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 정말로 5차협상이 데드라인?
[한미FTA 5차협상, 이것을 주목해야④] 의약품
임은경 기자
“포지티브리스트 시스템(의약품 선별등재)을 내년 1월부터 시행해야하기 때문에 의약품 분과는 이번 협상에서 어떻게든 타결을 봐야 한다. 의약품 분과는 무역구제와 함께 사실상 5차협상이 ‘데드라인’이다.”
정부측과 협상 관련자들이 이번 한미FTA 5차협상의 의약품 분과 협상에 대해 입을 모으는 말이다.
의약품 분과가 이번 5차협상에서 데드라인이라고 하는 이유는, 내년 1월 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의약품의 선별등재(포지티브리스트) 등 ‘건강보험 약가 적정화 방안’을 담은 ‘국민건강보험 요양급여 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에 대해 미국이 한미FTA 협상 내에서 강하게 문제를 삼고 있어, 법안이 예정대로 시행되려면 이번 협상에서 미국과 합의를 봐야하기 때문이다.
한미FTA 협상결과에 좌우되는 ‘국내 정책’ 의약품 선별등재
많은 이들이 지난 7월 서울에서의 한미FTA 2차협상 당시, 미국이 한국의 ‘포지티브리스트 시스템’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의약품 분과 협상장을 박차고 나간 일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미국은 ‘가격 대비 약효가 우수한 제품만을 선별해 건강보험 혜택을 제공’하는 선별등재 방식이 주로 미국의 고가 신약을 타겟으로 하기 때문에 “미국 기업의 이익을 침해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이후 미국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의약품 작업반 별도협상에서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을 인정하는 대신, ‘약값의 수준’과 ‘등재 목록’을 최종 결정하는 위원회에 자국 위원의 참여, 기등재품목 보호 등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내용들을 골자로 하는 16개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양국의 첨예한 이해관계가 얽힌 의약품 협상은 이후 공식 협상기간 외에도 여러차례의 별도 협상을 거쳐왔다.
지난달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열린 의약품 별도 협상에서 미국은 ‘독립적이의신청기구’를 인정해줄 것과 약가하한선을 보장해줄 것 등을 요구했다.
독립적이의신청기구란 정부가 다국적 회사의 신약을 보험적용 대상에 등재시키지 않았을 경우, 독립적으로 ‘이의 신청’을 통해 정부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준 국가기관이다.
미국의 다국적 제약회사의 이익을 보장해주기 위해 또다른 약가 결정 기관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다.
약가하한선은 다국적 제약사가 내놓는 신약의 약가를 결정할 때 일정 가격 이상을 보장해달라는 것으로, 역시 미국 기업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5차협상 주 의제는 독립적이의신청기구, 약가하한선, 특허연장
한국 정부기관이 의약품을 선별해 등재하거나 가격을 결정하는 고유의 권한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같은 요구들은, 미국이 ‘말로만’ 포지티브리스트 시스템을 받아들였을 뿐, 이를 사실상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번 5차협상에서는 이같은 미국의 요구안을 놓고 협상을 벌일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미국의 진짜 노림수는 이 요구안들이 관철되지 않았을 경우 내놓을 또다른 카드에 있을 겁니다. 신약의 특허 연장을 해달라는 것이지요. 특허 연장은 FTA 협상 타결 이후 들어오는 약들부터 인정을 해줄 것인지, 기존에 들어와 아직 특허가 안끝난 약들까지 인정해줄 것인지 문제가 있는데, 미국측은 당연히 기존 약까지 소급 적용을 원할 것이고요.”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천문호 회장은 “미국은 매우 다양한 협상카드를 갖고 있는 반면 우리는 협상카드가 거의 없다. 어떻게 하든 우리 쪽이 손해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측이 의약 협상에서 얻을 성과라고는 알맹이가 쏙 빠진 껍데기뿐인 ‘포지티브리스트’를 지켰다고 국민에게 광고할 수 있다는 것 뿐이다.
미국 요구 들어주면 ‘포지티브 리스트’는 껍데기
그나마 이 포지티브리스트도 보건복지부는 시행 시기를 여러차례 늦추어왔다. 미국이 합의해주지 않으면 포지티브리스트를 국내에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명백히 ‘국내의 공공제도’인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이 한미FTA 협상 진행상황에 얼마나 휘둘리고 있는지는 지난달 12,13일 양일간 서울에서 열린 의약작업반 별도 협상을 전후한 사정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현재 의약품 선별등재 방안에 대한 심의과정을 거치고 있는 규제개혁위원회는 지난달 9일 선별등재 방안을 논의했다가, 12,13일 별도 협상이 잡히자 갑자기 ’16일 재논의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양국간 합의사항을 선별등재 방식에 반영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별도협상을 앞둔 보건복지부는 회의의 목적을 “약제비 적정화(선별 등재) 방안의 연내 실시를 앞두고 한미 양국간의 원만한 합의를 도출할 필요” 때문에 열리는 것이라고 ‘내놓고’ 시인하기도 했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국장은 “FTA협상이 어떻게 될지 몰라 시행을 위한 구체적인 방침까지 여태껏 마련하지 않은 포지티브리스트가 이제와서 데드라인이라고 보기는 힘들다”며 “이번 협상에서도 미국의 요구대로 합의가 되지 않는다면 사실상 포지티브 리스트는 또 늦춰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난항을 거듭해온 의약 협상 진행과정을 생각했을 때, 이번 협상에서 소위 ‘극적인 타결’을 기대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우 국장은 이번 의약품 분과 협상에 대해 “쟁점 좁히기를 위한 가지치기 정도만 하고, 핵심쟁점을 남겨놓고 나중에 빅딜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