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기고 ‘황우석 스캔들’ 어떻게 봐야 하는가

  ”생명윤리가 ‘황우석’ 잡아 먹는다고?”  
  [기고] ‘황우석 스캔들’ 어떻게 봐야 하는가

  2005-11-18 오후 1:50:11      

  

  
  생명윤리는 스캔들을 먹고 자란다고 한다. 반인륜적 인간 생체실험을 감행한 나치의 의사들을 처벌하기 위한 국제재판의 판결문은 전 세계의 연구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뉘른베르크 강령이 되었으며, 탈리도마이드라는 약으로 인해 태어난 수많은 기형아에 놀란 인류는 그 뒤 신약이 개발되었을 때 그것을 유통시키기 전에 무척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그 안전성을 확인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냈다.
  
  황우석 교수와의 결별을 선언한 섀튼 교수가 지적한 윤리적 문제가 이와 같은 파괴력을 가진 스캔들로 발전할지는 알 수 없지만,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에 이 글을 쓴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는 윤리가 과학의 발목을 잡는다고 불평하던 과학자들이 오히려 윤리의 덫을 빠져나온 결과 정말로 크게 발목을 잡히는 꼴이 될 것이다.
  
  ’황우석 스캔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섀튼이 지적한 문제는 난자의 출처에 관한 것이다. 두 사람 다 자세히 밝히지 않고 있어 정확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문제의 초점이 과연 그것이 적법하고도 윤리적인 과정을 통해 얻어졌는지에 모아지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의혹이 포함되는데, 첫째는 연구팀에 소속된 여성으로부터 난자를 제공받았다는 것이며, 둘째는 혹시 불법 거래된 난자가 연구에 사용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그리고 셋째는 이 연구를 승인한 기관생명윤리심의위원회(IRB : Institutional Review Board)가 얼마나 충실한 심의를 했는지에 대한 문제다.
  
  첫 번째 문제는 이미 과학 잡지 <네이처>가 제기한 바 있는데 당사자는 처음에는 이 사실을 시인했다가 바로 영어가 서툴러서 생긴 오해라고 전면 부인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연구원은 박사과정 학생의 신분에서 바로 모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어 의혹을 키운 바 있다. 둘째 문제는 얼마 전 모 인공수정 전문 병원의 이사장이 불법 매매된 난자를 사용했다고 고백함으로써 불거진 것으로 황 교수의 연구에는 그런 난자가 사용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의혹이 완전히 잠재워진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문제들은 이 연구를 승인한 IRB의 심의자료를 확인하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지만 무슨 까닭인지 공개를 무척 꺼리는 모습이다. 여기서 확인할 것은 난자의 제공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또 동의서나 설명문에 과배란과 난자 채취 과정의 불편과 위험성이 충분히 설명되었는지 여부다. 그 연구가 이런 하자가 전혀 없다면 즉각적으로 그 자료들을 공개하면 될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걸 보면 뭔가 문제가 있기는 한가 보다. 확인되지도 않은 의혹을 두고 그 원인을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지만, 워낙 국민적 관심이 높은 문제이므로 이 분야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몇 마디 하는 것이 그리 지탄 받을 일은 아닐 듯싶다.
  
  ’글로벌 스탠더드’ 외치면서 과학은 ‘한국적 특수성’ 고수하겠다고?
  
  이와 같은 의혹이 불거진 원인을 몇 가지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세계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연구의 윤리적 기준과 관행에 우리 연구자들이 너무 무지했거나 연구 성과에 취해 애써 무시하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 연구의 결과들은 이미 세계적 과학잡지인 <네이처>와 <사이언스>에 게재되는 성과를 올렸지만, 그 연구가 윤리적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으로 밝혀질 경우 그 잡지들이 어떤 조치를 취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앞으로 진행될 연구결과를 출판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연구자는 한국의 기준이 미국의 기준과 다를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황 교수 말마따나 과학자에게는 국적이 있어도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모든 부문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면서 가장 보편적 지식체계인 과학에서만 문화적 차이를 강조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과학연구에서 윤리적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관행이며 좋든 싫든 그 기준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과학은 균형을 잃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윤리가 과학의 발목을 잡는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진정으로 윤리가 어떻게 과학을 도울 수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과학 교육이 진정한 과학정신을 포함한 인문적 가치를 가르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며 윤리를 단순한 관리나 회유의 대상으로 치부하는 위정자들의 잘못된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과학계, 황우석 연구에 대한 ‘침묵의 카르텔’ 깨야
  
  둘째는 이 연구의 과학적ㆍ윤리적 의미에 대한 차분한 분석과 비판이 없었다는 점이다.
  
  정부와 언론은 장밋빛 미래를 선전하는 데 급급해 일부 과학자와 생명윤리학자들의 우려 섞인 충고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연구자들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진지한 연구자의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공개토론을 제안한 생명윤리학회에 대해 소모적 논쟁은 필요 없다고 거절하면서도 강의는 해줄 수 있다고 하는 태도가 그 증거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만나 본 생명과학자들 중에는 이 연구의 평가에 인색한 분들이 꽤 많았는데 그것을 공개적으로 밝히지 못하는 것은, 모처럼 찾아온 과학발전의 기회(주로 충분한 연구비를 그렇게 해석하는 것 같은데)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란다.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건전한 비판이 실종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건이 스캔들이 된다면 제대로 문제를 지적하지 않은 과학자 사회도 마땅히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본다.
  
  무기력한 너무나 무기력한 규제 장치
  
  셋째로 이와 같은 연구를 통제하고 감시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생명윤리및안전에관한법’은 4년여의 논의 끝에 2004년에 제정되었지만 그 시행시기를 2005년 1월 1일로 규정함으로써 2004년에 이루어진 이 연구에 면죄부를 준 꼴이 되었다. 그나마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를 정부와 과학계 위주로 구성함으로써 이 기술의 실수요자가 될 시민사회의 의견이 반영될 여지를 크게 줄였으며, 복지부는 1년간의 시행준비기간을 낭비하고 시행 1년이 다 되어서야 전문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시행의 난맥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 난자의 채취와 배아의 생성 등을 관리 감독하는 절차에 대한 규정이 미흡해 실효를 기대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우리나라와 함께 체세포핵이식을 통한 배아연구를 허용하고 있는 영국이 14년 전인 1991년 인간수정 및 발생 관리청(Human Fertilisation and Embryology Authority)을 설립해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것과 너무 대조적이다.
  
  사실 우리는 이 법을 만드는 초기에 무척 모범적인 논의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2000년 11월부터 1년 동안 과학기술부가 운영했던 생명윤리자문위원회가 그것이다. 과학, 의학, 윤리, 시민단체 대표 등 20명의 전문가들이 거의 매주 모여 깊은 토론을 벌인 끝에 합의안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기서 만들어진 합의안을 그대로 수용하겠다던 약속과는 달리 정부는 태도를 돌변했고 법 제정은 이후 3년 동안 표류한 끝에 결국은 윤리계의 주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모든 연구를 허용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기에 이른다. 어렵게 이뤄낸 사회적 합의가 헌신짝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법은 생명윤리를 지키기 위한 법이기보다는 생명연구를 보장하기 위한 법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지금과 같은 윤리적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생명윤리는 과학을 잡아먹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와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해결책은 저절로 따라 나온다. 첫째는 연구자들에 대한 체계적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자는 윤리를 몰라도 된다는 생각은 지극히 위험한 것이다. 필요에 따라 과학자와 윤리학자가 역할을 분담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문제를 완전히 윤리학자에게 맡겨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명연구에 호의적인 윤리학자만이 아니라 다소 껄끄럽더라도 비판적인 사람까지 포함시켜 혹독한 검증을 받는 것이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이익이 된다는 점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생명윤리를 모르는 과학은 과학을 모르는 생명윤리보다도 훨씬 더 위험하다.
  
  둘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이 연구의 의미를 되짚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연구의 과학적 가치는 어떤 것인지, 의학적 가능성은 어느 정도인지, 윤리적 쟁점은 무엇이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이 기술이 실현될 경우 야기될 법적ㆍ사회적 문제는 없는지 등등 챙겨야 할 문제의 목록은 무척 길다. 모든 것을 여론몰이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이런 문제들을 짚어낸다면 우리의 과학은 더욱 탄탄한 기반과 경쟁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 해결책은 윤리적 연구를 보장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다.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가 실질적 심사와 감독을 할 수 있도록 그 위상과 역할을 강화하고, 일선 기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 대한 교육과 감독을 제도화하며, 난자의 추출과 연구 과정을 모니터할 수 있는 실질적인 행정조직을 갖추고, 연구비 지원 체계를 보다 더 투명하게 하여 절차적 합리성을 확보하는 등 해야 할 일은 무척 많다.
  
  이제 생명과학자, 생명윤리학자, 종교계, 정부, 시민사회단체가 머리를 맞대고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의견이 다르다고 논의 자체를 거부하거나 논쟁을 힘겨루기로 몰고 가는 태도는 진정한 과학자의 모습도 아니고 성숙한 민주시민의 자세도 아니다. 이번 일은 과학연구의 위기인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 기회이기도 하다. 연구팀은 모든 문제를 솔직히 밝힘으로써 과학과 윤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를 기대한다. 생명윤리는 스캔들을 먹고 자라기는 하지만 과학을 잡아먹지는 않는다.  
    
  
  강신익/인제대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