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라크 내부의 분열은 내전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 밝힌 글이네요..
이라크라는 국가의 성립부터 수니파,시아파 등의 종교적 집단
쿠르드,투르크멘 등의 인종적 집단들의 역사와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짚고 있어서 이라크전에 대해서 피상적으로 알고있는
경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기초적 자료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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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 부추긴 이라크 종파주의
앤 알렉산더
이라크를 분열시키는 것은 시아파와 수니파의 반목이 아니라 [미국의] 점령 정책이라고 영국의 혁명적 반자본주의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의 기자 앤 알렉산더는 말한다.
시장에서의 폭탄공격, 살인 특공대, 사원 습격 등 유혈낭자한 종파간 폭력이 이라크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 쿠르드족과 아랍족·투르크멘족이 서로 싸우는 새로운 인종 전쟁 가능성이 이라크 북부에서 고조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납치·살해·폭탄공격이 몇 곱절 늘었다. 2003년에는 50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된 자살폭탄 공격이 단 한 건이었다. 2004년에는 4건, 2005년에는 5건, 2006년에는 6건이었다. 올해는 1월에만 네 건의 폭탄 공격이 있었고, 그 때마다 70명, 88명, 73명, 1백37명이 죽었다.
이러한 참사들은 대부분 신원을 알 수 없는 무장 복면 괴한이 자행한다. 그러나 우리가 듣는 얘기는 이러한 갈등이 수니파와 시아파의 반목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점령 지지자들은 이런 해묵은 원한 관계를 풀기 위해 미·영 점령군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라크의 문제는 점령 때문이 아니라 이라크인들 사이의 분열과 그들 자신의 잔인한 폭력성 때문이라는 위험천만한 신화를 퍼뜨린다.
그들은 미·영 점령군이 저지르는 학살은 정당할 뿐 아니라 혼란을 막는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암시한다.
[그러나] 진실은 점령 세력이 의도적으로 이라크의 정치 체제를 붕괴시켰고, 이 때문에 지금처럼 종파간 폭력이 분출하게 됐다는 것이다.
미국 관리들은 오랫동안 이라크 사회가 종교적·인종적 차이에 따라 분열해 있었다는 견해를 부추겨 왔다.
2003년 침략 이후 미국 관리들은 이라크인 동맹 세력을 내세우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들은 미군 화물열차를 타고 돌아온 망명 정치인들이 마치 저마다 이라크의 종교·인종 “공동체”들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양 떠들어댔다.
이러한 주장에는 두 가지 주된 문제가 있었다. 첫째, 이라크인들은 다른 무엇보다 “시아파”나 “수니파”, [또는] “쿠르드족”, “아랍족”, “투르크멘족” 같은 종파·인종 집단으로만 구분된다는 생각이다.
둘째, 주요 쿠르드족 정당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점령을 지지한 이라크 정당들이 대다수 이라크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 때문에 이런 정당들은 국가의 물자를 차지하려고 치열한 아귀다툼을 벌였다. 이러한 각축전은 미국이 통제하는 1백20억 달러 가량의 이라크 [정부] 재정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미국 관리들의 압력 탓에 [이라크의] 정부 부처들은 종파별로 배분됐다.
2003년과 2004년 내내 진정한 권력은 연합군임시행정처(CPA)의 미국 관리들에게 있었다. 반면, 허울뿐인 이라크 정부는 시아파와 수니파 가운데 누가 내무부를 차지할 것이냐를 두고 내분에 휩싸였다.
점령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비록 국가를 운영할 수는 없었지만 정부 부처들을 정실주의 기구로 만들 수는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일자리나 이권을 나눠줬다.
특히, 국가는 일종의 민병대 양성소가 됐다. 이 민병대들은 대체로 인종별·종파별로 구성됐고, 이는 그들을 배출한 단체들의 정치를 반영했다.
이런 정책들이 이라크 군대를 비롯한 국가 기구의 해체와 결합되자 국가 통제를 벗어난 민병대들 ― 무크타다 알 사드르의 마흐디군이나 수니파 이슬람주의 단체들 같은 ― 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됐다.
한편, 이와 더불어 점령의 ‘민영화’가 계속됐다. 지금 이라크에는 적어도 4만 8천 명의 “용병”뿐 아니라 미군의 지휘를 받는 비밀 민병대가 6개 정도 있다.
지금 이라크의 종파간 폭력을 추동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제국주의 점령의 논리다. 그것은 국민 대다수가 점령군 주둔에 반대하는 나라를 지배하려고 미·영 관리들이 애쓴 결과다.
그들의 정책은 고전적 식민주의 전략이었다. 즉, 침략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억누르고자 자신들과 협력할 소수 토착 특권층을 골라 군사력으로 지원하고, 만약에 갈등이 분출하면 자신들은 아무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는 것이다.
이라크의 엄청난 사망자 수는 미·영 점령군이 직접 저지른 짓이거나 [그들의] 점령 [정책]이 부추긴 분열의 결과다.
점령 세력은 의도적으로 종파간 갈등을 부추기는 조건들을 조성해 왔다. 점령군이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이라크에는 더 많은 재앙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빨리 떠나면 떠날수록 비(非)종파적 운동들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제국주의에 맞선 단결의 역사
1921년 수립된 이라크 국가는 하심 왕조(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유래한 왕가), 오토만[제국]과 영국, 제1차세계대전 때 이라크를 점령한 영국 군대에서 근무한 일단의 이라크인 전직 장교들의 동맹이 지배했다.
나자프와 카르발라의 시아파 종교 지도자들 ― 이들 중 일부는 1920년의 민족 항쟁을 지지했다 ― 은 새로운 정치 체제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비록 처음에는 수니파 정치인들이 이라크 국가를 지배했지만,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세력이 증대되고 있던 부족 지도자들이 새 지배계급으로 부상했다.
영국의 식민 통치자들은 부족 지도자들이 지주 계급이 되도록 다그쳤고 그들은 전에 부족 전체의 공유지였던 토지를 차지했다.
시아파 부족과 수니파 부족 모두에서 충원된 새 지배계급은 이 과정에서 이득을 볼 수 있었다.
지주들이든 시아파의 유력 상인 가문들이든 왕정 통치기에 시아파 성직자나 이슬람주의 운동을 후원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1940∼50년대에 민족주의 운동이 부흥하면서 성지 순례자가 점차 줄고 전통적으로 농민들이 납부해 온 세금에서 얻는 수입이 바닥나자 이라크의 시아파 종교 기관들은 위기를 맞았다.
이런 급진화 속에서 수많은 시아파 무슬림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공산당에 기대를 걸었다. 1956년 즈음 공산당은 성지인 나자프 시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다.
바그다드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은 종파간·인종간 결혼이 흔한 일이 되면서 종교·인종 집단들[이 뒤섞이는 일종]의 용광로가 됐다.
무슬림형제단 같은 수니파 이슬람주의 단체들은 작고 영향력이 없었다. 왕정에 반대한 주요 정당들 가운데 종파적 차이를 바탕으로 조직된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공산당은 아랍족, 쿠르드족, 투르크멘족,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인, 다른 소수파 종교 신도들을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1950년에 양대 아랍 민족주의 정당인 독립당과 바트당은 모두 시아파가 주도했다.
1958년에 혁명이 일어나 영국의 후원을 받던 왕정을 전복했다. 계급적 유대감과 제국주의에 맞선 공동 투쟁의 경험이 종파적 정체성보다 더 중요했다.
혁명의 중심에는 수많은 농민들과 도시로 유입된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라크의 비극은 이 운동이 처음에는 혁명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지배계급에 의해, 그 뒤에는 제국주의에 의한 이라크 경제·사회의 파괴로 중단됐다는 데 있다.
분열의 씨앗을 뿌린 [경제] 제재
흔히들 1968년에 바트당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수니파 무슬림만으로 이루어진 사담 후세인 정권이 등장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비록 1970∼80년대에 수니파가 바트당을 지배하긴 했지만, 이는 대체로 사담 후세인의 친인척들이나 후세인의 고향인 티크리트 출신 세력의 강력함을 반영했다.
바트당 정권 내의 소수 특권층은 협소한 집단에서 충원됐지만, 그들은 상대적으로 광범한 중간계급 덕분에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 중간계급은 수니파든 시아파든 관료 기구와 공공부문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이 계급은 1990년대 동안 해체됐다.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려고 종파주의 전략을 추구했다. 특히 1970년대 말 시아파 이슬람주의 반정부 단체들의 봉기 이후와 1980∼88년 이란-이라크 전쟁 때 그랬다. 당시에 이런 일은 미·영 정부에 있는 후세인의 후원자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8년 동안의 참혹한 전쟁이 있었고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악마처럼 비쳐지게 만들고 이란계로 추정되는 이라크인 수천 명을 추방했음에도 이라크 남부의 시아파 지역의 대규모 반란은 1991년이 돼서야 일어났다.
1991년 반란의 발단은 걸프전에서 이라크군이 미국 주도 연합군에 패배한 뒤 쿠웨이트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1991년 반란으로 바트당 지지는 차츰 쇠퇴했다. 비록 겉으로는 사담 후세인이 여전히 강력해 보였지만, 그는 갈수록 자신을 세속 민족주의자보다는 아랍 부족 지도자인 양 행세했다.
추세
1990년대 동안 종교 단체들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 증대에 기여한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세속 민족주의의 타락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 제도의 극적인 약화다.
바트당의 선전 기구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교적 이미지들을 모두 이용하기 시작했다.
1991년 [걸프] 전쟁 이후 유엔이 강요한 경제 제재 때문에 의료 체계와 교육제도와 사회기반시설이 대부분 파괴됐다.
복지 제도가 붕괴해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대중이 늘어나자 이에 맞춰 수니파와 시아파 자선 단체들이 확대됐다.
한편, 야만적인 국가 탄압 때문에 흔히 사원만이 안전하게 정치 토론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됐다. 국가는 성직자들을 후원하고 사원을 건설해 정치의 “이슬람화”에 기여했다.
반미 시아파 성직자인 무크타다 알 사드르가 그의 아버지인 무함마드 사디크 알 사드르한테 물려받은 권력 기반은 이러한 시아파 자선 단체들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었다.
국가의 종교 장려는 바트당 정권이 갈수록 필사적으로 안정을 추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징후 가운데 하나였다.
이와 비슷하게 중앙 정부에 파괴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난 또 다른 정책은 옛 부족 권력의 부활이었다. 이 덕분에 부족 지도자들은 사설 무장집단들을 운영하고 부족 법률을 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부족장들이 강력한 곳, 특히 농촌에서는 이런 정책이 국가의 사법적 근간을 대체했다.
1958년 이래 이라크의 세속 민법전은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모든 시민을 동등하게 대우했다. 물론 현실에서 사법 제도는 집권당에 유리하게 작동했다.
대안적 사법 제도로서 무장세력의 지원을 받는 부족 전통의 부활은 정부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세력을 만들어냈다. 일부 지역에서는 당[조직]과 부족[집단]이 융합됐다.
문제는 당과 부족의 차이가 흐려질수록 바트당에 대한 개인적·지역적 충성 시늉조차 내팽개치기가 더 쉬워졌다는 것이다.
2003년 미국의 침략 직후 상황은 실제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보여 줬다. 일부 부족 지도자들은 재빨리 사담 후세인을 버리고 점령을 지지했다. 반면, 다른 지도자들은 저항에 가담했다.
부족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파간 갈등이 점령의 불가피한 결과였다는 말은 아니다. 많은 이라크 부족들은 수니파와 시아파가 섞여 있고, 아랍계 이라크인들의 다수는 점령 세력과 그 지역 대리인들을 거부했다.
또한, 이라크의 수니파와 시아파는 제국주의에 맞서 함께 투쟁한 오랜 전통이 있다.
2004년 무장 저항이 고양되자 점령에 반대하는 수니파와 시아파 세력이 모두 저항에 가담했다. 미군이 수니파 도시인 팔루자를 봉쇄했을 때 그들은 남부 전역에서 알 사드르의 마흐디군이 이끈 봉기에 직면했다.
2005년 초 무렵, 이라크인들의 저항을 분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미군 사령관들은 공공연히 “엘살바도르 식 방안” ― 198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에서 CIA가 지원한 살인 특공대를 모델로 한 방안 ― 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미군 특수부대 사령관 출신의 군사 평론가인 웨인 다우닝 장군은 미군이 이라크에서 2003년 이후 살인 특공대를 운용해 왔다고 밝혔다.
이로 인한 살인과 보복의 악순환 때문에 저항과 종파주의의 복잡한 상호작용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라크를 먼 옛날부터 종교적 증오가 들끓던 사회로 묘사하는 것은 잘못됐을 뿐 아니라 해롭기도 하다.
맞불35호 (기사 입력일 : 2007년 03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