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5 올해의 세계인물 “신디 시헨”

[2005올해의 세계인물]5. 신디 시핸

[경향신문 2005-12-28 18:54]  

“벤자민 프랭클린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시적 안위를 위해 기본 자유를 희생하는 사람들은 자유와 안전, 어느 것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미국은 지금 자유와 안전, 그 어느 것도 없는 나라로 급속히 변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두가지 모두를 요구해야 하며, 어느 것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이 두가지는 우리의 천부인권입니다. 제발 당신의 그 권리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나도 나의 그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2005년 8월3일. 4자매를 둔 평범한 미국인 주부 신디 시핸(48)은 이 글을 남기고 집을 떠났다. 그리고 사흘 뒤. 그는 텍사스주의 한 벌판에 섰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휴가 때마다 머무는 크로포드 목장 앞이었다.

30도가 훨씬 넘는 폭염 아래서 시핸은 뙤약볕을 가릴 아무 것도 없이 개울가에 앉아 십자가를 꺼냈다. 1년4개월 전 이라크에서 숨진 장남 케이시를 기리는 십자가였다. 미국의 반전운동 역사를 바꾸어 놓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캠프 케이시 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한 블로거는 ‘진실말하기’라는 웹사이트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이곳의 더위는 견딜 수 없을 정도다. 벌레들은 아무데나 기어다니고, 개미들은 컴퓨터 자판기 속으로 마구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캠프 케이시 기사를 내가 취재했던 어떤 기사와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공화·민주당의 전당대회와 예비선거도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사들이지만 이 8월에 크로퍼드 목장에서 일어난 일들은 역사적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사회과학도들은 신디 시핸과 캠프 케이시가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정책에 끼친 충격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주 바카빌 출신인 시핸은 동네성당에서 청소년 사목을 맡은 것이 사회생활의 전부였을 정도로 전형적인 주부였다. 할머니와 가정부가 있었지만, 4명의 자녀를 한번도 부모없이 집에 남겨두지 않는 헌신적인 주부였다. 그러나 2004년 4월4일의 일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시핸은 지난달 부시 대통령의 어머니인 바바라 부시 여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그날 제복을 입은 3명의 장교가 집으로 찾아와 케이시의 사망소식을 전했다. 나는 마루에 쓰러져 울부짖었다. 잔혹한 저승사자에게 아들 대신 나를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 나의 아들을 데려간 그 저승사자는 당신의 아들이다.”

케이시가 군에 입대한 것은 클린턴 대통령 말기인 2000년 5월이었다. 그는 복무기간 만료를 눈앞에 둔 2003년 3월 이라크전쟁이 발발하자 복무기간을 연장했다. 케이시의 부대는 지난해 3월19일 이라크로 파견됐고, 그는 수주 후 적에게 포위당한 동료들을 구출하러 나섰다가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케이시는 초등교사가 꿈이었어요. 군에 입대한 이유도 그걸 위해서였고요. 모병관은 케이시가 입대시험 성적이 뛰어나 전쟁이 나더라도 후방에만 근무한다고 했죠. 거짓말이었습니다. 케이시는 군에서 군목활동을 하기로 했으나 정작 차량 정비공으로 배치됐죠. 역시 모병관의 거짓말이었고요. 케이시는 미국이 왜 이라크를 침공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케이시에게 재입대를 하지 말고 ‘차라리 캐나다로 가라’고 애원했지만 그는 친구들만 가게 할 순 없다며 따라갔습니다.”

아들을 잃은 충격과 고통으로 그는 “수면제 한병만 마시면 이 괴로운 세상에서 다시는 눈을 뜨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 시핸을 반전운동가로 변신시킨 것은 다름아닌 부시 대통령이었다. 케이시가 죽은 지 두달 뒤인 2005년 6월 시핸은 남편, 세 자녀, 그리고 다른 전몰용사의 부모들과 함께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우리 가족들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케이시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의 죽음에 대해 물어보려 했으나 대통령은 그때마다 화제를 바꾸면서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유로울 자격이 있다’는 말만 했습니다. 전몰용사들을 추모하는 자리임에도 그는 케이시의 이름도 몰랐고 그의 사진조차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때의 ‘기괴한 만남’ 이후 전쟁을 반대하기 위해 뭔가를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반전단체에 가입하고, 진보단체를 위한 광고를 찍고, 의회에 로비하고, 칼럼도 쓰고, 인터뷰도 하고, 전몰용사 부모들의 모임인 ‘평화를 위한 금성가족’을 창립했다. 그리고 크로퍼드 시위. 이 시위는 무명의 그를 ‘반전운동의 로사 팍스(백인에게 버스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운동으로 1950년대 민권운동의 불씨를 지핀 흑인여성)’로 변신시켰다. 시핸은 8월3일 집에서 TV를 보던 중 14명의 미군이 이라크에서 희생당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이어 부시 대통령이 나와 이들의 죽음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전몰용사 가족들의 사랑하는 이들은 ‘숭고한 명분’을 위해 희생됐으며, 이들의 희생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 우리는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핸은 그때의 심경을 자신이 쓴 칼럼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내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더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 이유없이 혹은 거짓말에 속아 속수무책으로 고통을 당하는 ‘또 한사람의 엄마’가 아니다. 나는 내 아들의 명예롭고 용기있는 희생이 부시 대통령의 불명예스럽고 비겁한 살인에 이용되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소 늦은 것이었지만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다.”

부시 대통령이 크로퍼드 목장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시작된 시핸의 시위는 5주간에 달한 부시 대통령의 휴가기간 내내 이어졌다. 그의 요구사항은 오직 하나, 대통령을 만나 아들을 죽게한 그 ‘숭고한 명분’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런 시핸의 행동은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엄마의 애끊는 심정, 허허벌판과 폭염속 시위, 휴가중인 대통령과의 대비 등이 맞물려 가뜩이나 이라크전에 대해 회의론을 갖고 있던 미국인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이후 미국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동조 시위자들이 몰려들어 크로포드 목장 주변은 순식간에 반전운동의 메카로 변했다. 시핸은 그곳을 죽은 아들의 이름을 따 ‘캠프 케이시’로 명명했다. 반전의 물결은 전세계를 뒤덮었다. 지구촌 곳곳에서 동조 촛불시위가 이어졌고, 9월26일엔 전 세계에서 이라크전쟁 이후 최대의 반전시위가 동시에 펼쳐졌다.

이후 시핸은 ‘평화엄마’라는 애칭답게 반전과 평화운동의 상징으로 우뚝 섰다. 그러나 그것은 비싼 대가를 요구했다. 그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가정이 해체된 것이다. 남편과는 이혼을 했다. 시댁식구들은 등을 돌렸다. 친정 어머니는 병으로 쓰러졌다. “남편은 케이시가 죽기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나는 이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내게는 파티에 가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는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핸은 반전운동을 시작한 후 “우리같이 나약한 사람들이 정말로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 자신도 케이시가 죽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힘은 약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는 한 사람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지난 9월 워싱턴의 반전집회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베트남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 또 이 나라의 여성참정과 노조, 민권 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미국에서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같은 민중들이었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지 묻는 사람들은 학교로 돌아가 다시 역사책을 읽어보라.”

시핸은 자신의 임무가 ‘나라간의 갈등으로 또 다른 아들 딸들이 죽는 일이 없도록 안전한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말한다. “이러한 나의 임무는 아침마다 나를 일어나게 만드는 이유다. 캠프 케이시는 나의 인생과 삶의 기쁨, 그리고 희망을 돌려주었다. 이제 나는 살고 싶다”고. 그리고 이라크 전쟁이 끝나더라도 예전의 나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평화를 위한 나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라고.

-신디 시헨 어록-

▲케이시(아들)를 위해 우는 것은 이제 끝이다. 앞으로는 모든 다른 어머니들을 위해 울 것이다. (2004년 5월 케이시의 묘소를 참배한 후)

▲미국이 자신의 전쟁을 남의 나라에서 하고, 미국이 저지른 범죄를 그 나라로 하여금 보상하도록 하는 것은 얼마나 인종차별적이고 부도덕한 것인가. 이것은 뻔뻔스러운 대량학살이다. (2005년 6월28일 자신의 칼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리고 거짓말 때문에 매일 이라크에서 사람들이 죽고 있다는 것이다. (2005년 9월24일 워싱턴의 반전집회에서)

▲나는 내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말로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도록 가르쳤다. 차거나 물거나, 때리거나, 할퀴거나, 머리칼을 당기는 등의 폭력을 사용치 말도록 일러왔다. 말로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부모나 선생님같은 중재자를 찾도록 항상 말해왔다. 나는 아이들이 거짓말을 할 경우엔 비누로 그들의 입을 씻곤 했다. 당신도 당신의 아들에 대해 그렇게 해왔나요. (2005년 11월25일 부시 대통령의 어머니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워싱턴|정동식특파원〉 /시리즈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