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쿼터, 연간 146일에서 73일로 축소”
한덕수 부총리 공식발표…영화계 반발 “한국영화 말살 신호탄”
2006-01-26 오전 11:45:55
정부는 26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조속히 개시하기 위해 한국영화의 의무상영 일수인 스크린쿼터를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축소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오는 7월 1일부터 스크린쿼터를 73일로 축소하는 것을 목표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정부 “스크린쿼터는 WTO와 FTA 협상에 걸림돌”
이날 오전에 열린 대외경제장관회의에서 한덕수 부총리는 스크린쿼터가 국제통상 규범상 인정되는 제도임을 감안해 제도 자체는 유지하되 쿼터일수는 현재의 146일에서 절반인 73일로 줄이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한 부총리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상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된다”면서 “이 과정에서 규제적인 제도가 장애가 된다면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국제적 경쟁력을 입증하고 있는 우리 영화산업이 앞으로도 국가의 중요산업으로 육성될 수 있도록 여러가지 방면으로 적극 지원하겠다”면서 “구체적인 영화산업 지원대책은 27일 문화관광부가 발표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한미 FTA 협상 급물살 탄다
정부의 이같은 결정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개시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사실상 마무리됐다.
그동안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재개,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 완화, 의약품 약가 산정 문제의 해결 등 미국이 한미 FTA 협상의 선행조건으로 내세웠던 사항들이 모두 다 미국 측의 요구에 맞게 매듭지어지면서 마지막 남은 조건인 스크린쿼터 축소 여부가 어떻게 결정될지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었다.
한국과 미국 양국은 지난해 말부터 스크린쿼터에 대한 물밑교섭을 벌여왔다. 한국은 원래 스크린쿼터 일수를 현재의 연간 146일(365일의 40%)에서 연간 110일(30%)로 축소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스크린쿼터 일수를 연간 73일(20%)로 축소하지 않을 경우 FTA 협상을 시작하지 않겠다는 미국 측의 압력에 결국 굴복했다.
권태신 재정경제부 제2차관이 20일 한 조찬모임에서 “스크린쿼터에도 집단 이기주의가 있다”며 영화계를 정면 비판해 정부가 미국 측의 요구 조건을 수용할 것으로 점쳐지기도 했다.
정부는 ‘한미 FTA 추진 관련 공청회’를 개최하기로 한 다음달 2일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어 한미 FTA를 공식으로 추진한다고 선언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정부 관계자는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서둘러 발표한 것은 이런 일정 등을 감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축소 방침은 ‘한국영화 말살’의 신호탄…정권퇴진 운동 불사”
이와 같은 정부 방침에 영화계는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스크린쿼터를 사수하기 위한 영화인들의 모임인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 대책위원회’는 “FTA를 빌미로 진행되는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은 한국영화를 말살시키는 반문화적 쿠데타다. 참여정부는 결국 미국의 문화식민지를 자처하고 나서냐”며 울분을 토했다.
이들은 26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남산동 감독협회 시사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은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에서는 캐나다 정부의 ‘문화 제외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유독 한국에 대해서만은 집요하고도 오만하게 쿼터 폐지를 요구해왔다”며 “이런 요구를 앞장서서 대행하고 있는 참여정부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괴감을 느낀다”고 정부를 성토했다.
이들은 “9년 전 통상교섭본부장이었던 한덕수 씨는 당시 ‘스크린쿼터는 보호제도라 경쟁력 향상을 저해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경제부총리가 되어 ‘스크린쿼터 덕분에 경쟁력이 생겼으니 이제 줄이자’고 하고 있다”며 “정부가 쿼터를 줄이는 대신 예산지원을 하겠다고 하지만 할리우드의 유통, 배급 독점을 견제할 장치가 한번 풀린다면 한국영화는 몰락의 길을 피할 수 없다. 이는 대만, 뉴질랜드, 멕시코, 브라질 등 수많은 역사적 경험이 확인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지난해 10월 ‘유네스코 문화다양성 협약’이 채택된지 3개월도 지나지 않아 한국정부는 전세계 147개 국가에게 등을 돌리며 미국 편에 확실하게 줄 섬으로써 국제사회의 조롱거리를 자처한 것”이라며 “스크린쿼터는 세계 문화계의 자부심이며 문화주권의 살아있는 상징”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들은 ‘대통령 면담’과 ‘정부와의 대국민 토론회’를 제안하며 “일방적인 쿼터 축소 방침을 바꾸지 않을 경우 정권퇴진 운동의 험난한 길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의를 밝혔다.
노주희/기자, 최서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