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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착취물이 불법 제작·유포된 일명 N번방 사건에 대한 청와대 국민청원이 역대 최다 동의를 기록하며 전국민적 분노로 표출되고 있다. 범죄의 잔혹성 뿐 아니라, 많게는 수십만 명이 이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
N번방 사건은 소라넷, 불법촬영, 웹하드 카르텔 등 계속된 공론화에도 불구하고 수천, 수만 개의 모습으로 부활하여 반복되고 있는 성폭력 역사의 일부다. 따라서 발본색원과 강화된 처벌 뿐 아니라, 정치·사회·경제 모든 영역에서 성평등이 제대로 구현되어야 이 역사를 끝낼 수 있다.
다시는 이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우리는 다음의 요구를 밝힌다.
첫째, 가해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과 피해자 회복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적절한 처벌이 없다면 또 한 번 사회가 성폭력을 관용하고 심지어 방조하는 셈이 될 것이다. 정부와 국회는 사건이 반복될 때마다 늘 엄벌을 말해왔지만 현실화되지 않아왔다. 앞다퉈 처벌 강화를 외치는 정치권의 호언장담이 안심되지만은 않는 이유다. 이번에야말로 불법 촬영물의 창작·유포·소비·소지를 제대로 금지하여 죄에 적합한 처벌을 한다는 최소한의 상식이라도 반드시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 특히 성폭력 ‘산업’으로 이윤을 얻는 수익구조의 공급자들을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가해자들 중 의료인처럼 빈번한 신체접촉이 이뤄지는 직종 종사자가 있다면 이에 대한 분명한 조치도 취해져야 한다.
또한 우리는 보건의료인으로서 성폭력 사건의 해결이란 무엇보다 피해자의 치유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국가는 피해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회복에 중점을 두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
둘째, 성폭력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 향상이 필요하다.
최근 핵심 가해자가 공개된 후 신상털이식 보도가 본질을 흐리고 있음을 우려한다. 악마 같은 일부 가해자의 일탈행위를 처벌한다는 식의 대응으로는 수많은 또 다른 N번방 사건의 등장을 막을 수 없다. 성범죄는 비정상적 특정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성의식이 도처에 팽배한 이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특정 가해자집단에 대한 도려내기 식 대응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반성폭력 인식 향상을 꾀해야 한다.
언론은 가해자와 피해자 개인의 특성에 초점을 맞추는 비본질적 보도를 지양해야 하고 사회적 해결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국회와 사법당국은 더 이상 디지털 성폭력을 ‘음란물’로 가볍게 취급할 것이 아니라 타인의 신체와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폭력’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 교육당국은 청소년들이 가해행위에 나서는 충격적 현실을 조금이라도 해결하려면 필수교육에서부터 충분한 반성폭력 교육이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셋째, 여성차별을 근절하고 여성인권을 높여야 한다.
여성의 몸을 성적 소비의 대상으로, 출산의 도구로만 취급하며 이등시민으로 대해온 사회가 성폭력의 제반 조건이 되어 왔다. 사회경제적으로도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최악의 성별 임금격차를 보이는 나라다. 이번 사건도 피해자들 상당수가 저소득 취약계층인 것이 범죄에 노출된 된 배경이 되었다. 또한 온전한 임신중지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해온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온전한 권리란 있을 수 없어왔다. 사회적 차별이 혐오와 멸시로, 또 그것이 성폭력 범죄로 이어지는 연쇄 고리를 끊지 않으면 불행히도 이런 문제는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성차별적 발언을 일삼아온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들, 그리고 불평등한 운동장을 만들어온 이 사회의 기득권세력은 문제 해결사를 자처할 것이 아니라 반성부터 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라는 수많은 여성들의 외침에 따라야 한다.
생존이라는 기본선을 지키기 위한 여성들의 절박한 외침이 모여 커다란 변화를 만들고 있다. 여성들은 이 야만스런 상황에서 해방되어 온전한 삶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우리 보건의료인들은 이 길에 연대하며 성폭력 근절과 여성인권의 향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