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어디서 ‘희망’을 보았나요
한국인 인질 언급도 안 한 미-아프간 정상회담… 분쟁은 북서부로 확대되는데 덕담만 주고받아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애끓는 가족들의 비원도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든 살려내야 하지 않느냐”는 외침도 대답을 얻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납치된 한국인 인질 구출의 열쇠를 쥐고 있는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그렇게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만 일깨워준 채 막을 내렸다.
“어둠의 시대에서 희망의 시대로”
“아프간은 이전에 비해 훨씬 좋은 나라가 돼 있다.”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남·중앙아시아 담당 차관보는 카르자이 대통령의 방미에 앞서 지난 8월2일 언론 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우처 차관보의 발언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8월4일과 5일 이틀간 열린 부시 대통령과 카르자이 대통령 사이의 정상회담은 애초 관심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저 어렵사리 이뤄낸 값진 성과를 축하하며, 두 나라 정상들은 서로의 등이나 두드려주며 기뻐하면 그만이었다. 회담에 앞서 ‘우려’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이 8월6일 정상회담을 마친 뒤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로에게 격려와 감사의 말을 쏟아낸 두 대통령의 발언은 갈수록 악화되는 아프간의 현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사진/REUTERS/LARRY DOWNING)
“아프가니스탄은 어둠의 시대에서 희망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카르자이 대통령에게 찬사를 보낸다.” 부시 대통령은 지난 8월6일 미 대통령 별장인 메릴랜드주 캠프 데이비드에서 카르자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나란히 기자회견을 열었다. 회견은 오전 11시17분(현지시각)에 시작해 11시42분에 끝났다. 25분 동안 진행된 회견 내내 ‘한국인 인질’에 대한 언급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대신 아프간 상황이 얼마나 호전되고 있는지에 대한 얘기만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우려’가 고스란히 현실이 된 게다.
“탈레반의 춘계 대공세 얘기가 지난해 겨울부터 나왔다. 하지만 올봄 대규모 공세에 나선 것은 미군과 나토군, 아프간군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회견의 모두 발언에서 “아프간군이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으며, 이제 11만 아프간 치안 병력이 아프간을 지켜내고 있다”고 강조했다.
“탈레반은 아프간에서 여자 어린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금지했다. 이제 아프간에선 500만 명의 어린이가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이 가운데 3분의 1가량은 여아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지만 상황은 나아지고 있으며, 이런 상황 진전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카르자이 대통령도 거침이 없었다. 그는 도로와 학교 건설, 진료소와 의료 서비스 확충, 교육과 농업 개선 등 수많은 ‘성과’를 입에 올렸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했다. “물론 여전히 테러에 맞서 싸우고 있다. 적들은 분명 패배했지만, 지금도 산악지대에 숨어 버티고 있다. 우리는 맡은 바 과업을 완수할 것이며, 산악지대 은신처에서 테러범들을 끌어내 위협을 당했던 아프간 국민과 미국민, 그리고 세계인의 이름으로 그들을 심판할 것이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또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며 “이미 패배해 좌절감에 빠진 탈레반은 고작 등교하는 어린이나 살해하는 비겁한 집단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카르자이를 노린 세 번째 암살 시도
“탈레반이 집권했을 때를 기억한다. 탈레반은 야만적인, 냉혈한 살인자 집단이다.” 나란히 선 부시 대통령도 이내 말을 받았다. 두 정상의 표정은 단호했고, 한국인 인질 석방을 위해 탈레반 수감자 석방을 고려해달라는 요청은 애초부터 설 자리가 없었던 게 분명해졌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프간이 처한 서글픈 현실이 이들의 인식과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선언’과 달리 사실 워싱턴과 카불에서도 이런 현실을 부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게다.
지난 6월10일 카르자이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외출’에 나섰다. 대부분의 시간을 요새화한 카불의 대통령궁에서 보내는 카르자이 대통령이 카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흔치 않다. 이날 그가 향한 곳은 한국인 피랍 사건이 벌어진 가즈니주였다. 마을 부족원로 등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지역 학교에서 카르자이 대통령이 한창 연설에 열을 올릴 때 굉음과 함께 로켓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카르자이 대통령의 방문을 미리 알아챈 탈레반의 암살 시도였다. <로이터통신>은 이날치 보도에서 “탈레반이 발사한 로켓 10여 발은 목표물을 살짝 비껴갔으며, 카르자이 대통령은 불안감에 휩싸인 청중을 안심시킨 뒤 연설을 마쳤다”고 전했다. 이날 탈레반의 공세는 카르자이 대통령에 대한 세 번째 암살 시도였다.
미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최근 내놓은 보고서에서 지난 5~7월 석 달 동안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동맹국이 아프간에서 사용한 폭탄이 모두 407발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는 같은 기간 미군이 이라크에서 사용한 폭탄의 4배에 이르는 수치라는 게 이 단체의 지적이다. 지난해부터 올 상반기까지 최근 18개월 동안 아프간에서 벌어진 각종 유혈사태로 목숨을 잃은 이들은 모두 6천여 명에 이른다. 희생자 가운데 1500여 명은 무고한 민간인이다.
“카불 외곽 출입시 반드시 경찰의 사전 허가를 받을 것. 무장 경호요원을 대동할 것.” 한국인 피랍 사건이 벌어진 이후 아프간 내무부가 내놓은 새로운 ‘안전지침’은 탈레반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는 카르자이 대통령의 말을 무색하게 한다. 유엔이 운영하는 〈IRIN통신〉은 8월3일 아프간에서 활동하는 구호단체들의 연대체인 아프간구호조율기구(ACBAR)의 하심 마야르 부국장의 말을 따 “정부 쪽 무장 경호요원을 대동하고 카불 외곽으로 나갈 경우, 되레 구호요원들이 (탈레반 등) 반정부 무장세력의 공격 목표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 지난 6월17일 오전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경찰학교 통근버스를 겨냥한 자살폭탄 공격이 벌어져 35명이 목숨을 잃었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버스의 잔해는 수도 카불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사진/ REUTERS/OMAR SOBHANI)
수도 카불이라고 마냥 안전한 건 아니다. 카르자이 대통령의 세 번째 암살 기도가 무산된 지 1주일여 만에 카불 시내에서 벌어진 강력한 자살폭탄 공격이 이를 방증한다. 지난 6월17일 아침 출근길 경찰학교 통근버스를 겨냥한 탈레반의 자살폭탄 공격으로 22명의 훈련병을 포함해 모두 35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1년 말 탈레반 축출 이후 단일 사건으론 최악의 유혈사태였다. 이라크에선 흔한 도로매설 폭탄과 자살폭탄 공격이 아프간에서 불을 뿜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5년 중반부터다.
아편 생산량 지난해보다 150% 늘어
매년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아편 생산량도 아프간의 현실을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지난 7월4일치에서 “영국군이 탈레반과 격전을 치르고 있는 헬만드주를 중심으로 올해 아프간 아편 생산량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미국과 나토군이 약 10억달러를 들여 벌여온 아편농사 근절 캠페인의 결과는 “완전히 재난 수준”이라며 “아프간 전체 인구 2300만 명 가운데 12% 정도가 아편 재배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탈레반의 근거지인 남부 헬만드주에선 아프간 전체 아편의 3분의 1을 생산하고 있으니, 그 수익이 어디에 쓰일 것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엔마약범죄국(UNODC)은 이미 지난 2월 아프간 농촌 지역의 아편 경작지 규모를 근거로 올해 아편 생산량이 지난해보다 150% 이상 늘어 또다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미국의 침공 이전에도 아프간은 비참할 정도로 가난한 나라였다. 유엔과 세계은행 등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아프간의 평균수평은 43살에 불과하다. 신생아 5명 중 1명은 5살이 되기도 전에 숨을 거둔다. 1인당 국민소득은 한 해 200달러에 불과하며, 성인 70%가 문맹이다. 세계은행은 아프간 농촌 가구 중 적어도 30% 이상은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추정했다. 상황은 나아졌을까? 미 회계감사원(GAO)은 지난 5월 의회에 제출한 아프간 안정화 작전 및 재건복구 관련 보고서에서 “미국의 침공 이후 5년 반 이상이 지난 지금껏 아프간의 치안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난해부터 더욱 악화되고 있다”며 “치안 부재로 인해 아프간 안정화 및 재건복구 노력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이런 현실은 미 평화기금과 외교·안보 전문지 <포린폴리시>가 공동으로 조사해 매년 발표하는 ‘세계 실패한 국가 지수’의 지난 3년 추이에도 여실히 드러나 있다. 두 단체는 전세계 177개국을 대상으로 사회·경제·정치·군사적 측면에서 모두 12개 지표를 평가해 ‘실패한 국가 지수’를 산출해낸다. 최근 발간된 <포린폴리시> 7·8월호를 보면, 아프간은 올해 수단·이라크·소말리아 등에 이어 8위에 올랐다. 순위가 높을수록 불안정성이 높은 ‘실패한 국가’를 뜻한다. 지난 2006년 아프간의 순위는 10위였고, 2005년엔 11위였다. 해마다 상황이 나빠지고 있는 셈이다.
실패한 국가, 2005년 11위, 올해 8위…
“치안 상황이 갈수록 나빠지면서 민간인들은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도로매설폭탄 공격과 자살폭탄 공격이 늘고 있고, 이를 막기 위해 미군 등이 벌이는 공습이 또 다른 희생을 낳고 있다. 기본적인 공공 서비스도 완전히 막힌 채다. 평범한 아프간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게 아프간의 현실이다.”
피에르 크레엔뷜 국제적십자사 사업국장은 지난 6월12일 내놓은 보도자료에서 “아프간의 인도적 상황은 1년 전에 비해 턱없이 나빠졌다”며 이렇게 밝혔다. 적십자사 아프간 지역 책임자 레토 스톡커도 “2002년 이후 분쟁은 아프간 남부에서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았던) 서부와 북부로 지속적으로 옮겨가고 있으며, 상황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며 “대도시 외곽으론 어려운 이들에게 접근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다 보니, 도움의 손길이 절실한 농촌 지역 주민들은 잇따른 자연재해와 인도적 재난으로 더욱 취약한 상태로 내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과 카르자이 대통령은 대체 어디서 ‘희망’을 찾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