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정의’에 입각한 다른 세상만들기

‘젠더 정의’에 입각한 다른 세상만들기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리포트 4] 여성
2004-02-26 오전 9:08:48  

  ‘젠더 정의’에 입각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참가한 사람이라면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어너더 월드 이즈 뽀시블”)라는 구호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세계사회포럼에서는 크게 들리지는 않았지만 중요하기로는 이에 못지 않은 또 하나의 외침이 있었다. 그것은 “젠더 정의(Gender justice)에 입각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외침이었다.
  
  세계여성행진이 주최한 워크샵은 비록 아주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구적 차원에서 볼 때 21세기의 두 가지 큰 행사는 <세계여성행진>과 <세계사회포럼>“이라고 말함으로써 세계사회포럼과 세계여성행진을 나란히 놓았다. 세계화, 사유화, 군사화에 대한 반대와 대안 모색이 이번 세계사회포럼의 주된 주제라고 볼 수 있지만, 그곳에 온 10만의 사람들은 다양한 억압과 사회적 모순에 반대하는 주체들로 세계사회포럼에 참여하였다. 중국 정부의 탄압을 받고 있는 파룬궁도 한 부스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성(젠더와 섹슈얼리티)을 주제로 한 다양한 워크샵, 패널토론, 포럼, 행진 등이 있었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임을 상징화한 포스터. ⓒ녹색연합  

  여성/성을 주제로 한 다양한 의제들
  
  여성과 성을 주제로 한 워크샵, 포럼, 토론은 다양했다. 여성과 전쟁, 여성과 세계화, 여성의 인권, 성매매와 성노동, 카스트와 여성, 물과 여성, 트랜스젠더, 동성애, 여자태아살해, 민족주의/종교근본주의와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주제들이 있었고 행진, 토론, 발표, 영상편지 등 그 접근방식도 다양했다. 참여한 단체들 또한 다양했다. 몇 단체들만 이야기하자면 <여성매매에 반대하는 지구적 연대>, <아시아여성들의 인권협회>,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팔레스타인센터>, <전쟁에 반대하는 검은 옷을 입는 여성들> <타밀나두 여성연합> <세계여성행진>, <로자룩셈부르크재단> 등을 들 수 있다.
  
  전쟁과 군사화와 여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중집회, 포럼, 토론, 워크샵 등이 이루어졌다. 그 중 하나로 <로자룩셈부르크재단>이 주최한 비디오 상영과 패널 토론이 있다. “젠더와 영구전쟁”을 주제로 한 이 토론은 전쟁과 세계화에 대한 ‘영상편지’로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는 헤게모니를 잡으려는 세계화에 입각한 전쟁이 양성간의 가부장적 관계를 악용한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강간이 전략적 도구로 사용된다는 점 또한 강조되었다. 또한 계속되는 전쟁상태에 놓여 있는 지역에서는 폭격과 강간만이 문제가 아니며, 서구중심의 신자유주의의 배제와 영입의 논리가 전쟁을 통해 계속 구조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전쟁을 겪고 있는 곳이 아니더라도 세계화 과정은 매일 매일의 일상을 전쟁으로 만들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실제로 여성에게는 평화시와 전시 둘 다 차별과 폭력의 시간이다. 군사화의 주된 특징이 폭력이고 폭력이 증대되면 젠더에 기반한 폭력의 수위가 높아진다.
  
  ”여성들에게는 일상이 전쟁터”라는 사실은 사회포럼기간 동안 남아공 대표단에서 일어난 강간사건이 단적으로 보여 준다. 여성들은 가부장적 세계화와 군사화에 대해 싸우는 것 이상으로 일상의 가부장제와 싸워야 함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예를 이번 사회포럼에서 볼 수 있었다. 사회포럼 행사장에서는 몇 개의 무대에서 계속 연극이나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이 거리의 무언극에서 코카콜라의 수탈에 신음하는 인도 민중을 두 여자아이가 상징하고, 코카콜라를 상징하는 큰 남자의 양팔에 잡혀가는 그 여자아이들을 몸집이 좀 큰 청년이 구한다. 여성은 여전히 수동적이고 남성은 영웅이 되는 연극이 사회포럼의 장에서 비판의 소리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아이들과 남편을 첩첩이 업고 있는 포스터. 여성의 고달픈 이중노동을 상징화하고 있다. ⓒ녹색연합  

  “지구적 연대조각이불”과 여성주의
  
  다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성주의적 시각이 필요하다. 다른 세상을 위한 초안을 제안하겠다는 주장을 여성주의 행동을 위한 지구적 차원의 네트워크인 <세계여성행진>이 하고 나섰다. 1백63개국, 6천여 여성단체가 지원하는 이 기획은 가부장제를 해체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2005 세계행동’을 준비하고 있다. 여성주의 가치에 입각한 다른 세상을 위한 헌장을 만들겠다는 기획을 한다. 그리고 이 대안적 헌장을 국제기구(UN, IMF, 세계은행, WTO), 각국 정부, 사회운동단체 그리고 각각이 소속된 공동체에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지구적 차원의 릴레이 행진을 조직하고, 거대한 지구적 연대 조각이불을 만들며, 24시간 여성의 지구적 연대행동을 조직(2005년 10월 17일)하기로 되어 있다. 여기서 관심이 갔던 부분은 지구적 연대를 상징하는 연대조각이불만들기이다. 필자가 연구원으로 있는 연구소에서도 여럿이서 함께 헝겊 조각을 이어 만든 조각보로 깃발을 만들어 반전시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여성의 노동, 그리고 ‘매매춘’
  
  조각이불이 상징하듯이 여성의 노동은 남성의 노동과 그 성격이 다른 경우가 많다. 현재 노동에 대한 정의와 노동운동은 남성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노동이 남성의 노동과 어떻게 다르며 여성들의 노동자조직,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인식은 그 범위가 어디까지여야 할지 그동안 여성주의자들이 고민해 왔다.
  
  이런 고민의 선상에서 필자는 인도의 SEWA(스스로 고용된 여성 조직)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번 사회포럼에서 그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노동으로 만든 조각이불, 옷, 스카프 등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와가 포함된 지구적인 차원의 가내노동자연대조직인 HomeNet에 대해 더 상세하게 알게 된 것이 이번 세계사회포럼 참여의 수확 중 하나다.
  
  여성의 노동은 남성들이 중심이 되는 대단위 사업장의 노동만이 아니다. 비정규직이라 이름하기도 힘든 가내노동들. 그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연대하고 있는 HomeNet은 노동운동사와 여성노동운동사에서 하나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포럼에 왔던 달릿(인도의 불가촉천민) 여성들의 운동이 본격화된다면 여성들의 노동의 문제는 가사노동을 포함하여 새로운 정의를 요구하는 수준으로 가게 될 것이다.
  
  ’매매춘’을 성매매로 볼 것인지 성노동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는 또 다른 지점에서 여성의 노동을 생각하게 한다. 여성들이 성적 착취의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성매매의 현장에서 성노동자(sex-worker)들의 조직(co-operative)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 또한 이번 인도에서 더 직접적으로 보게 되었다. 동남아에서 이런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는데, 콘돔을 사용할 권리와 질병들에 맞설 수 있는 권리를 찾겠다는 성매매 당사자들의 움직임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는 움직임이다.
  
  자본과 노동력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세계화의 과정에서 이주노동자여성들의 상당수가 성산업이나 성매매에 종사하게 되거나 인신매매의 수준으로 성적 매매의 피해자가 되는 현실에서 ‘성노동자’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가부장제에 대한 싸움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지점이다. 사회포럼에서는 경제적 착취와 성적 착취가 중첩된 형태인 여성들의 인신매매와 성노동의 문제가 동시에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뭄바이 세계사회포럼에서 활짝 웃고 있는 여성들. ⓒ녹색연합  

  “경계의 벽을 허물고, 다리를 놓으며”
  
  사회포럼은 다양한 주체들의 장이었고 사회운동의 다른 지점들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포럼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토론 중 하나가 “경계의 벽을 깨고, 다리를 놓으며”라는 포럼이다. 여성-노동-게이․레즈비언-불가촉천민(Dalit) 운동 사이의 장벽과 소통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자리였다. 서로의 진영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요구하거나 하면서 진행된 이 포럼은 여성, 노동자, 성적 소수자, 그리고 카스트제도에 억압당하는 인도 불가촉천민이라는 각각 다른 정체성 사이의 문제에 접근하려 한 시도였다.
  
  서로가 최종심급이 다른 진영의 운동들이 어떻게 이야기의 물꼬를 트고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그리고 때로는 연대해야 하는 상황들을 점검해 본다는 시도는 지구적 차원에서 그리고 한 국가의 차원에서도 계속 시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계사회포럼 행사장에서 필자와 함께 간 친구들은 성별/연령/국적/인종이 다른 다양한 주체들에게 “당신에게 페미니즘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터뷰를 하였다. 그를 통해 다양한 문제를 안고 온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티벳의 독립을 위해 온 티벳 승려들에게도, 워크샵을 기획한 페미니스트들에게도, 거리에서 만난 인도 사회학교수이며 신부에게도, 인도네시아에서 온 연인들에게도, 대안언론운동을 하는 여성에게도, 설치된 부스에서 물건을 파는 여성에게도 페미니즘에 대해 물어 봄으로써 여성과 성문제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마련하였다.
  
  행사장 바깥에는 도시의 소음 속에 먹을 것을 사기 위한 돈을 달라고 손을 벌리는 아이들, 아이를 안은 여자들, 택시사이를 누비며 구걸을 하는 사람들, 흙먼지에 덮인 누더기로 만들어진 집들의 행렬들, 댐공사에 밀려나 고가도로 아래서 그냥 살고 있는 가족들이 있었다. 세계사회포럼을 비판하는 일부 사회주의자 그룹은 ‘뭄바이리지스턴스’ 라는 별도의 행사를 열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가부장적 플롯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행사장 바깥의 빈곤과 가부장성은 여성주의적 주체들이 싸워내야 할 문제들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때로는 다른 부문과의 연대를 필요로 한다.
    이중노동으로 고통받고 있는 여성. ⓒ여의연

  지구적 차원의 의제와 연대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개인적인 것은 지구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즘의 구호는 인도에서의 세계사회포럼 장 안과 밖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다시 한번 생각나는 구호다. 반세계화에서 출발하여 이제는 대안적인 세계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발전해나가고 있는 세계사회포럼은 일국의 문제를 바탕으로 그 경계를 넘어 지구적 차원에서 의제를 발견하고 만들어 나가는 장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잘 다듬어 갈 장이라 생각한다.
  
  그런 장이 되기 위해서 아직은 좀 더 다양한 여성주의적 의식에 입각한 젠더 정의를 실현할 장이 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여성주의자들 스스로가 그 장을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문제와 관련된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의 모습이 세계화와 군사화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지구적 차원에서 연대해야 할 사안들은 많다. 그런 사안들을 논의할 지역적 모임들도 있지만 그것을 또 더 확대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한 자리에 여러 사회운동 단체들과 개인들이 모인다는 점에서 세계사회포럼은 지구적 문제를 의식하는 장으로서 그리고 지구적 연대를 기획하는 장으로서 가치가 있는 공간이다. 자본과 노동력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있는 세계화 과정에서 여성들 또한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를 안게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역운동이 단단해 져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구적 차원의 의제들을 만들고 분쟁을 해결하려는 의지 또한 함께 다져야 할 것이다.  

고정갑희/<여/성이론> 발행인,한신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