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록 인턴기자가 경험했던 아프간 파병 다산부대
고 윤장호 병장과 같은 아프가니스탄 다산부대에서 2004년 8월부터 통역병분대장으로 근무했던 본지 천영록 인턴기자의 생생한 체험기.
나는 2004년 8월 군복무 중 고 윤장호 병장과 같은 아프가니스탄 다산부대에
통역병 분대장으로 배치받아 6개월간 복무했다. 그곳은 막연하기만 한 오지의
사막으로 군인 사이에서는 온갖 흉흉한 소문만 무성한 곳이었다.
다산 4진 100여명과 함께 한 아프가니스탄의 체험기간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처음
그 땅을 밟는 순간 느낀 것은 ‘미군이라는 숙주’를 통해 모든 게 이뤄지는
곳이라는 것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장병들과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인수인계, 눈
앞에서 폭탄이 터지지만 실전을 상상해본 적조차 없는 어린 한국군은 그저 유엔
평화유지군에게 보기 좋게 포장해 보낸 종합선물세트였다. 우리는 그저 미군
상급부대의 명령과 보호에 절대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2004년 8월부터 6개월간 해발 1800m에 달하는 바그림 미 공군기지에서 이뤄진
다산부대의 가을파병. 극단적인 건조함과 일교차, 야간에도 전투기가 뜨고 내리는
굉음은 귀를 찢었고, 미군이 지원한 텐트기지에서 흉폭한 모래바람을 견디는
나날이었다.
한발짝만 잘못 내디디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지뢰밭 한가운데
위치한 소련기지의 잔해 속에서 한국군의 행동 반경은 고작 사방 16㎞에 불과했다.
한국군이 하는 일은 미군을 도와 이곳을 콘크리트로 포장하는 공병으로서의 상징적
업무였다.
한국과는 사뭇 다른 병영생활. 여러 부대에서 끌어 모아온 장병은 위계질서가
엉망일 수밖에 없었다. 하루 이틀 사이 키르기스스탄을 스쳐지나며 이뤄지는
인수인계는 형식적이었고, 사실상 신생부대였던 다산부대는 장교부터 사병까지
전쟁터에 와 있다는 긴장감이 떨어지면서 점점 해이해졌다.
기지 내의 분위기는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만큼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몇년 전
이웃 부대에서 장교끼리 스트레스를 못 이겨 서로 총을 쏴 죽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테러리스트가 준동하는 전장임에도 실탄조차 못 들고 다닐 정도로
부대원끼리 서로를 믿지 못했다. 동맹군은 한국군을 비웃었다.
아슬아슬한 포격도 수시로 발생했다. 우리 부대에서 고작 몇십미터 거리에
박격포탄이 떨어졌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때때로 미군 사상병의 소식도
들려왔다. 특히 기지 밖으로 출전하는 미군은 하루에도 두세 번의 교전이 있었고,
때로는 중상을 입기 때문에 엄청난 전쟁 스트레스를 받고 견디고 있었다.
기지 밖에서는 한국전쟁 직후처럼 군부대 주변의 조폭이 실세였다. 다만 총을
소유한 군벌이라는 점만 차이가 났다. 초콜릿을 달라고 달라붙는 현지 아이들의
눈빛은 순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국에서 파병된 어린 군인이 만나는 현지인은
온갖 가짜 시계를 꺼내 흥정을 걸어보려는 이들 뿐이었다.
천영록 인턴기자(성균관대 경제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