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극복도구는-시민통제가능한 국가

이냐시오 라모네 vs 홍세화

△ 23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이냐시오 라모네(왼쪽)와 홍세화 기획위원이 대담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5월말 대산 문화재단 심포지엄, 스크린쿼터 영화인대책위 시민연대 초청 강연, 고대 100주년 기념 강연 등이 겹치면서 세계적인 석학과 문호가 잇따라 방한합니다. 이를 계기로 <한겨레>는 24일부터 6차례에 걸쳐 ‘세계 지성과의 대화’를 마련합니다. 이냐시오 라모네에 이어 은구기 와 시옹오, 하스미 시케히코, 베이다오, 루이스 세풀베다, 가라타니 고진이 차례로 대화의 자리에 앉습니다.

“미디어기업 세계화 등에 업고 가진자 편들어”

홍-선출아닌 권력 IMF·WTO가 국제 표준

라-전세계 장애없이 다니는건 돈·바람뿐

프랑스의 국제문제전문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주필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에 비판적인 입장의 대표적 논객인 이냐시오 라모네(62)가 문화다양성의 날(5월21일)을 맞아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대책위원회’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 파리7대학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로 지정학과 국제전략에서 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전문가이기도 한 라모네는 <커뮤니케이션의 횡포> <21세기 전쟁> <소리없는 프로파간다>등을 저술했다. 23일 오전 국회에서 홍세화 기획위원과 만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문제, 문화다양성과 언론의 위기에 대한 대담을 했다.

홍세화=역시 가장 큰 관심은 세계화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며, 대안세계화운동이 현재 어느 자리에 와있는가, 과연 대안세계는 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라모네=세계화의 가장 큰 특징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시장의 대립, 공공적인 것에 대한 사기업적인 것의 대립, 개인과 집단의 대립, 연대와 이기주의의 대립이다. 이 과정에서 경쟁력이 모든 걸 결정하게 되고 그 결과로 공공서비스의 자리는 없어진다. 교육, 보건, 문화 분야도 상품처럼 취급되면서 결국 세계화는 모든 것을 상품화한다. 언어와 우리의 몸까지도 말이다. 지금 여러 지역에서 반세계화 움직임도 커지고 있다. 브라질의 룰라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아르헨티나의 키츠너 정권 등 세계화의 피해가 가장 컸던 라틴 아메리카의 시민들이 세계화에 저항하는 정부를 세웠다. 이렇듯 새물결이 일어나는 건 사실이지만 당장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을 바꾼다는 건 힘들다. 이제 WTO, IMF 등이 주도한 세계화는 국제적 표준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홍-세계화 극복 도구는 민족주의인가?

라-답은 국가다, 단 시민 통제 가능한

홍세화=라틴 아메리카의 반대운동이 정부 차원에서 일어난 건 세계화의 피해가 무척 심했던 대표적 지역이었고 유럽은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은 세계화 피해가 가중되는 상황에서 구성원들이 문제를 느낄 만한 수준의 의식이 담보되지 못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세계화의 부정적인 면이 앞으로도 가속화될 수밖에 없지 않나.

라모네=유럽인들의 의식도 현실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발전한 것이다. 고용불안, 공기업의 사유화, 공공서비스 와해 등을 통해 노동시간이 연장됐고 사회보장제도가 무너지는 상황이 확대되면서 말이다. 그런 현상을 보면서 사람들은 일개 국가의 단독 정책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아니라 그 뒤에 이를 관장하는 논리, 즉 IMF나 WTO, 세계은행 등이 만들어낸 세계화 정책을 정부가 받아서 수행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 사이에 시민단체나 미디어들도 여론을 환기하는 역할을 했다. 한국 역시 정당이나 정부는 차치하고 미디어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할 수만 있어도, 즉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이야기해줘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의 미디어의 역할은 더 크고 세계화와의 싸움에서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홍세화=사회구성원의 의식이 성숙되지 못한 상태에서 미디어에 기대할 수 있을까. 미디어란 결국 사회의 반영인데 한국 상황에서 매체가 이 문제를 충분히 제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 이냐시오 라모네

홍-스크린쿼터 미 문화 삼투압 저지

라-영화 붕괴되면 음반·공연 도미노

라모네=미디어나 정치에 기대할 수 없다면 세번째 방법으로 학계나 지식인, 예술가들이 여론을 환기시킬 수 있다. 교육이나 보건마저 세계적으로 상품화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은 문화의 보호는 매우 중요한데 한국은 시청각 분야에서 이런 운동이 깊숙이 관련돼있음을 알고 있다. 감독, 배우들이 스크린 쿼터나 문화다양성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문화계 운동을 확대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홍세화=최근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은 정부가 아닌 시장이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가진 함의에 대해 기성 언론은 크게 다루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라모네=권력이 정책결정자가 아닌 세계화의 지배 아래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대통령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게 놀랍다. 그렇다면 세계화를 움직이는 건 무엇인가. 자본과 돈이다. 현재 전세계를 장애없이 돌아다니는 건 바람 말고는 돈, 즉 금융 뿐이다. 매일 세계에서 움직이는 자본만 2조5천억 달러에 달한다. 외환 보유고 최고국인 일본이 가진 돈이 1400억 달러인데 이에 비하면 자본의 움직임 규모는 엄청난 거다. 이제 국민이 직접 선출한 권력의 입지가 줄어들고 국민이 뽑지 않은 기구들, WTO, OECD, IMF 등이 권력의 핵심이다. 미디어 역시 세계화 흐름 속에 놓여 있는 게 전세계적 상황이다.

홍세화=지금 유럽이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관심이 크다. 오는 29일 프랑스에서 진행될 유럽헌법 찬반 투표의 최근 여론조사에서 53:47로 반대가 우세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약 반대가 승리했을 때 세계화 흐름은 멈칫할 텐데 그 다음 상황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보는가. 이를테면 ‘유럽 사회모델(유럽 소시알)’의 진전이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인가.

홍-위기상황 종이매체 돌파구는…

라-진실일까 거짓일까 의심 없게 해야

라모네=개인적으로 ‘유럽 소시알’을 기대하지만, 지금은 극단적 자유주의 대세가 팽배하다. 유럽헌법이 거부된다면, 우리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오는 것이다. 유럽헌법에는 사회문제에 대한 작은 조항들이 있지만 결국 신자유주의의 큰 흐름을 담고 있다. 이 법안은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에서도 거부 가능성이 크고 체코, 폴란드도 거부할 수 있다. 염두에 둬야 할 건 반대를 던진 사람들이 유럽연합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라 지금 준비되는 것과 다른 연합체를 바라는 것이다.

홍세화=지금 문화 다양성과 관련하여 유네스코에서 협의중인데, 한국은 초안 작성국인데도 미국과 경제부처의 입김 때문인지 뚜렷한 입장을 내지 못하고 있다. 문화적 예외, 문화적 다양성과 관련해서 한국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스크린쿼터제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싸움이 진행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과 그것의 중요성을 독자에게 전해달라.

라모네=문화야말로 민족의 정체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스크린쿼터제는 매우 중요하다. 이탈리아, 독일, 포르투갈 등 스크린쿼터제를 유지하다가 포기한 국가의 영화산업은 사장됐다. 특히 영화산업은 많은 관련 문화산업을 아우르기 때문에 영화산업의 붕괴는 출판, 음반, 공연 등 다른 문화계의 파산을 가져온다. 프랑스는 스크린쿼터보다 더 강력한 과세정책을 세워 국가를 막론하고 모든 영화 입장권 수익의 10%를 영화지원기금으로 사용한다. 라디오에서도 프랑스 음악인 샹송을 40% 이상 틀도록 법으로 정했고, 출판서적의 할인판매를 막아 문화는 다른 상품처럼 취급될 수 없다는 이념을 관철시켰다. 이런 문화시장 보호정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미국의 문화침투에 자연히 흡수될 수밖에 없다.

홍세화=프랑스에서 유독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협의가 이뤄지고 정책수립이 가능했던 배경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라모네=예술가들이 좌파나 우파같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합의를 봤다. 감독, 배우부터 가수, 음악가까지 예술가들이 공통된 입장을 가졌다. 예를 들어 오데옹 극장에서 배우 잔느 모로 주최로 모든 예술인들 연좌 데모를 벌여 “문화는 상품이 아니다”,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홍세화=연초에 당신도 사설에도 썼지만 종이매체의 위기상황이다. 인터넷, 무가지의 번성 같은 물적 조건도 있지만 ‘정보’(information)의 개념 자체도 변화했다. 한국 신문시장은 거의 광고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공식적으로 경영비용의 80% 이상이 광고료인데 실상은 거의 광고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이런 상황과 관련해 <한겨레>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종이매체의 올바른 길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라모네=독자들은 신문사가 정보를 독자에게 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독자들을 광고주에 파는 것이다. 신문사로서는 독자가 많으면 광고 수주에 유리하기 때문에 기사는 점점 더 쉬워지고 짧아지고 선정적이 된다. 그리고 무료배포까지 한다. 세상은 점점 복잡해지는데 기사는 점점 짧고 간단해지니 허위정보도 늘어난다. 요새 시민들은 정보불안 시대를 살고 있다. 전세계 언론의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보도에서 보듯 미디어 정보를 받아들이며 이게 진실일까 거짓말일까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다. 대안으로 신문의 전문성을 강화하는 길밖에 없다. 검증된 기사, 엄격한 기준으로 신뢰할 만한 기사를 제공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정리·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