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제약업체들, 한국정부 약가정책에 강력 ‘태클’
환자모임․보건의료단체, “이윤보다 인간의 생명 우선하라”
김삼권 기자 quanny@jinbo.net
화이자, 로슈, 노바티스, 브리스톨마이어스스큅(BMS) 등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지난 달 한국정부가 발표한 약제비 절감 방안에 대해 조직적인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26개 다국적 제약업체들로 구성된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KRPIA)는 15일 오전 11시 웨스턴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달 3일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건강보험 약제비 적정화 방안’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보건복지부의 건강보험 약제비 적정화 방안은 모든 의약품을 보험적용 대상으로 등재했던 관리방식(네거티브리스트)을 효능과 가격 등을 고려한 종합적인 평가와 가격 협상을 거쳐 선별등재하는 방식(포지티브리스트)으로 전환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선별등재방식을 중심으로 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통해 건강보험 총 진료비 중 29%를 차지하고 있는 약제비를 적정화해 건강보험 재정의 내실을 다진다는 구상이다. 또 동일성분의 의약품이라고 하더라도 치료적․경제적 가치가 우수한 의약품을 선별해 등재함으로써 합리적 약제비 지출의 기반을 마련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보건복지부 약제비 적정화 방안에 대해 KRPIA는 이미 지난 달 4일 “보험약 선별등재 및 약가협상 방안은 환자들에게 필요한 우수한 신약 사용을 저해하고, 연구개발이 필수적인 생명의약 분야에 있어서 기업 환경의 불확실성을 가중시켜, 연구개발 투자의욕을 감소시킬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톰 메이슨 한국BMS 대표이사
다국적제약업체들, “한국정부 약가 절감 방안, 의약품접근권․신약개발 가로막는다”
15일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다국적 제약업체 대표자들은 보건복지부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제약회사들의 신약개발 투자 욕구를 저해하고, 환자들의 의약품 접근권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논지의 주장을 펼쳤다.
톰 메이슨 한국BMS 대표이사는 “한국 보건복지부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은 다국적 제약업체들과 아무런 협의 없이 발표되었다”며 “이번 방안에는 의약품의 선별등재 조치뿐만 아니라 여러 규제조치들을 포함하고 있고, 이는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신약개발 관련 투자를 어렵게 하는 방향으로 맞추어져 있다”고 성토했다.
이어 톰 메이슨 대표이사는 “한국에는 이미 약값을 조정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견제와 규제조치들이 마련되어 있는데, 보건복지부는 이번 방안을 통해 추가적인 조치를 취했다”며 “이는 환자들의 신약에 대한 접근권을 저해하는 조치”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이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다국적 제약업체 관계자들은 ‘제약회사들의 반발은 특허권 강화와 높은 의약품 가격을 유지하려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는 즉답을 회피하며 빠져나갔다. 아멧 귁선 KRPIA(한국 화이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의약품 특허권 강화와 연장’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아주 긴 토론이 필요하다”며 “오늘의 모임과는 상관없다”는 짧은 답변으로 발을 뺐다.
한편,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한국정부를 향한 본격적인 압박 움직임에 환자모임을 비롯한 보건의료단체들이 발 빠르게 대응하고 나섰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공공의약센터, 한국백혈병환우회, 한국감염인연대KANOS, HIV/AIDS인권모임 나누리+등 20개 환자모임 및 보건의료단체들은 KRPIA의 기자회견 보다 앞선 이날 오전 10시 30분 웨스턴조선호텔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입장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보건의료단체, “고가 의약품과 특허권에 환자들 죽어간다”
이들은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포지티브리스트 제도에 대해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만드는 신약들이 모두 효과가 우수한 약제가 아니”라며 “새로운 약을 등재시킬 때 비용과 효과를 따져서 기존 약에 비해 우수한지를 판별하여 등재를 할 것인지, 가격을 얼마로 할 것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조속한 도입을 촉구했다.
이어 이들은 이미 포지티브리스트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위스 등 OECD 국가들을 언급하며 “이들 국가에서 신약에 대한 접근권이 제한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바 없고, 또한 이 나라들의 의약품 시장 중 신약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 것도 아니”라고 지적했다.
기자회견 단체들은 이어 “신약에 대한 환자의 접근성을 저해하는 것은 다름 아닌 다국적 제약회사가 생산하는 의약품 가격이 고가이기 때문이며 그들의 의약품특허권 때문”이라며 “다국적 제약업체가 특허보호와 고가의 약값을 통한 이윤의 최대 확보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것이야 말로 의약품 접근성을 높이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안기종 한국백혈병환우회 사무국장은 “한 알에 23,045원인 노바티스사의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은 한 달 약값만 300-600만원에 달한다”며 “한 알에 920원 짜리 제네릭(카피약)이 있지만, 특허 문제 때문에 정부에서 수입하지 못하고, 환자들이 직접 인도에서 개별적으로 수입해 사 먹고 실정”이라고 환자들의 의약품 접근권을 침해하고 있는 거대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횡포를 비판했다.
그는 이어 “이 같은 현실에서 일개 다국적 제약업체가 한 국가의 약가정책에 영향을 미치려는 행위는 주권 침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치료접근권 운운하는 다국적 제약업체,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꼴”
최인숙 보건의료연합 집행위원장도 대표적인 혈전용해제인 아스피린을 예로 들며 포지티브리스트 제도 도입을 촉구하는 한편, KRPIA측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아스피린 한 알 당 가격이 34원에서 84원 정도인데, 똑같은 효능을 가졌더라도 신약은 2,174원에 달한다”며 “같은 효능을 가진 약의 가격이 7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인숙 집행위원장은 “늦게나마 보건복지부가 약의 효능과 효과, 가격 등에 따라 선별적으로 의약품을 보험 등재하겠다는 것은 약제비 적정화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며 “이에 대해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환자들의 접근권을 운운하는 것은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권미란 공공의약센터 활동가는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조직적 반발 움직임에 대해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특허법을 개정하려하자, 다국적 제약업체들은 만델라 대통령과 보건복지부 장관을 고소했고, 태국 정부가 에이즈치료제의 제네릭을 만들려고 하자 무역보복을 한다며 태국정부를 협박했다”며 “이제 다국적 제약업체들은 제3세계에서 했던 방법과 똑같이 자신들의 독점적 이익을 위해 한국정부를 압박해오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이어 “초국적 제약자본이 요구하는 것은 환자들의 이해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라며 “오로지 의약품에 대한 독점 기간을 연장하고, 특허권을 강화하는 것만이 초국적제약자본이 추구하는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KRPIA측의 기자회견장에서 윤한기 나누리+ 대표가 ‘사람들이 에이즈 아니라 의약품 접근권이 없어 죽어간다’는 문구가 적혀진 티셔츠를 들고 침묵시위를 벌이고 있다
“에이즈치료약을 당장 먹어야 하는 에이즈환자입니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을 마친 보건의료단체들은 조선호텔 안에서 열리고 있던 KRPIA 측의 기자회견장으로 이동해 참관을 시도했다. 웨스턴조선호텔과 KRPIA 측 관계자들과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보건의료단체 회원들은 기자회견이 진행되던 11시 30분경 회견장에 진입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의 순서가 끝난 뒤 다국적 제약업체 대표들에게 질문을 던졌으나, 대표자들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윤한기 나누리+ 대표는 이날 다국적 제약업체 대표들을 향해 “새로운 에이즈치료약을 먹어야 하는 에이즈 환자”라고 자신을 밝힌 뒤 “지금 당장 약을 먹어야 하지만, 로슈사가 에이즈 치료약을 너무 비싸게 책정해 한국에서 보험에 등재되지 않고 있다”고 따져 물으며 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으나, KRPIA이사를 비롯한 다국적 제약업체 대표자들은 이를 묵살하고 그대로 회견장에서 철수했다.
우석균 보건의료연합 정책실장은 “오늘 한국정부에 항의하러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모국정부들도 포지티브리스트 제도를 도입하고 있는 나라들”이라며 “다국적 제약업체들은 그들의 모국정부의 약가정책을 반대해야지, 자국시장에서의 이윤이 줄어드는 것을 한국과 제3세계에서 보상받으려는 것은 모순”이라고 다국적 제약업체들의 이중적 태도를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