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 시핸의 아들 2주기 추모

<신디 시핸의 아들 2주기 추모글>

우리가 들은 얘기들을 최대한 잘 짜맞춰 보면, 미 제1기갑사단이 이전에 ‘사담 시티’라고 불렸고 지금은 사드르 시티로 불리는 이라크 바그다드의 슬럼가에 진입한 날은 2년 전 3월 31일이 맞다. 내가 ‘우리가 들은 얘기를 최대한 잘 짜맞춰 보면’이라고 얘기한 것은 우리가 들은 얘기들이 너무나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많이 들은 것은 2004년 3월 31일이 진입일이라는 것이었다.

케이시가 우리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것은 2004년 4월 1일이었다. 그 아이는 첫 편지에서 우리가 그에게 편지나 소포,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화카드를 보낼 수 있는 주소를 마침내 가지게 됐다고 말했다. 케이시는 쿠웨이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집으로 전화를 했다. 자그마치 400분이나 기다린 끝에 전화가 연결됐지만 우리는 그리 오래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은 마지막이었다. 그 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한밤중인 12시 30분쯤이었고, 그는 무척 “덥다”고 하면서 지금 미사를 보로 가는 길이고 주말쯤에는 이라크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후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통화할 때 자신이 주말쯤 이라크로 옮겨갈 것 같다고 말했었다고 했지만 나는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케이시가 전화했을 당시 나는 막 잠에서 깬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당시에는 미처 몰랐겠지만, 나는 그 전화를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그때 그 아이의 목소리를 평생 잊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

케이시는 편지에서 그 해 6월 고등학교를 졸업할 예정이었던 여동생 자니의 졸업식에 가보지 못하는 것을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그때 그 아이는 자신이 6월 전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게 될 줄을 상상이나 했을까.

케이시는 또한 우리에게 그가 속한 제1기갑사단이 ‘별 탈 없이’ 한해를 보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얘기했다. 제1기갑사단과 교체한 부대의 그 전 한 해 동안 희생자가 단 2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바그다드에 도착한 바로 그날, ‘블랙워터 안보회사(돈을 받고 미군의 전쟁수행을 대행하는 민간전쟁업자: 역자)’ 소속의 용병 4명이 팔루자의 한 다리 위에서 무장세력에 의해 처형당하고, 그 여파로 반미 무장투쟁이 이라크 전역으로 확산되며, 그로부터 닷새 후 자신도 이역만리 이름 모를 골목길에서 미군을 ‘꽃과 초콜릿’으로 환영하기는커녕 총부리를 들이댄 무장세력의 총알을 맞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지 부시와 그외 치킨호크(Chickenhawks: 자신은 군대조차 가 본 적이 없으면서 강경론을 일삼아 다른 사람들을 전쟁터로 몰아넣는 부시행정부의 민간관리들)들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서 그 아이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케이시가 떠나기 전, 나는 그에게 이라크로 가지 말라고 애원했다. 우리 모자 모두가 그 전쟁이 잘못된 전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케이시도 “내가 가지 않아도 되면 참 좋겠어요, 그러나 엄마. 내가 일찍 그 곳에 가면 더 빨리 집에 올 수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자신이 텍사스주의 포트 후드 기지를 떠난지 4주 만에 종이 상자에 담긴 채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747편의 화물칸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언론을 비롯한 보수 우익의 선동기구들은 나의 투쟁이 케이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공격한다. 나를 둘러싼 그 소란스러운 논쟁 속에 정작 케이시의 얘기는 얼마나 쉽게 묻혀 버리는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케이시가 죽은 직후 내가 평화운동을시작한 건 미국이 케이시를 잊지 않도록, 케이시의 죽음이 그저 하나의 숫자로만(전사자 1명 증가라는) 남지 않기를 바래서였기 때문이다. 내가 평화운동을 시작한 것은 케이시의 죽음이 증오와 살인, 거짓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의 상징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한 나의 긴 여행은 다시는 제2의 케이시나 케이시 가족들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어느덧 케이시의 2주기를 맞으면서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이 몰려들지만, 나는 절대로 케이시와 그 아이의 삶을 잊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한다. 케이시가 세상에 나온 그 즐거운 날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날은 마침 존 F. 케네디의 생일이자 그해의 현충일이었다(미국에서는 5월의 마지막 월요일이 현충일임: 역자). 나는 또한 케이시가 군복을 입기 전 맞았던 21번의 생일을, 가족과친구들을 초청해 바베큐 파티를 하며 그 애의 삶을 다 함께 축하했던 21번의 생일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케이시가 죽은 후, 그 아이 없이 보내야 했던 두 번의 생일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런 것이었고, 앞으로도 더 많은 고통을 견뎌내야만 할 것이다. 명절날에는 또 어떠할까? 케이시가 살아 있을 때에는 그토록 행복했던 명절이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가장 슬픈 날이 돼버렸다.

케이시가 죽기 전에 함께 찍은 가족사진도 이제는 가슴이 터질 것처럼 아파서 도저히 볼 수가 없다. 가족들의 생일은 또 어떤가. 2004년 4월 4일 이후에는 더 이상 그 아이에게서 축하 전화조차 걸려오지 않는 우리 생일이 어떻게 행복한 날이 될 수 있을까?

도대체 부시 일당은 얼마나 많은 가족들에게 결코 끝나지 않을 슬픔과 고통에 가져다 주었는가? 부시 행정부의 정책으로 미국의 수많은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황폐해지고 있으며, 부시 행정부의 거짓과 기만 때문에 다른 나라와 그 국민들은 폐허 위에 누워 있다. 전 세계의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그들의 삶에 그 어떤 빛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블랙홀을, 그들로부터 빛과 삶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을 가지게 되었는가?

아니, 나는 결코 케이시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와 함께 전사한 마이크 미첼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에반 에쉬크래프(2003. 7. 24 전사), 존 토레스(2004. 7. 12 전사), 체이스 코멜리(2005. 8. 6 전사), 다니엘 토레스(2005. 2. 4 전사)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또 나는 부시 대통령이 밀어 넣은 거대한 수렁으로부터 우리 군대를 빼내는 일을 내가 왜 하려고 했던가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부시 행정부의 범죄로 인해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등의 페르시아만 연안 국가들에서 애꿎게 죽어간 수많은 아름다운 미국인들도 기억할 것이다.

또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이전쟁에서 미군이 사용한 맹독물질 백린에 의해 불타 죽어간 이라크인들의 모습을, 미군이 쏜 총에 맞아 머리의 반이 날아간 생후 7개월 된 아이의 모습을, 첫 번째 걸프전에서 쏟아 부은 열화우라늄탄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기형을 안고 세상에 나온 이라크 어린이들의 모습을. 이 사막에서 부시가 망가뜨린 모든 것이 그 잔인함에서 얼마나 충격적인지…. 또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임으로써 우리가 얻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나는 미국이 공동체정신을 잃어버림에 따라서 부시행정부도 점차 파멸로 향해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부시 범죄 가족이 그 어떤 증거도 없이, 9.11 테러와 아무 관계도 없는 두 나라를 침략하겠다고 우리를 위협하는 것을 내버려뒀다. 또 그들이 우리로 하여금 불필요한 전쟁으로 우리가 더욱 안전해졌다고 믿게 하도록 우리는 내버려뒀다.

또 우리는 우리 군대와 우리의 어린이들, 그리고 그들의 어린이들을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에 더욱 쉽게 노출되도록 하는 고문을 행정부가 허락하고 때로는 격려하고 눈감아주고 있는 것에 어떤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행정부가 이라크의 무고한 사람들에게 대량살상무기(WMD)를 사용하는 것도 허락해줬으며, 사담 후세인이 그의 국민들에게 “화학 무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라크 침공도 정당하다고 믿고 있다.

뉴올리언스에서 우리 국민들이 홍수에 갇힌 집의 지붕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가 떨어져 물에 빠져 죽어가던 그 시간에 부시 대통령이 골프를 치고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뉴욕에서 한가로이 신발을 사며 쇼핑을 하도록 우리는 내버려뒀다. 또 우리는 부시 일당이 중동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파하겠다는 따위의 쓰레기 같은 말을 지껄이도록 눈감아줬다. 정작 우리 땅 미국에서는 우리의 거짓 지도자들이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가고 야만적으로 민주주의를 망가뜨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공화당은 피맛에 취해 있으며 거짓 야당과 그 추종자들로 인해 그 어떤 반대의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있다.

남북전쟁 이래로 전쟁광들이 벌이고 있는 모든 전쟁마다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은 그 전쟁에 투입돼 싸우다 부질없이 생명을 잃었다. 나는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것들을 위해 우리 이전에 먼저 죽어간 수많은 용감한 사람들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결코 그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왜?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베트남전쟁의 교훈을 아직도 배우지 못했다면 더 늦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을 때 제발 깨달아야한다. 미국은 결국 이라크에서 단계적으로 발을 뺄 수밖에 없게 되겠지만, 우리 군대를 지금 당장 철수시켜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만 한다면, 양쪽 모두 더 이상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 빨리 철군하지 않는다면 미 제국주의의 암세포는 점차 온 몸으로 퍼져나갈 것이며 케이시와 같은 무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이 죽어야 할지 모른다.

또 베트남전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또 하나의 교훈은 소위 정치가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새로운 적과 새로운 전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네오콘 전쟁광들은 새로운 ‘주의자(ist)’를 만들어낼 것이고 또 새로운 ‘무슨 무슨 주의(ism)’를 만들어낼 것이다. 현재의 ‘주의’가 더 이상 우리를 공포스럽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또 새로운 것을 계획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과 싸워가면서 날카로운 감시의 눈을 번뜩여야 한다.

불교신자들은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말한다. 한 번은 그의 육체적인 생명이 다했을 때이고 또 한 번은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었을 때이다. 우리는 전쟁광들의 제단에 바쳐진 케이시의 너무 이른 죽음이 던져준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똑같은 제단에 바쳐진 수백만의 베트남전 희생자들의 교훈도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

돈과 힘의 노예가 된 우리 정치인들에 의해 가엽게 죽어간 케이시와 수백만의 사람들은 평화와 정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선물이다. 그들을 절대 잊지 말자. 결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