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를 제출한 1급 공무원은 복지부의 문경태 정책홍보관리실장과 문창진 사회복지정책실장, 오대규 질병관리본부장, 변철식 식품의약품안전청 차장 등 4명.
이중 2명은 선별 수리예정이다
기마다나 비치운동으로 조선혼 말살 나서 – 친일파 문명기
특히 경북도 평의원을 지낸 문명기와 광산을 운영했던 최창학은 애국부에 비행기를 2대씩 헌납했다고 민족문제 연구소는 덧붙였다.
문명기는 친일의 대가로 큰 사업권을 따냈다. 그는 1938년부터 ‘가미다나(神棚) 비치’ 운동을 전개했다. 가미다나란 일본 개국신 ‘아마데라스 오미카미’의 영부를 안치한 것이다. 조선민중들은 지방 비슷한 것을 나무함 속에 넣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절을 해야 했다. 조선의 혼을 앗아가는 치욕의 의식이다. 문명기는 가미다나 보급운동을 벌이며, 그 독점판매권을 가졌다.
뼈 속까지 일본인이 되고 싶어 했던 그는 집을 일본식으로 꾸미고, 일본 옷을 입고 처자식에게 항상 일본말을 쓰게 했다는 이웃의 증언이 있다.
1945년 해방이 된지 4년이 지난 1949년 1월 29일 그는 반민특위법에 따라 체포, 기소됐다.
이 날 문명기 피고에 대한 증인으로 국회의원 오택열(53)씨와 문 피고의 고향사람인 한주열(63)·최희출(44) 양 씨가 출두하여 피고의 반민 죄상을 일일이 증언하였는데 피고는 과연 정신이상에 걸렸는지 피고가 오늘 반민자 공판정에 서게 된 것을 황송하게 알며 영광으로 아는 동시에 이렇게 하는 것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라고 진술하여 또 한번 폭소를 자아내게 하였다. (동아일보 1949년 5월 10일자)
반면 북한은 1947년 만경대혁명자유학원을 설립, 항일투쟁 참가자 유자녀들을 모아 교육을 시켰다. 북한은 만주 각지에 사람을 파견해 유자녀들을 모았다고 한다. 북한 정권은 이들은 이른바 ‘혁명2세대’로 키워서 김일성-김정일 유일체제의 공고한 기반으로 삼았다.
북한은 한국전쟁 때 죽은 장병의 유자녀를 위한 강반석혁명자유학원과 해주혁명유자녀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친일파 문명기 자손 문태준,영덕에서 4선 의원 지내고 보사부 장관도 역임
반면 문명기는 해방 후 잠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지만, 1968년 8월 15일 사망했다. 5남7녀를 두었으며, 그의 큰 아들은 해방 직후 행방불명 됐다. 문명기의 무덤 옆에 큰 아들의 가묘가 있다. 그의 행방불명을 둘러싸고 지역사회에 소문이 무성할 뿐이다.
친일파 문명기 자손 의사인 문태준은 1967년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이 됐다. 문태준 1967년부터 10여 년 동안 영덕청송울진에서 여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노태우 정권 때는 보건사회부 장관을 지냈고, 대한의사협회장도 역임했다.
친일파 문명기 무덤은 무너져
문명기의 사후는 외견상 초라해 보인다. 영덕군 강구면에 소재한 문명기의 무덤을 기자가 찾았을 때 봉분은 앞부분이 크게 무너지고 떼는 잘 자라지 못했으며, 잡초가 무성했다.
문명기의 비문은 노산 이은상이 썼다. 노산도 친일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비문에는 그가 일제하에서 누렸던 직함은 없다. 단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다리나 도로를 놓았았다는 내용만 나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