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 ‘몰표’ 후회하는 농민들

[낮은 목소리로] ‘몰표’ 후회하는 농민들
입력: 2007년 03월 23일 18:04:01

〈강광석/ 전농 강진군농민회 정책실장〉

저는 전남에 삽니다. 2002년 대선 때 전남 농민 유권자는 약 70만명이었습니다. 그중에 이회창 후보가 얻은 표는 5만표가 안될 것입니다. 제가 아는 농민 중 이회창 후보를 찍겠다거나 찍었다는 농민은 없었습니다. 노무현 후보가 처음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승기를 잡은 곳이 전남이었습니다.

- ‘염치없는 농민’ 내몰아 씁쓸-

그때 우리는 술집에서 ‘노무현이가 1등하고 김근태가 2등하고 한화갑이가 3등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김근태가 좋지만 인기가 부족했고 한화갑은 똑똑하지만 전남출신이라서 당선 가능성이 낮다고 보았습니다. 영남출신이라는 장점과 민주투사라는 이미지가 시너지 효과를 내면 이변의 바람을 일으킬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성공했고 참여정부라는 간판을 들고 노무현 정권을 세웠습니다.

대북송금특별법을 만들어도 무슨 깊은 뜻이 있을까 애써 태연했고 탄핵 때는 1987년 6월 항쟁의 기세로 촛불을 들어 시대의 어둠을 불사르자고 아침이슬을 불렀습니다. 이라크에 파병을 결정하고 김선일씨가 죽어도, 평택에 미군기지를 이전 확장한다고 해도, 수매제를 폐지하고 쌀수입을 확대해도 그에 대한 기대와 지지의 한편은 놓지 않았습니다.

2007년 3월20일 대통령은 ‘국민과 함께하는 농어업 분야 업무보고’에서 농민들이 ‘염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농민들이 자꾸 돈을 내놓으라고 한단 말이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하면 또 돈 내놓으라고 하고, 한·중 FTA 하면 또 내놓으라고 하고…. 길거리에서 밥 굶고 노숙한다는데 국민들 동정심이 거기로 기울 거니까….’

농민들이 한·미 FTA를 반대하는 이유는 누차 말했지만 농업분야를 비롯해 전혀 실익이 없는 협정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요구와 일정에 일방적으로 끌려간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후보시절 미국을 한번도 방문하지 않은 것을 자랑삼아 말할 때, 줏대있는 외교를 말할 때 보여주었던 자신감과 배짱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황금시장 종로를 버리고 개척지 부산으로 갈 때 그가 보여주었던 확신과 그 확신에 대한 거침없는 실천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지만 지금 그가 보여주는 확신은 주변 사람을 무시하고 질시하며 무차별적으로 싸움을 거는 시비정치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줏대없는 외교 시련만 안겨-

대통령은 짐짓 의연한 태도로 자신의 농업관을 말했지만, 예를 들어 ‘농산품도 상품이기에 상품으로서 경쟁력이 없으면 더 못 짓는다’라거나 ‘농업 총생산의 42%가 정부가 투자하는 기반 위에 서 있는데 지금 농민이 정부에 대하여 불신을 얘기할 수 있느냐’ 하는 말은 사실 하나하나 대응하기에 부끄러운 것들입니다. 경쟁력 없는 무능한 농민은 퇴출되어야 마땅하고 정부지원을 몽땅 받고도 정부에 대드는 파렴치한 농민은 그만 ‘입 닥치라’라는 말을 들을까봐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언급한 광우병 의심소의 수입은 농업문제가 아니라 국민건강권 문제입니다. 국내 한우 소값이 최대 42%까지 하락할 수 있다는 전망보다 무서운 것은 이제 한우도 광우병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재앙이 될 수 있는 사안을 놓고 한·미 FTA와 연계된다, 안된다를 가지고 논쟁한다는 것이 불행한 일입니다.

FTA를 반대하는 집회가 연이어 불허 통보가 났습니다. 골목 어귀마다 경찰차가 지키고 가족들에게 협박전화하고 미행하고, 심지어 마을이장에게까지 ‘젊은 놈 하나가 동네 물 다 흐린다’고 단속을 훈계합니다. 저항도 하지 않는 시위대에 가해지는 경찰의 폭력은 거의 한풀이 수준입니다. 기자는 물론 여성과 아이들까지 다쳤습니다. 농민들이 쌀을 팔아 모은 기금으로 만든 광고가 방송금지되었습니다. 얼마전 대통령은 ‘진보나 보수의 차별성’보다 게임의 ‘룰’이 중요하고 이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정치인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민주와 인권’은 왕년의 부산 인권변호사 출신 대통령 아래에서 군사정권으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대선이 있는 해입니다. 전남 농민은 이제 술집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몽땅 몰아준 표를 자랑삼아 말하지 않습니다. ‘막말’은 마지막에 하는 것이라 조금만 참고 견디면 그를 안 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우리 헌법이 5년 단임제라는 사실에 안도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