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장에서 만난 간병인 아줌마, 삼박자의 힘으로 돌아왔다
무료소개소 폐쇄로 병원에서 쫓겨난 지 8개월이 넘은 4월 26일 무료소개소 다시 열어..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못 들어온 것 못내 부끄럽지만, 현장에 들어와 새로 싸우겠다
참세상뉴스
아줌마들이 돌아왔다. 사업장을 잃은 지 8개월만에. 비록 완전히 예전의 모습대로 되돌아 온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아줌마들은 이제 사업장 안에서 일을 하며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열두명의 아주머니들. 나는 아줌마들의 눈물을 자주 보았었다. 농성장에서도, 기자회견장에서도. 아줌마들은 자신들이 손으로 직접 적어온 큰 글씨의 글을 일사천리로 끝까지 읽어내린 경우가 거의 없었다. 50∼60대의 아주머니들이 그랬다. 연대투쟁 나온 자식같은 대학생들 앞에서, 노동청 간부의 지시를 받아 아줌마들의 출입을 막는 몸짓 큰 공익요원들 앞에서도. “너희들도 나중에 다 비정규직 돼”라고 큰 소리를 치시긴 했지만 끝내 울음을 터뜨리시는 분들이 꼭 계셨다.
아줌마들이 견뎌온 8개월 동안 아줌마들은 늘 목구멍 밑으로 울음을 삼키고 있었던 듯 했다. 8개월. 8개월이라는 말로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삭바람 친 겨울날 서너곳에서 돌아가며 일인시위를 했던 날들도, 병원로비, 국가인권위, 서울지방노동청 시멘바닥에서 스티로폼에 의지해 잠을 청했던 날들도. 아주머니 숫자의 열배도 넘는 공권력이 아주머니들을 닭장차로 휩쓸고 간 뒤, 농성장에 남은 짐 속에서 아주머니들의 약뭉치를 보았다. 그 짐들을 둘러싼 채 연행에 성공한 경찰들이 보여준 모습은 마치 너희의 실체란 이런 것이다 라고 말하는 듯 했다. 한 활동가가 주민등록중 보여주고 짐을 챙겨오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몽뚱이 하나만 갖고 쫓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비정규직에, 여성에, 나이 많고 몸 아픈. 거기에 당장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방 하나 없지만 우리는 돌아왔다, 현장으로
정금자 지부장은 첫 전화통화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노동조합의 소모임방으로 오라고 했다. 그러나 약속 당일 장소는 소아병동 옆 교회로 옮겨졌고, 지부장은 날씨가 좋다며 다시 느티나무 밑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
지부장의 핸드폰 벨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보건의료노조 소속의 각 병원으로부터 양말판 돈을 부치는 전화, 환자와 간병인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 등등.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특수고용직의 일터모습이 그랬다. 조합원 교욱 등으로 소모임 방을 내줘야 하면 당장 갈 곳이 없어 병원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했다.
아줌마들이 사용했던 무료소개소 방은 지금 병원에 들어와 있는 3개의 간병인 소개업체가 나누어 쓰고 있다. 그 중 한 곳이 간병인 지부 아주머니들이 운영하는 약손엄마라는 자활후견단체이다.
“아직도 그때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나. 그만큼 했으면 죽었어야지. 죽었으면 지금 이렇게 부끄럽지는 않을텐데. 죽지 않고 와서 안좋은 이야기가 많아.”(김귀이 사무장)
8개월의 피눈물나는 투쟁때문에 다시 현장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간병인 조합 아주머니들은 비록 후견인업체를 끼기는 했지만 지금 월 조합비만 받고 간병인을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이런 형식만 놓고 보면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또다른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감시가 비밀리에 노동조합 결성하게 해
99년 병원측으로부터 처음 무료소개소 폐지 계획이 흘러나왔을 때 간병인 아줌마들은 자동적으로 자신들의 일터를 지키기 위한 모임을 만들어 국립병원의 무책임한 행동에 항의했다. 그 이후 병원은 조직해체를 조건으로 무료소개소 폐지 철회를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작전을 바꾼것에 불과했다. 직접적인 폐쇄에서 치밀한 감시로 작전을 바꾸어 무료소개소가 담당하는 간병인의 숫자를 끊임없이 줄이는 식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10명의 간병인 아줌마들이 비밀리에 노동조합을 만들어 보건의료노조에 가입한 것은 그렇게 간병인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던 무렵이다.
감시와 탄압이 심해 언젠가는 무료소개소 폐쇄 움직임이 다시 생기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렇게 비밀리였지만 노조원으로서의 2년의 시간이 지났고 작년 무료소개소 폐쇄조치가 실제 눈 앞에 닥친 시점에 50여명으로 늘어난 보건의료노조 소속 최초의 비정규직 노조인 간병인 노조는 본격적인 투쟁활동에 나서게 된 것이다.
싸움이 반년을 넘기고 장기화되기 시작했을 때 아줌마들은 유서를 써들고 다녔다고 했다. 노동청에서 농성을 시작하고 아줌마들은 경찰의 감시를 받았지만, 무서운 것은 경찰이 아닌 조합원 당사자들이었다. 떨어져 죽겠다는 말이 나왔고, 실제 유서를 써들고 다니는 조합원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당시 아줌마들은 밤에 누워도 쉽게 잠들지 못했고 꿈을 꿔도 싸우는 꿈만 꾸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열사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지금이야 죽기보다는 싸우자로 가고 있지만, 그때 심정은 죽자였어. 주저앉으면 죽는다, 그 심정이 죽자는 심정이 아니고 뭐겠어.”
싸움을 통해 알게된 건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들어주지 않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관료조차도 자신들의 책임을 유료소개업체로 넘기는 사용자와 똑같은 논리를 펴고 들었다고 했다. “조용하게 가서 일이나 하지. 왜 구지 서울대병원만 고집하느냐. 지금은 YWCA라는 시민단체가 들어와 있지 않느냐. 노동조합은 이제 그만 포기해라.”
하지만 서울대병원노조는 처음부터 서울대 간병인 노조 싸움에 함께 했다. 조합원들의 반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도부는 비정규직 싸움에 결의를 내 주었다. 거기에 50여개 단체가 모인 공대위가 꾸려졌다. 비정규직 노조, 정규직 노조, 공대위라는 삼박자가 끝까지 함께 했기에 싸움을 사업장 안으로 가지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병원은 현재 아줌마들의 사그라들지 않는 저항에 부딪쳐 방향을 바꾸었다. 다시 간병인 노동조합의 세가 누그러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병원 안에는 간병인 노조를 비방하는 온갖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거기에 일년 안에 간병인 노조의 세를 없애겠다는 계획인지 병원은 일년간 유료소개소의 소개비를 서울대의 기존 간병인에게만 받지 않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생긴 병원의 끊이지 않는 감시체제와 규율로 간병인노조 아줌마들은 동료 간병인으로부터 섭섭한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 또 다른 이익집단으로 비추이도록 소문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줌마들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조합원을 조직해야 하는 운동에 맞닥뜨리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은 특수고용직이라 전임비도 사무실도 없지만 아줌마들은 자기자신을 믿으며 골리앗에 맞선 싸움에 나서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동조합의 이름을 달고 들어온 게 아니잖아. 우린 지금 남의 이름 빌려갖고 온 거야. 그러니 부끄럽고 창피하지. 우리 꿈은 노동자니까 노동자로 인정받고 싶어요. 우리 손으로 간병인 아줌마 꾸리고, 우리 스스로 독려하고, 일을 더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 그런데 동료로부터 안 좋은 소리 들으면 속이 뒤집어지지. 그치만 남의 말은 3일을 못 간다했어. 이제는 그러저런 말 신경쓰지 말아야지.”
우리까지 나서는데 세상이 얼마나 두렵겠어
“먼저 조합활동 한 사람들이 지금부터가 더 힘들다고 말해주더라고. 근데 우리끼리는 그래. 직장에서 쫓겨나는 이 일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언제 세상을 볼 생각을 했겠으며 빛과 어둠을 알고, 어느 곳에 서야 하는지를 알았겠느냐고, 그러니 우리 서울대병원장에게 감사하자. 서울대병원은 이 문제가 크게 알려지는 게 두려울꺼야. 사람을 옛날 식모부리디끼 부렸어도 아무 일 없었는데, 이제 이렇게 간병인까지 조직을 만들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세상이 얼마나 두렵겠어? 평안한 곳에서는 아무 일도 생겨날 수 없다고 생각해.”
“멀게 보면 간병인력도 정규직이 되어야겠지. 병원이 고용을 해서 병원과 단체협상을 할 수 있어야지. 의료보험비에 간병비가 포함되어 있는데, 간병인이 이 병원, 저 병원 옮겨 다니는 일도 환자에게 전혀 도움이 안돼. 고용이 안정되지 않으니까 사설업체가 생기고 소개비도 모라자 자꾸 웃돈을 요구하지.”
유서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보였던 정귀이(사무장) 아줌마는 남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할 수 있는 일이라 간병인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중간착취라는 제도가 생기고 나서는 노조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싶어 총무부장까지 맡아했다. 그리고 싸움이 길어지자 열사가 되어서라도 힘을 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제 싸움은 안으로 들어왔다. 진흙탕 안에서 진흙을 묻히며 뒹굴어야 할 일이 남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아줌마부대 대단하다는 말보다 질시와 비방의 말을 더 많이 들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줌마들은 길을 볼 것이다. 기도는 길을 보기 위한 것. 간병인 시위가 잡히면 자신들밖에 없을 것 같은데 사람들이 많이 나와줄 때 가장 힘이 났다는 아줌마. 싸움이 길어질수록, 아무리 억울해도 유료업체와 병원에 말 한자리 못하는 20만명의 간병인을 생각하게 됐다는 아줌마들의 진심은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2004년05월04일 10:20:41
남화선(namhs@jin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