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벡의 반자본주의 시위 / 이정구
미국 대통령 조지 W.부시를 포함한 미주 대륙 34개국 정상들이 지난 4월 20∼22일 캐나다 퀘벡에 모여 2005년 말까지 미주자유무역지대(FTAA)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했다. 미주자유무역지대란 나프타(NAFTA : 북미자유무역협정)를 중남미에까지 확장하려는 시도다.
캐나다 총리 장 크레티엥은 “민주주의 조항이 미주자유무역지대를 포함해 미주 정상회의에서 논의되는 모든 사항에 적용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민주주의 원칙이란 노동자 인권 보호 등 “민주주의의 기준”에 못 미치는 국가에는 자유무역의 혜택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크레티엥 총리의 말대로 민주주의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FTAA에 속할 나라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FTAA의 수장 노릇을 할 미국의 조지 W 부시가 가장 비민주적이다. 그는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 합의한 교토의정서를 헌신짝 버리듯 내던져 버렸다.
미국은 인종 차별 경찰이 무고한 흑인을 살해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경찰은 로드니 킹을 두들겨 패서 LA 폭동의 원인이 됐고, 그 뒤에도 흑인 아이티 이주자 아마도 디알로가 경찰의 총에 죽음을 당했다.
인종 차별 경찰은 최근에는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시에서 19세 청년 티오시 토마스를 죽였다. 지난 1995년 이후 신시내티에서 경찰이 죽인 흑인은 자그마치 15명에 이른다.
사실, 부시 자신이 표를 훔쳐 대통령에 당선됐다. 개표 부정으로 떠들썩했던 마이애미의 영아사망률은 “비민주적 국가”라는 이유로 FTAA에서 제외된 쿠바의 영아사망률보다 더 높다.
지난 4월 2일 오타와의 대외관계 및 국제무역국(DFAIT)에 모인 5백여 명의 시위대는 이번 FTAA 회의가 다룰 내용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내용이 공개돼 대중적 판단이 이뤄지기를 바랐다.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한 34개국 정상들은 협정서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러한 나라의 정상들이 모여 민주주의 운운하는 것은 완전한 위선이다.
FTAA
FTAA가 출범한다면 나프타에서 나타나는 폐해를 미주 전역으로 확대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프타가 시행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처음의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나프타를 통해 미국에서 매년 20만 개의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지난 7년 동안 오히려 76만여 개의 일자리가 줄어들었다.
멕시코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998년 임금 노동자들의 수입은 1991년에 비해 25퍼센트나 하락했다. 1990년대 전체로 봤을 때 멕시코 노동자들의 구매력은 절반으로 하락했다. 멕시코와 미국 접경 의 자유 무역 지대에서 고용이 급증하긴 했지만,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 복지 혜택, 노동 기본 권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자유 무역 지대는 혹사 공장으로 알려져 있다.
캐나다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자리 상실이 수일자리 창출보다 많았다. 그리고 캐나다 정부는 나프타 시행 이후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공공지출을 줄여, 실업보험 급여가 1990년의 75퍼센트에서 2000년 36퍼센트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기업과 부유층에 대한 세금 감면 때문에 소득 불평등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
한 마디로 나프타 시행 7년 동안 부자들과 다국적 기업들은 큰 이득을 챙겼지만 대다수 민중의 삶은 더 형편없어졌다. 이제 다국적 기업들과 각국 정상들은 나프타의 실패를 미주 대륙 전체로 확대하려 하고 있다.
FTAA는 환경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그린피스와 지구행동네트워크 같은 환경 단체들은 유전자조작식품, 생명공학의 위험성 등을 다루는 팻말을 들고 이번 퀘벡 항의 시위에 참가했다.
미국 녹색당의 활동가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자유 무역’은 환경을 희생시켜 자본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무역 협정은 비민주적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통과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이번 퀘벡 시위는 환경 파괴를 세계화라는 더 광범한 쟁점과 연결시켰다. 캐나다 공공부문 노조(CUPE)의 환경위원장인 자크 코르도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권리와 환경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FTAA는 노동자와 환경에 대한 공격이다. FTAA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자본주의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전 세계적 의제다. 그들은 미주 지역에서 이룬 ‘성과’를 전세계로 확대시킬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퀘벡 시 거리로 이토록 많이 뛰쳐나왔다.”
제2의 시애틀
미주 정상회담이 열렸던 퀘벡 시는 완전한 계엄 상태였다. 퀘벡 시 공공안전 장관인 세르쥬 메나르는 퀘벡 시 미주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당신이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인용했다.
이번 회담을 위해 퀘벡 시는 시위대의 규모에 따라 5천에서 8천 명에 이르는 경찰을 미주 정상 호위용으로 대기시켰다. 그 가운데 8백 명은 시위 진압 경찰이었다. 경찰들은 5천 달러짜리 방탄복을 입었으며, 정상회담이 열리는 지역 전체를 둘러싸기 위해 3.8킬로미터 바깥에 안전 구역을 설치했다. 담장은 콘크리트 벽으로 10피트 높이에 2인치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미주 정상들은 이런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무엇을 했는가?
4월 21일 밤에는 장 크레티엥 총리가 주재하는 “문화 공연과 저녁 만찬”이 열렸다. 150만 달러가 들어간 이 만찬은 캐나다의 대기업인 스코티아뱅크와 알칸이 후원했다.
정상회담장은 모든 것이 판매용이었다. 회의 주최은 미디어 센터 이용에 70만 달러, 미주 전시회에는 50만 달러, 세계 지도자 환영 만찬에는 50만 달러, 점심식사에는 20만 달러를 내도록 했다. 기업들이 커피잔에 자기 기업의 이름을 넣으려면 7만 5천 달러를 내야 했다. VIP용 선물을 조금 사려면 10만 달러가 필요했다.
돈만 있으면 이러한 행사에 참가할 수 있었다. 후원 기업들은 “교류 행사”에 초대를 받았으며, 만찬에서도 “우대석”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4킬로미터 떨어진 담장 밖에 있어야 했다. 정상회담이 진행되는 곳의 분위기와 4킬로미터 바깥 담장은 FTAA 출범을 위한 정상들의 회담이 돈 많은 부자들만의 행사라는 것을 잘 보여 준다.
하지만 이번 미주 정상회담도 3만 명이나 되는 항의 시위자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북미의 자본가들은 퀘벡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에 사태가 자기가 바라는 바대로 전개되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들은 이번 정상회담의 의제들이 “회의장에서 논의되지 못한 채 항의 시위자와 경찰 사이의 거리 전투로 전락”하는 것을 가장 우려했다.
3만 명의 다양한 항의 시위자들은 퀘벡을 제2의 시애틀로 만들었다. 이제 각국 정상들과 다국적 기업경영자들은 세계화하고 있는 반자본주의 항의 시위 때문에 항상 이런 걱정에 시달려야 할 판이다.
FTAA의 장애물
FTAA가 출범하는 데에는 장애물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미주 국가들 간에 벌어지는 무역 분쟁이다. 캐나다와 브라질, 캐나다와 미국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무역 분쟁은 FTAA가 순조롭게 출범하지 못할 것임을 예고한다. 원료와 시장을 놓고 각국 다국적 기업들의 이해관계는 첨예하게 대립돼 있다.
두번째는 협정에 대한 대중의 반대가 거세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멕시코 사파티스타 행진이 잘 보여 주었듯이, 나프타에 대한 반감은 대중적이었다. FTAA 반대 활동가들은 ‘FTAA = NAFTA+WTO’라고 부르고 있다.
이번 퀘벡의 반자본주의 시위에 참가한 한 콜롬비아 활동가는 “FTAA에 대한 당신의 저항은 당신의 나라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콜롬비아 민중은 다국적 기업의 힘이 증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잘 알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는 현재의 콜롬비아 정부를 전폭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콜롬비아는 1980년대 니카라과 혁명을 파괴하기 위한 반동적인 전쟁이 벌어진 뒤 가장 큰 무기 시장이 됐다.
북미 기업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콜롬비아에서 지난 2000년에는 노조원 129명이 살해됐다. 또, 175명의 노조원이 살해 위협을 받았으며, 21명은 납치됐고, 17명은 실종됐다.
FTAA 출범이 낳을 결과를 현재의 콜롬비아가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