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밀양 송전탑’ 주민 인권침해 조사 보고회 “나무에 깔려 실려가는데도 ‘쇼하고 있다’ 말해”

ㆍ주민 70%가 참전군인보다 심한 스트레스 앓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다산인권센터,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 9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밀양송전탑 인권침해조사단’이 3일 경남 밀양 송전탑 인근 지역 주민들의 인권침해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근 지역 주민 10명 중 7명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갈등 과정에서 한국전력공사 소속 직원들과 작업자·용역 등이 주민들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한 사례도 보고됐다.

밀양송전탑 인권침해조사단은 이날 서울 마포구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 3층 회의실에서 ‘밀양 765㎸ 송전탑 인권침해조사 보고회’를 열었다. 밀양 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주민들이 겪은 인권침해 상황을 촬영한 15분가량의 동영상이 상영됐고, 밀양 주민 3명의 증언대회가 이어졌다. 조사단은 지난 5월29일부터 약 한 달간 밀양지역 4개 면 10개 마을에서 132명의 주민들을 상대로 현장 조사를 진행했다. 주민 건강권 실태조사는 지난달 9일 79명을 상대로 진행했다.

3일 서울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에서 열린 ‘밀양 송전탑 인권침해 실태조사 보고회’에 참가한 밀양 주민이 발표 도중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참전 군인보다 심한 스트레스장애

보고서의 ‘밀양 송전탑 건설 지역 주민들의 건강권 침해 실태’를 보면 조사 대상 주민 중 69.6%가 고위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증상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수치는 9·11사태를 겪은 미국 시민들(15%)에 비해서는 4.1배, 레바논 내전 시민들(29%)에 비해 2.4배 높은 유병률이라고 조사단은 밝혔다. 걸프전에서 포로로 잡혔던 미군의 유병률(48%)보다 높았다.

이상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어떤 사건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면서 삶의 질이 떨어지고 불안감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질병”이라며 “송전탑 건설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밀양 주민들에게 주는 심리적 외상 정도는 사고, 전쟁, 해고 등이 주는 충격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주민 10명 중 4명은 고위험 수준의 우울증과 불안, 공포를 경험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조사 대상 주민 중 우울증상을 보인 이들은 40.5%, 불안 증상을 보인 이들은 48.1%, 공포 증상을 보인 이들은 41.8%로 나타났다. 이 위원은 “노력하면 지금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마을주민들의 강한 신념 때문에 우울감보다 공포와 불안 증상을 느낀 사람이 많은 것”이라며 “현재 수치도 높은 편이지만, 만약 송전탑이 실제 설치되면 파국적인 감정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주민들에게 가해진 폭력 및 위협에 대한 조사도 이뤄졌다. 조사 대상자의 59.5%는 “한전, 시공사, 용역 직원들이 위협적이고 무례한 행동을 취해 불안한 마음을 갖게 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36.7%는 송전탑 건설 저지 과정에서 몸싸움 등으로 다쳐 병원 치료를 받았다고 답했다. 34.2%는 각종 고소·고발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뺨을 맞거나 발로 차이는 등 신체적 폭력을 경험했다” “흉기로 위협을 당하거나 상해를 입은 적이 있다”는 답변도 각각 15.2%씩 나왔다.

 

■ 만연한 모욕과 욕설, 폭행

조사 보고서 중 ‘공사 과정에서 한전·시공사·용역의 인권침해’ 부분을 보면, 작업자들이 주민들에게 욕설을 했다는 증언이 이어진다.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에 거주하는 곽모씨(65)는 “철탑 부지의 나무를 베러 온 작업자들을 막기 위해 온 할머니가 나무에 걸려 넘어졌더니 작업자들이 ‘저 할머니 넘어졌다. 불로 붙여 화장시켜라’ 등의 막말을 했다”며 “벌목을 막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욕설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부북면 대항리에 사는 장모씨(51)는 “나무를 못 베도록 지키고 있다가 작업자들이 벤 나무에 깔려 쓰러져 구급대에 실려가는데 작업반장이 나와서 보더니 ‘쇼하고 있다’고 했다”고 말했다.

폭행과 감금을 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부북면 대항리 주민 한모씨(51)는 “한전 차량을 막고 있는데 차에서 내린 사람이 나를 집어던져 다리 인대가 늘어나 두 달간 깁스를 했다”며 “다른 쪽에서 지키던 할머니들은 한전 사람들 15명 정도가 나와 손목을 꺾어 질질 끌고 가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고 말했다. 단장면 동화전마을 주민 김모씨(42)는 “내가 하지도 않은, 굴착기에 설탕을 넣었다는 이유로 한전 직원들이 나를 체포하겠다며 몸을 묶었다”면서 “경찰이 오기 직전 한전 직원들이 나를 풀어줬지만 경찰은 오히려 나를 현행범으로 체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 “보상금이 아니라 계속 살아가게 해달라”

이날 증언대회에 참석한 주민들은 마을공동체를 지키며 살던 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고 했다. 상동면에 사는 김영자씨(56)는 “비닐 농사를 한평생 지으며 누군가의 밥상에 내가 재배한 고추가 올라간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는데, 지금 수확하지 못한 고추가 타버리는데도 여기에 왔다”며 “농사를 포기하고서라도 마을이 두 동강 나는 것을 막고 영남 알프스로 알려진 마을의 자연을 지키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처음에 5개 면에 47억원의 보상금이 책정됐고, 2011년 말에는 125억원까지 보상금이 올랐다. 보상금이 문제였으면 그때 합의했을 것”이라며 “그저 이 마을을 자손들에게 지금 상태로 물려주고 싶은 마음뿐”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학교 다닐 때는 책 한 쪽도 남 앞에서 못 읽었지만 이제는 사람들 앞에서 송전탑에 대해 설명할 만큼 나설 수 있게 됐다”며 “한국이 민주주의 국가이고 인권이 있다면 정부가 주민들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희곡리 골안마을에서 올라온 안영수씨(57)는 “한전 직원들이 마을 이장 등에게 계속해서 회유를 해 여러번 이장과 임원들이 바뀌었다”며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마을 주민들이 서로 멀어지며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씨는 “우리는 절대로 보상금을 바라지 않는다”며 “어르신들이 뜨거운 뙤약볕에 실신하며 산을 기어올라야 하는 이 싸움이 끝나고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서홍교씨(82)는 “전쟁에 참여해 국가유공자가 됐고 나라를 위해 충분히 충성하고 살아왔는데, 공권력을 투입해 나를 막는 국가를 이해할 수 없다”며 “내가 죽으면 죽었지, 평생 살아오며 일궈온 내 마을이 황무지가 되는 것을 볼 수는 없다”고 말했다.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032220335&code=94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