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의료환경

미국은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의료보험이 없는 나라다. 개인 또는 회사에서 보험료를 부담하는 사보험 제도만 있다. 물론 빈곤층에 대한 의료보호 혜택은 따로 있지만, 잘 사는 나라들이 흔히 시행하는 무상 의료는 고사하고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이 4500만명에 달한다. 한마디로 기초 의료보장에서는 후진국이랄 수 있다.

그런 미국의 의료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글이 있다. 미국에 사는 아거님의 ‘정나미 떨어지는 미국 병원 문화’다. 글 밑에 달린 댓글에도 적지않은 정보가 있다. 이런 구절도 있다.

미국에 살면서 가장 정나미가 떨어지는때는 바로 병원에 갈 때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마 의료 선진국 미국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나는 앨러지로 가끔 대학 보건소에서 zyrtec 처방을 받는 일 이외에는 정식 병원이라고는 가보지 않았다. 아무리 아파도 말이다. 아내 역시 출산으로 미국 병원이라는 것이 뭔지를 구경했지, 그외는 1년 365일 한 번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는다. 어찌보면 좋은 일일지 모른다. 한국에서는 조금만 불편하면 병원에 찾아가는데, 여기서는 의료비가 너무 비싸기때문에 보험이 있어도 왠만해서는 약국에서 약 사먹는게 더 낫다. 한국 산부인과에서는 30만원이면 아주 시설 좋은 병원에서 아기를 출산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엄청나게 비싼 보험을 사고도 자연 분만일 경우 최소 200만원은 있어야 아기를 출산할 수 있다.

또 딱히 병원에 간다고 해도 별 다른 효과를 보는 것도 아니다. 뻔하다. 몇 개 유명한 비처방전 약품들을 사먹는게 낫다. 결국 미국의 의학이라는 것은 신약 개발과 의료 장비 업체의 기술 진보에 의해서 발전하는 것이지, 다른 데 기인하는게 아니다. 그래서 차라리 의사 친구보다는 약사 친구를 두고 약을 상담하는게 백번 낫다는 생각이 든다. 전에 한 번은 아내가 임신 중 고열과 몸살이 너무 심해 밤에 응급실을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응급실이라는게 가서 접수하고 병실이 날 때까지 무조건 기다려야 한다. 그런데 기다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 몇 시간동안 추위에 떨면서 더 병이 도질 것 같아 그만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 다시 말해 미국 응급실은 우리나라 응급실 모습 — 야전 병원마냥 커텐으로 둘러싸여 온갖 환자들의 신음 소리와 처절한 모습들을 볼 수 있는 阿鼻叫喚의 응급실 — 과는 전혀 다르다. 미국 병실은 정말 호텔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아비규환의 한국 응급실 문화가 더 낫지, 호텔식 미국 병실 문화는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치나 마찬가지다. 죽기 일보 직전이 아니면 빈 방이 날 때까지 최소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게 미국의 응급실이다. 기다리는데 지쳐서 집에 와서 쉬는게 낫다고 생각해서 집에서 쉬면 차라리 더 병세의 차도를 볼 수 있는게 바로 미국 응급실 문화이다.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이 글에 나오는 사실들을 알 필요가 있다. 돈 없으면 죽어야 하는 미국 현실을 안다면, 우리나라 의료보험료가 비싸다는 불평은 거의 사라질 것이다. 현재의 건강보험 대신 개인이 직접 가입하는 사보험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이런 글은 널리 널리 알려야 한다.

밑에서 본 세상에 번역되어 있는 텍사스의 상심이라는 글에도 미국 의료 현실에 대한 약간의 정보가 있다. 아래와 같은 구절이 그렇다.

내 담당 의사는 지역사회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다. 그 여성은 A J 크로닌 같은 의사다. 가난한 이들에게 제대로 된 의료혜택과 영양식을 제공하려고 있는 힘껏 애쓰는 이다. 주류를 이루는 종교가 자신의 정치적 수사(공세적이며 경멸스런 텍사스 정치가 필 그램, Phil Gramm)처럼 반지성적인 (성서 지대 침례교, Bible Belt Baptist) 주에서 이런 의사가 어떻게 자식들을 교육시킬지 걱정된다. 그 이는 단호하게 건강유지기구(HBO, 저소득층 등을 위한 의료보험 단체. 미국은 의료보험이 모두 사보험임 = 옮긴이)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그 이의 보험료를 계속 올리고 있다. 보험회사들이 이 기구를 소유하고 있다. 이 기구는 사람들이 지불할 수 있는 한 어떤 수준의 의료보장도 제공한다. 내 친한 친구는 최근에 이 사실을 쓰라린 경험을 통해 알게 됐다.

우리의 학교는 자랑할만한 것이 못된다. 휴게실에 코카콜라의 자동판매기를 놓는 댓가로 돈을 받는 몇 안되는 학교다. 나머지는 다 빼자. 자영업을 하는 손재주 좋은 내 친구들 가운데 의료보험을 감당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다. 지역 슈퍼마켓은 쇠사슬톱이 있으면 쓸 수 있는 `자가 봉합 도구(self-sewing kits)’를 판다. 내 친구 하나는 최근에 스스로 상처를 잘 꿰맸다. 그리고는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어느 돌팔이 의사도 이보다 더 잘하지는 못할 것이다.(중략)

요 전날 나는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한 여성과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몸의 못을 비교했다. 그 여성은 생계를 위해 말똥을 치우지 않고 나도 더 이상 돈벌이를 위해 기타를 연주하지 않는다. 그 여성은 간호사였고 13살짜리 자식과 지내기 위해 휴가를 얻었으며 가끔 말을 탄다. (말 타는 것은 텍사스에서는 부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다. 여기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당신이 훈련시켜주면 좋아한다.) 그 여성은 월급 때문에 이 지역에서 일하지 않고 오스틴에서 간호사일을 한다. 나는 아직 이 지역에 남아있는 (5개가 남아있다) 병원들이 너무 엉망이라고 말했다. 그 이는 묘하게 웃었다. 이 지역에서 건강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한가지 계약이 있다. ‘병원에 가기보다는 서로를 찾아간다.’

나는 내가 영국에서 돌아온 직후 부인을 병원에 데려갔다가 수준이 너무 엉망인 것에 크게 놀랐다고 이 간호사에게 말했다. 영국 사람들은 미국의 병원이 모두 ‘응급실’(ER, 유명한 미국 연속극 = 옮긴이)같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여성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곤 비슷하지도 않아요라고 말했다. 그 여성은 그 연속극을 못 본다. 웃음이 나와서. 절망하게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