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병도 만드는 사회인가?

없는 병도 만드는 사회인가?

의료 상업화 시대, 의료 소비자들 ‘합리적 선택’ 중요해져  

미디어다음 / 김진경 기자  

“특별한 장비나 치료법 등에 의존하지 않고, 신체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함으로써 건강을 되찾고 유지할 수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최근 서울대학병원에서 개설한 건강 관리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문구다.
자신의 몸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인지행동치료로 시작해 금주와 금연, 운동을 통한 체중조절, 마지막 단계에서 고혈압과 당뇨병에 대한 만성질환 관리 등을 표방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의 가격은 6개월에 400만원이다. 서울대측은 “6개월 동안 건강에 대해 통합관리를 받게 돼 병도 미연에 예방하고 건강을 되찾는 효과를 가져오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병원측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일부 의료전문가들은 “너무 상업적이다”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한 의대 교수는 “의료계가 생존하기 위해 피부클리닉, 비만클리닉, 노화방지 클리닉 등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프로그램 도입에 열을 올리는 현실을 이해한다”고 전제하면서도 “해마다 수십억의 정부 지원금을 받는 종합대학까지 희귀 난치성 질병에 대한 투자보다 건강 관리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현실은 시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단이 환자를 만들고, 약이 병을 만든다?

의료계 일부에서는 피부관리, 노화방지, 비만관리 등 ‘일상의 의료화(medicalization)’에 의사들이 몰리는 현상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가 높다. 의료화는 쉽게 말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아주 평범한 일상사까지 의학의 관리대상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인천 가은병원 내과전문의 한상률 박사는 “비만의 경우 나라마다 기준으로 삼는 체질량 수치가 다르다”며 “똑같은 체질량이라 하더라도 어느 나라에서는 비만환자로 취급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정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의료전문 주간지 ‘청년의사’ 박재영 편집장도 지난달 16일 ‘없는 병도 만든다니’라는 칼럼을 통해 “고혈압이나 콜레스테롤 기준치를 조금 수정함으로써 의사들은 수천만 혹은 수억 명의 환자를 더 확보할 수 있게 되기도 한다”고 했다.
의료계 관계자들은 여성 갱년기증후군의 호르몬요법과 노화방지 클리닉의 항산화요법도 의사들이 창출한 대표적 시장으로 꼽는다.

박재영 편집장은 “골다공증, 발기부전, 탈모, 우울증, 과민성 대장 증후군,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 등의 ‘질병’이 과거에는 자연스러운 현상 혹은 적어도 병적인 상태는 아닌 것으로 여겨졌는데 이제는 그런 증상들에 진단명이 붙어 있고 값비싼 치료제도 나와 있다”며 “과거에는 의료 영역이 아니었던 부분들이 점점 더 의료 영역에 편입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골밀도측정기가 개발되면서 ‘골다공증’이라는 병이 생긴 것입니다. 진단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측정기를 통해 정확한 수치가 나오게 됐고 이에 의료계가 연령대에 따른 기준을 정하면서 골다공증 ‘환자’가 된 것입니다.”

“시대적 흐름 비난할 수만은 없다”

  
지난 5월 대한피부과학회가 탈모퇴치 마라톤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일상의 의료화가 ‘삶의 질’ 향상이라는 긍정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 비난만 할 수 없다는 게 의료계 안팎의 시각이다.

“만약 탈모를 겪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병으로 생각하고 관리 받기를 원한다면 모발을 관리하는 피부과 의사를 나쁘게 볼 것인가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천사랑병원 이왕준 원장은 “피부관리나 노화방지 같은 증상을 다루는 의료시장이 의사들이 의도적으로 창출하는 시장임을 부인하지 않겠다”면서도 “탈모증상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을 심장병과 당뇨병 등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폄하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마찬가지로 발기부전 치료제인 비아그라가 사기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여성 호르몬의 투여가 여성들에게 삶의 활력을 선사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 있을까? 수시로 MRI를 찍어 정상임을 확인해야 만족하는 사람들에게 비용 대비 효과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원장은 “의사들이 점점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웰빙 풍조 등 사회 트렌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며 “하지만 대중의 욕구가 없는 곳에서 억지로 시장은 창출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본의 논리 개입된 의료서비스, 똑똑한 의료소비자 운동 필요

  
일부 의료계 관계자들은 자본의 논리가 개입된 의료서비스에서 의사들에게 ‘윤리’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요구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사진은 피부건강의 날 선포식 장면. [사진=연합뉴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의료서비스에 ‘자본의 논리’가 개입됐기 때문에 성형외과와 각종 클리닉에서 의사로서의 ‘윤리’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요구인지도 모른다”며 “정통의료와 서비스로서의 의료 두 그룹 사이에 기대되는 윤리는 아예 다른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는 “의료사업가에게는 의사윤리보다 기업윤리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의료 서비스가 인술(人術)보다는 ‘의료사업’으로서 더 각광 받는 시대에는 의료 소비자의 태도 또한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건강세상네트워크 김창보 사무국장은 “현대인들이 자기 건강에 대한 자율성을 상실하고 있다”며 “의료 소비자들이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권리를 요구하는 ‘의료 소비자 운동’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고 말한다. 녹색소비자연대 조윤미 사무국장도 “의료계의 상업화를 통제할 수 있는 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일반 시민들은 갈수록 똑똑한 의료 소비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