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보도’도 신분따라 차별하나

‘자살 보도’도 신분따라 차별하나
[기고] 이영문 아주대 정신과 교수… 자살율, 사회안정도와 연관

오마이뉴스(news)  

비리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던 유명 인사들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과 안상영 부산시장, 남상국 대우건설 전 사장에 이어 최근에는 박태영 전남 도지사도 죽음을 택했다. 일부 정치권과 언론은 이들의 자살사건이 있을 때마다 사회·국가적 책임을 촉구하며 대서특필하고 있다.

과연 이들은 왜 죽었는가. <오마이뉴스>는 이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수원시 자살예방센터장을 맡고 있는 이문영(아주대 의대) 교수의 특별기고를 마련했다. 이 교수는 특히 ‘죽음’을 대상에 따라 차별적으로 다루는 언론보도 방식을 비판하면서 민중들의 자살문제를 좌시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편집자 주)

단순한 심리적 추측으로 죽음 분석하면 위험

5월 꽃향기를 제대로 맡기도 전에 온 나라가 유명인사의 자살문제로 편하지 않습니다. 고 박태영 전남도지사가 한 지방자치단체장으로서, 전직 정치인으로서 삶을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것과 개인 비리혐의로 검찰조사를 받던 중 순식간에 일어난 투신자살이라는 게 극명하게 대비되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족에게도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는 이번 박태영 지사의 자살을 세 가지 측면에서 보고자 합니다.

첫째, 정신의학을 연구하는 임상가 입장에서 바라보는 측면입니다. 존경받던 유능한 한 개인이 비리사건에 연루돼 겪었을 심리적 공황상태에 대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점은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돼야 합니다.

왜냐면 고 박태영 지사는 정신의학이 관여할 질병상태를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심리적 추측은 고인을 두 번 죽이는 일이기에 섣부른 정신과 의사들의 판단은 유가족과 남은 사람을 위해서도 보류되는 게 옳습니다. 정신의학적 문제는 구체적인 연구결과에 의존해 분석돼야 합니다.

둘째, 고 박태영 지사뿐 아니라 지난해 8월 고 정몽헌 회장, 올해 2월 고 안상영 시장 그리고 3월 고 남상국 사장의 자살 이후 언론의 보도태도에 대한 문제입니다.

즉 일관성이 결여되고 즉흥적인 추측에 의해 쓰인 관련보도를 정신보건 전문가 입장에서 분석하고자 합니다. 유명인사의 자살이 실제로 일반인 자살을 더 많이 유도하는지, 또한 이들 유명인사 4명의 자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는지 등에 대한 것입니다.

셋째, 유명인사의 자살에 대해서는 촌각을 아끼며 추임새를 들이미는 기존 언론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보장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지난해 10월의 고 이용석 노동자와 올해 2월 박일수 노동자, 절대 빈곤 및 실직의 고통을 유서에 남긴 채 자살을 선택한 이름 모를 수많은 민중들의 자살도 같은 비중으로, 동일한 시각으로, 편견없이 보도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료사회학적 시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기적’ 자살과 ‘이타적’ 자살,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

우선 자살은 철학자, 신학자, 정신의학자, 사회학자, 예술가 등이 수세기에 걸쳐 꾸준하게 복합적인 관심을 가져온 현상입니다. 그중 자살에 대한 유형과 원인을 사회적 입장에서 처음으로 재정립한 사람은 에밀 뒤르켕(Emil Durkheim)입니다. 그는 <자살론>이라는 책에서 자살을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 등 세 가지로 나눴습니다.

일반적으로 이기적 자살은 정신질환과 연관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우울증, 급성 정신병, 현저한 스트레스 상태 등이 이같은 자살의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반대로 이타적 자살은 개인이 특정한 사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때 일어납니다. 일제의 ‘을사조약’ 강제체결에 항거하며 자결한 충정공 민영환 선생,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 등을 부르짖으며 분신한 노동운동가 전태일 열사 등이 대표적 인물입니다.

마지막으로 무통제적 자살, 혹은 아노미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던 중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벽에 부딪쳤을 때 나타납니다. 지난 4월의 집단 자살과 최근의 동반자살, 자살사이트를 중심으로 준비된 자살여행 등이 여기에 속하죠.

가난, 사회계층보다 사회 불안정과 가치혼란이 관련 높아

일반적으로 산업화가 진행될수록 자살이 증가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연구자료는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화와 자살이 연관된 게 아니라 사회 불안정과 사회적 가치혼란이 자살과 연관됩니다. 사회가 너무 불안정하거나 지나치게 안정돼 변화가 없는 사회는 똑같이 자살율이 높습니다.

가령 스리랑카는 1990년 통계에서 인구 10만명당 33.2명, 특히 15∼24세의 청소년 집단에서는 무려 62.3명이라는 높은 수치의 자살율을 보였습니다. 반면 캐나다는 12.7명, 호주는 13.3명으로 스리랑카보다는 낮았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7.9명보다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90년대 급속한 가치관의 혼란이 나타난 우리나라 역시 1992년부터 2002년까지 자살율은 9.7명에서 19.1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과연 가난하면 자살을 더 많이 하게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회계층이 높은 사람이 더 쉽게 자살을 선택할까요. 하지만 이와 일치된 통계는 아직 없습니다. 사회계층 혹은 가난 등이 자살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각 개인의 요소가 혼재돼 일관된 경향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회계층, 경제력과 무관하게 사회적 가치관이 안정된 곳에서는 자살율이 낮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한 예로 태국은 싱가포르에 비해 국민소득이 무려 10배가 낮지만 또한, 자살율도 3배가 낮습니다. 칠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히스패닉 국가들이 캐나다, 미국 등 북미 국가에 비해 자살율이 낮은 것도 자살이 국가의 사회복지 안전망보다는 국민 개개인의 사회적 가치체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과연 높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나라의 높은 자살율 수치, 언론의 선정주의에서 비롯

2002년 OECD 보고서에는 우리나라의 자살율이 인구 10만명당 19.1명으로 돼 있습니다. 1999년 기준으로 일본은 19.9명, 핀란드는 21.2명, 벨기에는 18.5명입니다.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헝가리로 2000년 27.4명입니다.

반면 1998년 기준으로 미국은 10.7명, 프랑스 15.4명, 이탈리아 6.3명, 영국 6.9명, 그리스 3.2명, 멕시코 3.8명 등으로 단순 비교가 어렵습니다. 도무지 자살율에 관한 통계는 경제력, 국가 발전지표, 범죄율 등 어느 수치와도 무관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결론적으로 자살에 대한 통계는 가장 믿기 어려운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나 자살은 숨기려는 경향이 높습니다. 자살에 대한 편견도 많아 국가별 통계는 믿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오히려 한 시점에서 지역조사를 통해 나온 자살 통계가 국가통계보다 더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기본적으로는 각 나라가 발표하는 자살 통계는 무려 30∼200%까지 낮게 보고된다는 게 일반적인 연구결과입니다. 따라서 각 나라는 자기들만의 기준을 가지고 자살율을 체크하고 예방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나라가 자살율이 매우 높은 국가로 나타나는 것은 언론의 선정주의에 기인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숫자에 의존하는 보도자세는 오히려 국민에게 자살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양가적(두 개의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함유하는) 감정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유명인사의 자살이 일반인 자살을 더 많이 유도하는가

세계보건기구 보고서에 따르면 유명인사의 자살은 일반인 자살에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우려할 만한 함정이 있습니다.

첫째로 유명인사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언론에서 지칭하는 ‘사회지도층’이 무엇인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권력과 명예를 가진 집단이 사회지도층은 아닐 것입니다. 논란이 된 유명인사 4명의 자살배경에는 검찰 조사라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개인비리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사회지도층의 자살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충분히 받을 만합니다.

그렇다면 일반인이 이들의 자살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배경은 유명인사들이 사회지도층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가정에서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사회지도층으로 분류된 이들은 개인비리로 구속되거나 중도하차한 경우가 많아 이들의 죽음을 동일시할 만큼 사회적 영향력이 높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베르테르 효과’라 불리는 18세기 연쇄 자살풍조를 현대에 그대로 반영한 위험한 추론입니다. 다원화된 사회의 다원적 기능체계를 기억한다면 언론이 그 같은 무모한 결론을 무분별하게 호도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는 이들 유명인사의 자살을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입니다. 자살의 발생빈도는 언론이 사건을 보도한 직후 10일 동안 증가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더욱이 일반적인 자살방법에서 벗어난 특이한 자살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는 보도행위는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2002년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20∼30대의 가장 높은 사망원인으로 자살이 꼽힙니다. 따라서 언론은 유명인사의 자살을 다룰 때 매우 조심스러운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기성 언론은 자살장소를 상세하게 그려주고 실시간에 가까울 정도로 구체적인 자살행위를 시간 순서에 맞춰 보도합니다. 결국 자살에 대한 집착이 있는 일련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어디에서 자살할 수 있는지 자세히 제공하는 셈입니다.

실제로 고 박태영 지사의 자살이 일어난 4월 29일 이후 <조선일보>는 370여건, <한겨레>는 60여건의 관련보도를 내보냈습니다. 매우 신속한 보도임에는 틀림없지만, 선정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보도방식이기도 합니다.

<조선>, 박 지사 보도 370여건…노동자 박일수 분신자살은 10여건 그쳐

앞서 말했지만 올해 2월 14일에는 현대중공업 비정규 노동자 박일수씨가 분신 자살했습니다. 그러나 한 신문을 제외하고는 기성 언론 어디에서도 이 자살에 대한 분석보도는 없었습니다.

4월 들어 고 박일수씨 장례문제가 회사측과 합의된 뒤에야 몇 건의 보도가 나왔을 뿐이었습니다. <한겨레>는 2월 14일 이후 지금까지 40여건의 기사를 보도했고 <조선일보>는 10건에 그쳤습니다. 대부분 언론이 단순기사로 처리하고 넘어간 것이지요.

하지만 이번 고 박태영 지사의 자살에는 기성 언론 모두 사설과 칼럼을 실었습니다. 한결같이 자살이 늘어나니 이를 예방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반드시 해야 할 정책입니다. 다만 왜 이번 사건에만 귀를 기울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니 구체적으로는 선정적 보도에 뒤따르는 양념과도 같은 내용일 뿐입니다. 다음은 이번 사건을 다룬 각 언론의 사설 제목입니다.

‘도지사 투신에 비친 시대의 그림자’ (조선일보 4월 30일)

‘검찰 수사관행에 문제는 없는가’ (동아일보 5월 1일)

‘지도층의 자살풍조를 우려한다’ (중앙일보 4월 30일)

‘자살만이 유일한 해결책인가’ (한겨레 4월 30일)

‘검찰수사받다 왜 자꾸 자살하나’ (경향신문 4월 30일)

‘박태영 전남지사의 자살’ (한국일보 4월 30일)

‘지도층 인사들의 자살 충격’ (국민일보 4월 30일)

‘사회 저명인사들의 잇단 자살’ (문화일보 4월 30일)

이 와중에 단신도 있습니다. 「“서울특별시 시장님. 청계천 상인을 도우소서. **야 미안하다”-청계천 영세상인의 자살」 (연합뉴스 4월 29일)

죽음 이후에도 차별은 존재…언론보도, 어떤 ‘죽음’에도 누가 되지 않아야

엄청난 차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 박태영 지사의 자살 3일만에 370건이 넘는 관련 기사가 봇물 터지듯 나오는 사이사이로 10명의 자살 단신이 보일 뿐입니다. 기성언론이 정치인 자살에 지나치게 과민한 보도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시 2월 14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 박일수씨가 분신자살한 뒤 이틀이 지나서야 <조선일보>는 7줄짜리 관련기사를 10면에 실었습니다. 신속한 보도태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 박일수씨는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비정규직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A4 3장에 달하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자살했습니다. 어느 형태의 죽음이든 최소한 보도는 필요합니다.

한 쪽은 언론보도 방식의 지나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으면서도 과잉, 과민하게 보도되고 반대쪽은 지나치게 소홀한 보도로 죽음마저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과연 우리나라 언론은 바른 보도자세를 취하고 있는지요?

자살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를 장황하게 했습니다만 제 입장은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자살예방에 대한 뚜렷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생각 하나는 죽음이라는 극단의 방식을 택한 영혼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언론보도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불필요할 정도로 유명인사의 사생활을 파헤치는 보도는 물론 선정성이 부각되지 않으면 보도마저 되지 않는 민중들의 자살 문제를 좌시해서는 안됩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급조된 통계 수치, 추론에 불과한 자살의 동기 등을 지나치게 선호하고 있다는 문제점 역시 지적돼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개인적 연유와 사회적 연유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 이영문(42) 아주대 정신과 교수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용인정신병원 진료과장을 거쳐 현재 아주대학교병원 정신과 의사 및 아주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수원시 자살예방센터, 수원시 정신보건센터, 경기도 지역사회정신보건사업, 장애우권익문제 연구소 등에서 정신장애우들의 인권과 치료공동체 활동을 벌이고 있다. 저서로는 <환경치료의 이론과 실제>(93년) 등이 있다.

2004/05/03 오전 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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