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황우석 드라마’에 빠져든 대한민국 (강신익)

‘복제’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긴급분석1] ‘황우석 드라마’에 빠져든 대한민국

  2005-08-05 오전 10:45:57      
   프레시안
  
  마치 시리즈로 제작된 한 편의 드라마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복제과학이라는 이름의 이 드라마는 1997년 영국에서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이안 윌머트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그 화려한 막을 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주 무대는 한반도로 옮겨졌다.
  
  복제과학이라는 드라마의 개막에 흥분한 나머지 인간의 수정란을 8세포기까지 배양하는 데 성공했다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성급하게 언론에 공개한 국내의 한 대학병원 의사는 그 연구의 신뢰성을 인정받지 못해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연구 결과는 바로 다른 연구자에 의해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뒤 이 연구자는 생식세포나 수정란이 아닌 체세포의 핵을 인간의 난자에 이식 융합한 인공 배아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이를 배양해 다양한 세포로 분화할 수 있는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세계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황우석 드라마’에 빠져든 대한민국
  
  여느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복제과학이라는 드라마에서는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과 언론의 반응이 무척 중요했으며 관객을 끌어들일 문화적 아이콘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타고난 능력과 성실성뿐 아니라 그와 같은 스타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리하여 엄청난 인기몰이가 시작되었다. 인터넷에는 엄청난 수의 팬 카페가 차려졌고 그에 관한 기사에는 수도 없이 많은 댓글이 달렸다. 언론도 흥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 그리고 인터넷 매체는 연일 앞 다투어 이 연구의 성과와 의의를 선전해 주었다.
  
  그러나 여느 연예인과는 달리 이 주인공에 대한 안티 카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주인공은 안티 세력이 전혀 없다는 ‘국민 여동생’ 문근영과 무척 닮은 ‘국민 과학자’라 할 만 하다. 검색 엔진에서 ‘안티 배아복제’를 입력해 보라. 진짜 안티는 없고 인간을 복제하겠다고 선언한 이탈리아의 안티노리 박사만 나란히 화면에 떠오른다. 이건 정말로 절묘한 조화가 아닌가? 인간 복제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며 가능하지도 않다고 주장하는 우리의 영웅은 철없이 인간복제를 선언한 미친 과학자와 비교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더 한층 드높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연예인과 구별되는 또 다른 특징도 있다. 그것은 대통령을 비롯한 거의 모든 정치인이 이 연구자의 열렬한 팬임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제한의 연구비를 지원한다든지 대통령에 버금가는 경호를 한다든지 생가를 복원한다든지, 이 연구를 외교적 측면에서 지원하기 위한 ‘바이오 연구지원 대사’라는 직책을 신설한다는 등의 각종 지원 대책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그런 면에서 이 드라마는 정부와 민간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열광하는 스포츠와 유사한 속성마저 갖추고 있다.
  
  ’황우석 드라마’, 계속되는 연장 방송…그 결말은?
  
  인기에 취해 이유 없이 종영을 늦추는 드라마는 이내 시청자를 식상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마저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를 세심하게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미 그런 복선이 깔려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연구자 (또는 연기자)가 이따금씩 언급하던 연구계획 속에 숨어 있다. 무균돼지를 복제해 인공 장기로 활용할 수 있다든지 백두산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멸종 위기동물을 복제하겠다는 등의 언급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표면적 언급에서 드라마의 진행을 예측하던 관객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는데 이것이 또 다른 묘미를 준다. 이렇게 예측이 빗나간 것은 우리가 이 화려한 주인공에 주목하고 있는 동안 함께 등장했던 다른 조연배우들의 행적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윤리적이거나 법적인 논란 때문에 사람의 배아에 대한 연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유럽과 미국의 과학자들은 1997년에 양에서 성공한 동물복제 기술을 다른 동물들에 확대 적용하는 데에 집중했고 그동안 소, 염소, 돼지, 고양이, 토끼, 말 등의 복제에 성공한 바 있다. 이번에 성공한 개의 복제는 바로 이런 성과들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의 마력에 빠진 관객과 연기자는 모두 이런 과거의 성과보다는 개라는 동물의 특수성만을 애써 강조한다. 어차피 그런 동물을 복제한 연구자들은 조연에 불과했던 것이다. 드라마의 주인공과 언론과 정치권을 비롯한 관객은 완벽하게 일치되는 문화적 코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이 이 드라마의 성공요인이었던 것이다. 실로 2002년 6월 월드컵에서 보여준 모두가 일치된 감동을 다시 한번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도 그 감동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그 결말이 어떨지 가슴 졸이며 지켜볼 뿐이다.
  
  개 복제 새로운 것 없어…난치병 치료에 도움될지 미지수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진행된 드라마에 대한 관람 평이다. 이제부터는 시선을 배우가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에게로 돌려보자. 그렇다고 드라마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감동과 재미를 무의미한 것으로 폄훼할 생각은 없다. 그 감동을 현실세계에까지 연장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려졌던 사건들이 드라마가 아닌 현실세계에서 일어난다면 어떨지 생각해보는 것은 그 감동과 기대를 물거품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이 드라마가 보여준 극적 요소들은 현실세계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어제 아침 보도된 개 복제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찬찬히 따져보자. 이 사건의 의미는 의과학적ㆍ상업적ㆍ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의과학적으로 볼 때 체세포를 이식해 만든 배아를 대리모에 착상시켜 강아지를 생산해 낸 이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앞서 말했듯이 이 ‘기술’(과학이 아닌)은 소, 쥐, 염소, 돼지, 고양이, 토끼, 말에 이은 동물복제의 성공사례다. 복제자들은 1095개의 체세포이식 난자를 123마리의 대리모에 착상시켜 두 마리의 복제 개를 탄생시켰다. 이 중 한 마리는 죽었고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보도에 따르면 이 사례는 다른 동물과 달리 미성숙인 채로 난자가 난관에 배출되는 개과 동물의 특수성을 난관을 세척하는 기술을 통해 성공적으로 극복한 난자 채취 기술의 승리다. 특별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 과정은 다른 동물의 경우와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이 사건이 발표된 과학 잡지 <네이처>는 복제자들의 논문 바로 뒤에 이 사건에 대한 평가 글을 싣고 있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개에 대한 복제의 성공은 지금 진행 중에 있는 개 유전체 연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이 연구는 소수의 개를 대상으로 진행 중이므로 복제 기술이 이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둘째 복제된 개를 계속 관찰함으로써 특정한 표현 형질에 대해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찰은 기존에 성공했던 다른 복제동물에서도 가능하다. 복제자들은 개가 인간과 유사한 행동패턴을 보이므로 인간 행동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개와 인간의 행동을 등치시키는 생각 자체가 비과학적이다. 이 언급은 수의학적으로는 의미가 있을 수 있으되 의학적 의미는 별로 없다. 이 코멘트의 저자도 인간에 적용 가능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셋째 만약 체세포가 이식된 배아 상태에서 ―지금까지 생쥐와 인간에서만 가능했던― 줄기세포를 추출할 수 있게 된다면 개의 질병을 페트리 접시에서 연구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아마도’ 개의 질병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건 순수한 가정법이다. ‘~된다면’, ‘아마도’ 등의 표현에 주의하라.)
  
  넷째, 줄기세포 추출이 성공한다면 사람의 질병을 연구하는 동물모델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이것도 가정법이다. 특정 질병에 대한 동물모델은 개보다는 쥐에 훨씬 더 많다. 고혈압 쥐, 당뇨병 쥐, 누드마우스 등이 있다. 여기에 복제된 개가 어떤 의미를 더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없다.)
  
  이 글에 달린 제목 자체가 우리의 열광과는 어울리지 않게 차분하다. (A dog’s life: The first cloned dog was born at some cost, and there needn’t be many more. 개의 삶: 최초의 복제 개가 얼마간의 대가를 치른 뒤 태어났다. 그런데 더 많은 복제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국내 언론에는 이 사건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한 것으로 보도된 실패한 개 복제 전문가 웨스트후신(Westhusin)의 언급은 단순한 시기심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성공에 감탄한다. 하지만 그 감탄은 그들의 일치단결된 인내 때문이지 그 새로움 때문은 아니다. (…) 이 성공이 말해주는 것은 이미 가능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개의 복제가 실제 가능했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뿐이다.”
  
  피 같은 세금 ‘개 복제’ 투자…효용성 있나?
  
  복제자들은 이 기술을 상업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자본이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것 같지는 않다. 미국에는 이미 5만 달러라는 거금을 들여 죽은 고양이를 복제한 사례가 있다. 애완동물에서 개가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복제 개 시장의 잠재적 규모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업적 성공이 가능하려면 한 마리의 강아지를 생산하기 위해 100마리 이상의 개 대리모와 1000개 이상의 체세포 이식 배아가 필요하다는 엄청난 기술적 난관을 극복해야만 한다.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이런 투자가 과연 필요한지에 대한 냉철한 반성이 먼저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 기술이 일반화된다고 가정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자. 나는 개를 사랑하고 가족으로 여기는 많은 애호가들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다. 그렇게 사랑스런 개를 잃었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살려내고 싶은 심정도 이해한다. 그리고 돈이 엄청 많다면 이 기술을 이용해 그 개를 살려낸다고 하더라도 그를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휴가철만 되면 그렇게 사랑하던 개를 방치하고 유기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마당에, 사랑하는 개를 살려내기 위해 100마리 이상의 다른 개를 도구로 이용해도 좋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래도 기어이 죽은 개를 복제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시라. 그렇게 하는 것이 이 나라의 생명공학 발전에 이바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에 우리가 낸 피 같은 세금을 쓰는 것은 좀 생각해볼 일이지 않은가.
  
  복제가 우리를 구원하리라?
  
  또 한 가지, 이렇게 복제된 개가 죽은 개와 동일한 개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새로 얻은 강아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개가 가졌던 유전적 속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복제된 개를 얻은 것은 죽은 개를 살려낸 것이 아니라 유전적 속성이 같을 것으로 예상되는 또 다른 강아지를 얻은 것이다. 이 강아지가 죽은 개와 동일한 성격을 가진다는 보장도 없다. 다른 복제동물의 사례를 보더라도 그들은 결코 동일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복제자와 그들에 열광하는 대중은 복제된 동물이나 배아 그리고 거기서 추출된 줄기세포가 체세포를 제공한 동물이나 사람과 동일한 정체성을 가졌다고 단정한다. 유전적 동일성을 바로 개체 생명의 동일성으로 보는 것인데 이런 해석은 과학적으로도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확대 해석되었을 때 우리를 매우 편협한 세계관으로 이끈다. 물론 그 기술이 적용되었을 때 우리에게 가져다줄지도 모를 엄청난 의학적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학적 적용의 경우에도 유전자 이외의 결정 요인을 배제한다면 그 실효성을 장담할 수 없다.
  
  이 연구와 이 연구에 열광하는 우리의 문화적 코드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코드는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생각이 도출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연출된 드라마에 감동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문화적 코드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전제가 틀렸다면? 우리의 삶은 유전자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을 살아가는 사회와 자연 그리고 우리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개척’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동료 인간들과의 어울림이 유전자보다 더 중요하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유전자와 환경, 자연과 문화, 과학과 예술, 본성과 양육이 공존하는 새로운 문화 코드를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복제가 아닌 새로운 형식의 과학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강신익/인제대 의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