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통상관료, ‘무역구제 회색지대’ 줄타기
[전망]미국 의회와 양국 여론 의식…말 뒤집기도
2006-12-28 오후 5:21:54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한미 FTA 협상에서 무역구제에 관한 한국 측의 6가지 요구사항이 미국 무역관련 법률들의 제·개정을 요구하는 만큼 이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의회에 제출했다는 소식이 28일 전해지자, 정부 안팎에서 이 보고서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다.
외교통상부 ‘한미 FTA 기획단’은 이날 미국 측에 확인해 본 결과 이 보고서의 내용은 미국 정부가 지난 5차 빅스카이협상에서 우리 측이 제시한 6가지 요구사항을 ‘그대로 다’ 수용하지는 않겠다고 의회에 밝힌 것일 뿐이라면서, 미국은 앞으로도 양국 정부의 협의 여하에 따라 미 무역구제법의 제·개정을 요구하는 사안들에 대해서도 협상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정부가 자국 내에서는 미국 무역구제법의 제·개정을 필요로 하는 우리 측 요구사항은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우리 정부 측과의 물밑협의에서는 미국 법령의 제·개정을 필요로 하는 우리 측 요구사항에 대해서도 논의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 김종훈 한미 FTA 우리 측 수석대표(왼쪽)와 웬디 커틀러 미국 측 수석대표(오른쪽). ⓒ연합뉴스
美 “무역구제법엔 변화 없다” vs. 韓 “무역구제법 제·개정 관련 협상도 계속”
이날 외교통상부가 전한 미국 측 입장이 사실이라면 한미 양국 정부는 ‘무역구제에 대한 협상은 사실상 올해 말까지만 가능하다’고 했던 그간의 입장을 뒤집은 셈이 된다.
양국 정부는 그동안 △미국 의회가 행정부에 한시적으로 위임한 통상협상 권한, 즉 무역촉진권한(TPA)에 관한 규정에 따라 미국 측 협상단이 무역구제법의 제·개정을 요구하는 통상협상 사안에 대해서는 협정 체결 180일 전까지 의회에 보고해야 한다는 점과 △TPA가 내년 6월 말에 시한이 만료된 뒤 추가 연장되기 어렵다는 일반적인 관측을 감안하면, 미국 법령의 제·개정이 필요한 무역구제 관련 사안에 대한 협상 마감시한은 사실상 올해 말이라고 말해 왔다.
양국 정부가 이처럼 입장을 뒤집고 나서자, 무역구제 분야의 쟁점들에 대해 한미 양국 정부 관리들이 지금 하고 있는 발언들은 한미 FTA 협상을 지속시키기 위한 정치적 또는 외교적 발언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국 측 협상단이 자국 의회에 ‘무역구제법에는 변화를 주지 않겠다’고 하는데 우리 측 협상단은 우리 국민들에게 ‘무역구제법에 변화를 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는, 겉보기에 모순된 상황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앞으로 열릴 협상에서 미 무역구제법 개정이 요구되는 사안에 대한 협상은 가능할지 몰라도 미 정부가 미 의회에 무역구제법의 개정을 요구하고 이를 미 의회가 수용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한미 FTA 협상은 맡은 무역대표부(USTR)는 미 행정부 소속이지만 미 의회의 구속을 강하게 받고 있고, 지난 11월 미국 중간선거에서 상대적으로 자국 무역구제법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한 민주당이 상하 양원 모두 압승했기 때문이다.
우리 측 협상단은 지난 3차 시애틀협상과 4차 제주협상 때 무역구제 분야에서 각각 10개와 5개의 요구사항을 미국 측에 제시했다. 하지만 우리 측의 이같은 요구에 대해 미국 측이 ‘미국 측 정부 협상단에는 협상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우리 측은 지난 5차 빅스카이 협상에서 이 15가지 요구사항들 가운데 6가지만 골라 미국 측에 들이밀고 ‘다 수용하든지 협상을 그만 두든지’ 하라고 요구했다.
이 6가지 요구사항 가운데 미국 무역구제법의 제·개정이 필요하지 않은 사항은 △양국 간 무역구제협력위원회 설치뿐이다. 나머지는 미국 측의 법령 개정이 분명히 필요한 △산업피해의 비(非)누적 평가 △다자간 세이프가드 발동 시 상호간 적용 배제, 그리고 협상 내용에 따라 법령 개정이 일부 필요한 △상호합의에 의한 반덤핑 조사 중지 △조사 개시 전 사전통보 및 사전협의 △조사당국의 추정자료 사용 제한 등이다.
미 무역대표부는 이번 대의회 보고서에서 우리 측의 6가지 요구사항 중 미국 무역구제법의 개정이 필요하지 않은 유일한 요구사항이었던 ‘무역구제협력위원회의 설치’에 대해서도 ‘합의된 바 없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외통부 “미 의회가 무역구제법 제·개정 받아들일까?…미 정부가 알아서 할 문제”
이혜민 한미 FTA 기획단장은 28일 예정에 없던 긴급 브리핑을 갖고 “미 정부의 무역구제 관련 대의회 보고서가 모호한 측면이 있어 미국 측에 설명을 요구한 결과, 미국 정부가 (기존의 요구사항에 관한 문안을 수정한) 새로운 문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고, 또 미 무역구제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도 협상의 가능성을 열어놓겠다고 밝혔다”고 밝혔다.
이혜민 단장은 ‘미 무역촉진권한(TPA) 규정 상 미 무역구제법의 제·개정을 요구하는 사항에 대해서는 더 이상 협상을 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과 관련해 “한미 양국 간 협상 여하에 따라 미국 측이 법률 개정을 요구하는 우리 측 요구사항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면서 “이 경우 미 정부가 미 의회 보고서 내용을 따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미국 측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 단장은 “이번 대의회 보고서는 미국 정부가 무역구제 문제에 대한 미 의회의 민감성과 한국 측의 강한 요구, 이 두 가지를 다 반영해 (일부러) 모호하게 작성한 측면이 있다고 미국 측에서 밝혔다”며 “정부는 이 보고서에는 ‘실망스럽다’고 할 측면과 함께 ‘협상을 계속하겠다’는 측면이 있다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 단장은 ‘우리 측에서 기존의 15가지 요구사항들 중 미국 측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것만 6개로 간추려 미국 측에 제시했다가 이마저 거부당했는데 앞으로 무역구제에서 우리 측 요구가 관철되기는 더욱 힘든 것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6가지 요구사항은 우리 측 우선순위에 따라 뽑은 것이 아니고, (WTO 도하라운드) 다자협상 차원에서 받아낼 수 있는 것은 빼고 한미 FTA라는 양자협상 차원에서 우리만이 받아낼 수 있는 것을 뽑은 것”이라고 반박했다.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는 앞으로 TPA에 대한 법률적 검토와 함께 관계부처들과의 협의를 통해 대응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이 대응방안에는 과거의 요구사항에 관한 문안을 미국 법령을 개정하지 않는 쪽으로 수정하는 것은 물론 미국 법령의 제·개정이 필요하거나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요구사항도 포함될 수 있다고 이혜민 단장은 밝혔다.
범국본 “협상 지속하려는 양측 이해관계 맞아떨어진 결과”
이에 대해 ‘한미FTA 저지 범국민 운동본부’ 정책기획단장인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과 교수는 <프레시안>과의 전화통화에서 “결국 TPA에 대한 법률적 해석의 여지가 있는 ‘회색지대’가 있다는 것으로, 이런 회색지대는 법 외적인 요인들, 즉 정치적인 역학관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했다.
이해영 교수는 이어 “미 민주당이 (지난 중간선거에서) 상하 양원을 장악하고, 미 무역대표부가 새로 구성된 의회의 강한 구속을 받게 된 상황에서 이 회색지대는 미국 무역구제법을 개정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이 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영 교수는 “우리 측에서 (무역구제 분과에서 우리 측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자동차 작업반과 의약품·의료기기 작업반에서 양보를 하기 위해 국내 분위기를 조성해 놓은 것을 미국 측도 아는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전한 미국 측의 해명을 풀이하자면, 미국이 ‘의회의 눈치를 봐야 하는 우리 측 사정을 좀 봐 달라’며 무역구제와 관련된 우리 측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래도 협상의 여지는 있다’는 메시지를 던져 한미 FTA 협상 전체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해영 교수는 무역구제 분야의 16가지 우리 측 요구사항 중 지난 5차 빅스카이협상에서 철회한 9가지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세계무역기구(WTO) 도하라운드 협상 차원에서 논의할 것이라는 정부의 주장과 관련해서는 “바로 이런 주장이 한미 FTA 협상에서 우리 측 입장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며 “이런 주장은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이 잘 되지 않으므로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배치된다”고 비판했다.
이해영 교수는 무역구제 분과의 협상이 한미 FTA 협상 전체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한미 FTA 협상이 살얼음판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큰 협상구도는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어떻게든 협상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이혜민 단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한미 FTA 6차 협상은 1월 15~19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다”고 공식으로 밝혔다.
노주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