곳에 거대한 기지를 건설했으며, 남부 사마와 기지는 중동 최대의 미군기지일 것이다.”

한국 자이툰 부대의 이라크 주둔에 대해 하이셈은 “한국군이 군사활동이 아닌 건설·의료 지원을 하는 것은 그나마 잘하는 일이지만, 이라크인들에겐 미군이나 한국군이나 똑같이 그들의 삶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외국군”이라며 “한국정부가 이라크를 돕는 데 관심이 있다면 민간인들을 보내서 도울 일이 많다”고 했다.

“솔직히 지금 이라크에서는 희망을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미군 철수 없는 해결책은 없다. 미군이 철수하면 당분간은 혼란이 벌어지겠지만 결국 이라크인들이 스스로 해법을 찾게 될 것이다.” 그는 미군의 철수 없이는 이라크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