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범죄 : 터스키기 매독 연구 (Tuskegee Syphilis Study)
1997년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휠체어에 탄 백발의 노인들에게 미국 국민을 대표하여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였다. 그것은 1932년부터 시작하여 40년 동안 행해진 의학 역사상 최악의 임상시험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사과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실험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생존자 중 5명만이 이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 터스키기 매독 연구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인종차별의 극한을 볼 수 있는 끔찍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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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 : 나무늘보
개요
공중위생국(Public Health Service, PHS) 매독 연구로 잘 알려진 터스키기(Tuskegee) 매독 연구(1932~1972)는 앨라배마 터스키기 주변에 거주하는 400명의 가난하고 대부분 문맹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소작농들을 대상으로 수행된 매독의 자연적 진행경과와 그것의 치료에 대한 임상연구였다. 이 연구는 피실험자들에 대한 적절한 치료절차도 없이 수행되었다는 사실로 악명높았으며, 이 때문에 임상 연구에서 환자들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한 중요한 변화들이 만들어졌다. 터스키기 매독 연구의 대상이 된 개인들은 환자동의서(informed consent)를 주지도 않았고, 자신들의 병명에 대한 진단을 듣지도 못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이 “나쁜 피”를 갖고 있다고 전해 들었고 무상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1947년에 페니실린은 매독에 대한 표준적인 치료법이 되었다. 이러한 발견 이전에 매독은 만성적이고,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질병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터스키기의 과학자들은 페니실린으로 모든 매독환자들을 치료하고 연구를 종료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이 질병이 어떻게 퍼지고 사람을 죽게 하는지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페니실린의 사용과 그것에 대한 정보를 그들에게 제공하지 않았다.
이 지역의 다른 사람들은 이용할 수 있는 매독 치료 프로그램을 피실험자주1들은 이용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 연구는 1972년 언론에 알려질 때까지 계속되었고 윤리적, 도덕적인 문제로 중단되었다. 터스키기 매독 연구는 미국 임상연구에서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에 대한 가장 큰 윤리적 위반의 사례 중의 하나로 자주 인용된다. 터스키기 매독 연구는 벨몬트(Belmont) 보고서로 정리되었고, 국가조사위원회(National Human Investigation Board)의 설립과 의료기관내 임상시험심사위원회(Institutional Review Board, IRB) 설치 의무의 계기가 되었다.
연구진은 미국 공중위생국에서 성병을 담당하던 부서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터스키기 매독 연구의 대부분은 탈리아페로 클락(Taliaferro Clark) 박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초기 목적은 흑인 남자 집단에서 치료받지 않은 매독을 6~8달 정도 관찰하고 이후에 이것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락 박사는 다른 연구진들로부터 제안된 사람들을 속이는 연구에 동의하였다. 클락은 연구의 시작 1년 후 은퇴하였다.
유진 디블(Eugene Dibble) 박사는 터스키기 협회주2 (Tuskegee Institution)에 있는 존 앤드류(John Andrew) 병원의 수장이었다.
올리버 와그너(Oliver C. Wegner) 박사는 알칸사스(Arkansas) 핫스프링스(Hot Springs)에 있는 공중위생국의 성병 분과의 책임자였다. 그는 매독환자들을 집단적으로 분리하고 흑인 공동체에 대한 집단 치료 프로그램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터스키기 매독 연구의 여러 단계에서, 와그너는 메이컨(Macon) 카운티의 활동에 깊숙이 개입해 있었고, 초기 연구 규약(protocols)을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와그너는 터스키기 연구가 치료를 제공하지 않는 장기적인 관찰연구가 될 때 그것을 조언하고 지지했으며, 연구에 대한 모든 것을 알리면 그들이 협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피실험자들에게 연구의 목적을 숨겨야 한다는 점을 일관되게 지지하였다.
레이몬드 본더레흐(Raymond H. Vonderlehr) 박사는 1932년 터스키기 매독 연구의 현지조사 책임자였고, 초기의 건강검진과 수많은 의료 수속을 담당하였다. 본더레흐는 프로젝트의 다음 단계를 규정하게 된 여러 정책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면, 그는 “특별 무상 치료”라는 진단 테스트를 이야기하면서 환자들에게 요추천자주3(spinal tap)를 하도록 하는 “동의서”를 얻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와그너 박사는 후에 그가 가진 “편지로 검둥이들을 옧죄는 재능”을 칭찬하였다. 본더레흐는 1943년 성병 부서의 책임자의 자리에서 은퇴하였다.
존 헬러(John R. Heller) 박사, 그는 본더레흐 박사의 조수였으며 공중보건국의 성병 부서의 책임자로서 본더레흐를 계승하였다. 헬러는 임상연구에서 피실험자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뉘른부르크 강령(Nuremberg Code)이 정식화될 때, 그리고 다른 공중위생국 분과에서 매독에 대한 일상적인 치료로 페니실린이 도입되었을 무렵에 책임자의 지위에 올랐다. 헬러는 1972년 연구가 대중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을 때에도 살아 있었고, 이 연구의 윤리적인 문제들을 방어하였다.
간호사 유니스 리버스(Eunice Rivers)는 터스키기에서 훈련받고 연구가 시작될 때 존 앤드류 병원에서 차출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간호사였다. 본더레흐 박사가 그녀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연구가 공중위생국 내에서 장기적인 것으로 정착되었을 때, 간호사 리버스는 장기적으로 연구에 참가한 핵심인물이었고, 이 연구가 진행된 총 40년 기간 동안 연구에 참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1950년대까지 간호사 리버스는 연구의 주축이 되었다. 모든 환자들에 대한 그녀의 개인적인 지식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연구가 유지되도록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30년대 대공황의 기간 동안에 정착한, 제대로 건강을 돌볼 수 없었던 낮은 계급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리버스 양의 오두막(Miss Rivers’ Lodge)에서 도움을 받았다. 거기서 환자들은 터스키기 대학에서 제공하는 무료 건강진단을 받을 수 있었고, 병원으로부터 건강진단을 받는 날에는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었고, 간단한 질병에 대한 무료 치료들을 받을 수 있었다.
연구의 세부사항
원래 이 연구는 메이컨 카운티의 매독 발병률에 대한 연구였다. 피실험자들은 6~8개월 정도 연구 대상이 되고, 약간 효과적이지만 꽤 독성이 있는 당시의 치료법(살바르산, 수은제, 연고와 비스무스를 포함하는)으로 치료를 받는 것이었다. 연구의 초기 의도는 부커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에 의해 설립된 블랙대학의 터스키기 협회가 참여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공중 보건을 증진하는 것이었다. 제휴한 병원이 연구를 위한 의료시설을 공중보건국에 빌려주었고, 지역 흑인 의사들과 같은 다른 유력한 흑인 단체들도 참여하였다. 박애주의적인 로센왈드 기금(Rosenwald Fund)은 마지막 치료를 위한 자금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 연구는 400명의 남자 흑인 매독 환자와 통제그룹으로 200명의 건강한 흑인 남자를 모집하였다.
터스키기 매독 연구의 첫 번째 결정적 전환점은 주식폭락으로 인해 로센왈드 기금이 자신의 자금 제공을 철회한 1929년이었다. 연구 책임자들은 처음에는 연구의 치료 단계를 위한 약을 구입할 자금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이것으로 연구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1928년, 몇 백 명의 백인 남성들에서 치료되지 않는 매독의 병리학적 징후에 대한 오슬로(Oslo) 연구가 발표되었다. 이 연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회고적인(retrospective) 연구였다. 조사자는 이미 매독에 걸려 얼마 간 치료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환자들로부터 얻은 정보들의 조각을 맞추는 식이었다. 터스키기 연구 그룹은 그들의 연구를 살려 내기로 결정을 하고, 오슬로 연구에 상응하는 장래적인(prospective) 연구를 수행하여 프로젝트를 지속시키려고 했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잘못된 것은 아니다. 연구자들은 치료와 관련해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환자들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한, 그들은 질병의 자연적 진행과정을 연구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인류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이것의 과학적 목적에 집착하게 되어 이성적인 판단을 배제하게 되었고 그들의 환자들에게 해를 입혔다. 최종적으로 이 연구는 “의료 역사에서 인간에 대한 가장 오래 지속된 비치료적(nontherapeutic) 실험”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초기의 윤리적인 고려는 급속히 타락했다. 예를 들어, 연구의 중간에, 사람들이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의학적이지만 치료를 위한 것은 아닌 요추천자 요법(spinal tap)을 받으러 나오라고 하기 위해서 의사들은 400명의 환자에게 “무상 특별 치료를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제목이 달린 잘못된 편지를 보냈다(그림 참고). 또한 연구자들은 모든 피실험자들에게 사망하면 부검을 받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사전에 전혀 고지되지 않는 것이었다. 많은 참가자들에게 치료는 의도적으로 거부되었다. 질병의 치명적인 경과를 “관찰하기” 위해 많은 환자들에게 가짜 치료(placebo treatment))를 해주고 거짓말을 했다. 1934년, 첫 번째 임상 자료가 출판되었고, 1936년에 첫 번째 주요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이것은 연구기간동안 몇 편의 논문이 출판된 연구였고, 이것이 비밀연구가 아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다음의 결정적 전환점은 1947년에 왔다. 그때 페니실린이 매독에 대한 표준적인 치료제가 되었다.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는 몇몇의 공중 보건 프로그램들은 질병의 박멸을 위한 “빠른 치료 센터(rapid treatment center)”를 세우는데 동원되었다. 성병을 박멸하려는 몇몇의 전국적인 캠페인이 메이컨 카운티에도 확산되었을 때, 이 연구의 실험자들은 피실험자들이 이 캠페인에 참가하는 것을 막았다. 2차 세계대전동안, 군에 입대한 250명의 피실험자들은 결과적으로 병에 대한 진단을 받고 매독에 대한 치료를 받을 것을 명령받았으나, 공중위생국은 그것을 못하게 하였다. 그 당시 공중위생국의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알려진 명확한 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것을 억제해왔다.”
이 연구가 끝날 때까지, 오직 74명의 피실험자들만이 생존해 있었다. 피실험자 중 28명은 매독으로 죽었고, 100명은 관련된 합병증으로 죽었으며, 그들의 부인 중 40명이 감염되었고, 그들의 아이들 중 19명이 선천적으로 매독에 걸린 채로 태어났다.
연구의 종결과 그 이후의 이야기
1966년 공중위생국의 성병 조사원이었던 샌프란시스코의 피터 벅스턴(Peter Buxtun)은 이 실험의 도덕성에 대한 자신의 우려를 표명하는 편지를 성병분과의 책임자에게 보냈다. 질병통제센터(Center for Disease Control, CDC)는 이 연구가 완료 ― 모든 피실험자들이 죽고 부검될 때까지 ― 될 때까지 계속될 필요가 있음을 다시 확언하였다. 자신들의 주장을 보강하기 위해, 질병통제센터는 [흑인의사들을 대표하는] 국립의료협회(National Medical Association))와 미국 의료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지역 지부로부터 연구의 지속을 위한 지원을 요청하였고 지지를 받았다.
피터 벅스턴은 자신의 우려가 비난을 받자 이를 언론에 호소하였다. 이 이야기는 1972년 7월 25일 워싱턴 스타(Washington Star) 지에 처음 실렸고, 그 다음날 뉴욕타임즈의 1면 기사가 되었다. 대중에게 호소한 결과로, 1972년 특별자문위원회는 이 연구가 의료적으로 불공정하다고 결정하고 이 연구의 중단을 명령하였다.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에 의해 제기된 집단소송으로, 생존한 피실험자와 연구의 결과로 감염된 생존 가족들에게 9백만 달러와 무상치료의 기회가 주어졌다.
1974년, 국가연구조례(National Research Act)는 연구위원회를 만들고, 인간이 참여하는 연구를 규제를 담은 법이 되었다.
1997년 5월 16일, 이 연구의 생존자 8명 중 5명은 터스키기 연구 피실험자들에 대해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백악관 행사에 참석했다. “이미 저질러진 일은 다시 되돌릴 수 없지만, 우리는 침묵을 끝내야 한다. …… 우리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우리는 눈으로 당신들을 볼 수 있고 마침내 나는 미국 국민을 대신해 미국 정부가 행한 일이 수치스러운 것이었다고 말하고자 하며,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윤리적 함의
터스키기 매독 연구 초기의 윤리적 문제는 연구를 시작할 때 따로 고려되지 않았다. 1932년 매독에 대한 치료는 상대적으로 비효율적이고 심각한 부작용이 수반되었다. 매독은 가난한 흑인 공동체에서 특별히 많이 퍼져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연구가 의도하고자 한 것은 부분적으로 이 질병이 확산된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었고, 이것의 자연적 경과과정과 효율적인 치료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의 일반적인 의료 윤리는 요새와 같은 환자들의 동의를 구하는 정확한 표준이 없었다. 의사는 환자 상태에 대한 정보를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이 임상연구는 이것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법을 찾고, 이 끔찍한 질병이 태어날 때부터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연구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자원한 일부의 사람들을 이용했다. 몇몇 사람들은 이것은 이 연구를 조직한 사람들 중 일부에 의한 인종주의의 발현이라고 주장한다. 문맹이 아닌 백인 매독환자들이 그 당시 최고의 치료를 받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없다.
그러나 매독에 대한 효과적이고 간단한 치료법(페니실린)이 발전하고, 윤리적인 기준이 변화하면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은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어려웠다. 연구가 종결될 때까지, 수백 명의 남자가 매독으로 죽었고, 수많은 그들의 아내들이 감염되었고, 그들의 아이들은 선천적인 매독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 연구는 임상연구에서 착취의 대명사가 되었고, 나치(Nazi)의 의사였던 조셉 맹겔레(Joseph Mengele)의 실험에 비유되곤 했다.
사회학적 연구들은 터스키기 매독연구가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의료와 공중보건의 권위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를 유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연구는 임상 실험과 장기기증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낮은 참여율과, 많은 흑인들이 일상화된 예방적인 치료에도 주저하는 것에 대한 중요한 요인인 듯하다.
이 연구의 직접적인 충격으로 생물의학과 행동연구의 대상이 되는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 위원회(National Commission for the Protection of Human Subjects of Biomedical and Behavioral Research)와 국가연구조례(National Research Act)가 만들어졌다. 이 조례는 연방정부의 허가를 받기 위해서 해당 기관에 임상시험심사위원회(IRBs) 설치를 의무화한다. 임상연구를 설계할 때 윤리적인 문제에 대한 검토와 자발적인 참여자 집단에 대한 특별한 고려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드라마로 제작되다.
데이비드 펠드슈(David Feldshuh) 박사는 1992년 터스키기 연구의 역사를 기초로 해서 Miss Evers’ Boys라는 제목의 연극대본을 썼다. 이것은 1992년 퓰리처상 드라마부분에서 2등에 올랐고, 1997년 HBO에서 TV용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에미상 12개 부분에 노미네이트되었고 3개에 부문주5에서 상을 받았다.
레퍼런스
Gjestland T. “The Oslo study of untreated syphilis: an epidemiologic investigation of the natural course of the syphilitic infection based upon a re-study of the Boeck-Bruusgaard material,” Acta Derm Venereol (1955) 35(Suppl 34):3-368.
Fred D. Gray, The Tuskegee Syphilis Study: The Real Story and Beyond (Montgomery, Alabama: NewSouth Books, 1998).
James H. Jones, Bad Blood: The Tuskegee Syphilis Experiment (New York: Free Press, 1981 & 1993).
Susan M. Reverby, “History of an Apology: From Tuskegee to the White House,” Research Nurse (1998) 3. [원문보기 ]
Susan M. Reverby, ed. Tuskegee’s Truths: Rethinking the Tuskegee Syphilis Study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0).
Jean Heller (Associated Press), “Syphilis Victims in the U.S. Study Went Untreated for 40 Years” New York Times, July 26, 1972: 1, 8.
Thomas, Stephen B. and Quinn, Sandra Crouse, “The Tuskegee Syphilis Study, 1932–1972: Implications for HIV Education and AIDS Risk Programs in the Black Community,” American Journal of Public Health (1991) 81: 1503.
온라인 참고자료
CDC Tuskegee Syphilis Study timeline
CDC Tuskegee Syphilis Study Page
University of Virginia: The Troubling Legacy Of The Tuskegee Syphilis Study
NPR: Remembering Tuskegee: Syphilis Study Still Provokes Disbelief, Sadness
Internet Resources on the Tuskeegee Study
New York Times review of HBO movie “Miss Evers’ Bo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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