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날카로운 분석입니다. 현 정부가 말로는 분배를 강화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이전 정권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네요… .)
분배가 중요하다면
오는 2009년까지 나라 살림이 어떻게 꾸려져야 하는지에 대한 정부 차원의 논의가 금년 3월부터 계속 진행되어 왔다.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수립하는 이 과정은 공청회와 대통령 업무보고를 거쳐 며칠 전의 당정협의로 어느 정도 마무리된 듯하다. 이 과정의 대부분은 세간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두 개의 장면은 분배라는 대단히 중요한 정책 목표가 노무현 정부에서 어떤 방식으로 제기되고, 유통되고, 결국은 선택되는지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장면 하나는 전문가들이 참여한 공청회였다. 여기에선 현재 복지지출은 선진국에 비해서는 낮은 편이지만 앞으로는 급격히 늘어날 전망이므로 현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복지지출을 늘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고령화가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지출의 증가를 초래하여 오는 2030년에는 자동적으로 복지지출의 비중이 GDP의 20%를 넘어서는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으로 뒷받침된다. 장면 둘은 정부와 여당의 당정협의였다. 정부와 여당은 오는 2009년까지 복지예산을 정부예산 증가율의 1.4배 수준인 연 평균 9.3% 이상씩 늘려나가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물론 분배를 중시하는 현 정부의 철학이 여기에 담겼다는 점 또한 강조되었다.
이 두 개의 장면은 국가운용의 핵심적 목표를 성장과 분배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팽팽한 입장 대립을 보여주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노무현 정부는 분배를 강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연 그런가. 내가 우려하는 바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불건전한 방식에 따라 분배 문제가 처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개의 장면에서 한 쪽의 주장은 사실에 기초하여 제기되었지만 다른 쪽은 명분만을 앞세우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일인가. 또한 분배를 앞세우는 정치 논리가 경제 논리를 뭉개버리는 듯한 행태가 부각되어 보이는 것은 단순히 왜곡된 정보 유통의 결과인가.
적지 않은 관련 연구에 따르면, 고령화가 자동적으로 복지지출의 수준을 결정하진 않는다. 재정이란 것은 재(財)의 논리 뿐 아니라 정(政)의 논리에 의해서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재(財)의 논리로만 따져보아도 그렇다. 경제수준이 일정수준에 달하면 빈곤자의 숫자가 줄어들거나 다른 사회보험의 발전으로 인해 공공부조 지출이 감소하기도 한다. 고령화가 진행되더라도 제도가 바뀌어서 사회보험 지출이 감소한 다른 나라들의 사례도 많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어도 25년 후에는 현재의 유럽 복지국가들 수준의 복지지출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 시점에선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논리가 공청회 자료에서, 대통령 업무보고 문건에서, 언론매체의 기사에서 객관적인 사실로 인용된다는 것이다. 이 정부엔 이러한 논리를 비판적으로 따져보는 정책보좌진 하나 없다는 것인가. 1997년 이후 작년까지 복지 예산은 정부 예산 증가율의 2배 수준인 연평균 16.0% 증가를 기록했다. 1981년부터 따져보아도 복지 예산의 연평균 증가율은 두 자리 수로 정부 예산 증가율의 1.4배 수준이었다. 복지 예산을 연평균 9% 이상 늘려가겠다는 것이 분배를 중시하는 철학에 따른 것이라면 우리나라의 역대 정권은 모두 분배를 중시한 셈이다.
이런 종류의 ‘사실’과 ‘명분’에 기초하여 드러나는 분배의 실상은 결국 행동과 말의 괴리, 혹은 분배의 집행은 ‘사실’을 따르고 레토릭은 ‘명분’에 기초하는 기묘한 균형으로 귀결된다. 염려스러운 것은 이런 종류의 균형이 분배는 물론 성장도 망칠 수 있고, 더 나아가 더딘 성장의 혐의를 분배에 돌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데에 있다.
홍경준/성균관대 교수·사회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