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사고파는 사회, ‘유시민의료법’의 재앙
참여정부 ‘미국식’ 따라하기의 끝은 잔혹한 양극화뿐
이상이(leehealth) 기자
모든 국민은 의료서비스가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적기에 이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의료이용의 형평성 개념으로 우리 헌법 36조가 규정한 사회권적 시민권의 내용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유럽 선진국들은 의료이용의 형평성을 최고의 사회적 가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국가의료체계의 공공성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 엄청난 사회적 재원을 투입합니다.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영국에서도 신노동당 정부의 지난 10년 동안 국영보건의료제도(NHS)의 예산이 3배나 늘었습니다. 자본주의체계 하에서 형평성은 법칙적으로 악화되기 마련이므로 정부가 강력하게 개입하여 형평성의 가치를 지켜내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유럽 정치의 전반적 우경화 속에서도 여전히 관철되는 바, 이는 사회적 시민권에 기반을 둔 복지국가의 가치가 쉽게 훼손될 그런 성격의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참여정부, 미국식 영리의료 이식하려는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지출은 GDP 대비 약 8%로 미국과 일본의 약 절반, 유럽 평균의 약 1/3 수준에 불과합니다. 한국은 국민소득 2만불의 대표적인 복지 후진국입니다.
그런데 이런 한국에서 희한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회권적 시민권에 근거한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대신에, 그나마 존재하던 한국의 국민의료보장제도마저 무너지게 생긴 것입니다.
참여정부는 초반부터 의료서비스를 산업화하자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실제로 그렇게 추진해 왔습니다. 엄청난 국민적 저항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입니다.
결국 참여정부가 시민사회단체들을 이겼습니다. 한나라당의 적극적 지원 하에 2004년 말 ‘경제자유구역법’을 개정하여 내국인을 대상으로 영리 진료를 할 수 있게 하는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법인 병원의 설립을 허용하였습니다. 다음 해에는 제주도에 외국인 투자 병원의 내국인 영리 진료를 허용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4곳에서 미국식 영리의료가 허용된 것입니다.
참여정부 경제부처의 태도는 일관되게 분명합니다. 이 4곳의 영리의료체계를 장차 전국으로 확대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우리에게 날벼락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최근의 의료법개정안 61조와 한미FTA가 그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참여정부의 실세로 알려진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과 참여정부가 내놓은 ‘의료법 개정안 61조’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존의 의료법은 누구든지 환자를 유인하거나 알선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유인과 알선 금지의 예외조항을 두어 보험업법에 따른 민영의료보험 회사가 비급여 진료에 대해 의료기관과 직접 가격계약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재벌 보험사 지배를 용인하는 의료법 개정안
▲ 의료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국민건강보험은 ‘구닥다리’ 의료기술만 급여해 주는 하류 건강보장제도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홈페이지.
현재는 국민건강보험공단만이 유일하게 의료기관과 가격계약을 할 수 있고,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공단 가입자인 국민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의료법 개정안 61조가 국회를 통과한다면 민영의료보험 회사들도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외형적으로 같은 반열에서 서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민영의료보험 회사들이 더 우위를 점하게 됩니다. 의료법이 개정되면 장차 대부분의 값비싼 최신의료기술들은 도입 직후에는 바로 ‘비급여 의료서비스’로 분류되어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아닌 민영의료보험 회사의 취급 상품이 될 것입니다.
때문에 민영의료보험 회사들과 의료기관들 간의 직접적인 가격계약 관계에서 사실상 값비싼 민영의료보험에 가입한 국민들에게만 이들 의료서비스가 공급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영의료보험의 상품시장에 편입된 최신의료기술이 거기서 빠져나와 국민건강보험의 법정급여 항목으로 전환되기가 쉽겠습니까?
저는 이것이 대단히 어렵다고 보며, 그래서 이 최신의료기술이 다른 신기술에 밀려 거의 ‘구닥다리’ 기술이 다 되어서야 민영의료보험 시장에서 공보험 영역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나라의 유일한 법정 공보험인 국민건강보험은 구닥다리 의료기술만 급여해 주는 하류 건강보장제도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이 경우 이미 값비싼 민영의료보험에 가입한 중상층 국민들이 국민건강보험에 지속적으로 많은 건강보험료를 납부하려 들겠습니까? 결국 한국 의료보장체계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되고 의료이용의 처참한 양극화와 함께 의료안전망은 사라지게 됩니다.
이는 현재 미국의 주요 대통령 후보들도 폐기하겠다고 공약하고 있는, 4800만명의 미국인들이 의료보험이 없는 ‘시장주의 미국의료제도’와 동일한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미국식 ‘시장주의 의료제도’는 일단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가 지극히 어려운 비가역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20여 년 간 국가적 차원에서 의료제도의 근본적 개혁이 논의되었으나 지금까지 아무런 성과도 없는 나라, 국민건강의 성과지표는 선진국 중 최악이면서도 GDP의 15% (OECD 국가 평균은 약 9%, 우리나라는 약 6%임)를 의료비로 사용하는 극단적인 나라가 바로 미국입니다.
한미FTA로 의료시장이 개방되지 않았다?
▲ 한미FTA 협정문이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지난 5월 25일 오전 김종훈 수석대표가 외교부에서 협정문 공개에 따른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다음으로 국민의료와 한미FTA에 관한 논의입니다. 2007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은 담화에서 “서비스 부문에서 좀 더 과감한 개방을 하라고 지시하였으나 교육과 의료시장은 전혀 개방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이 대통령의 말씀이기에 진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수차례 생각을 거듭하게 됩니다. “의료시장은 전혀 개방되지 않았다”가 무슨 뜻인지 말입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아마 ‘한미FTA 협정문에 의료시장 개방이 직접 기술되어 있지 않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참여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의료서비스를 산업화하겠다면서 영리법인 병원의 설립 허용을 위한 기틀을 4곳에 이미 마련하였고, 민영의료보험의 활성화를 위해 의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해 놓고 있습니다. 이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 의료제도는 민영의료보험 회사들이 의료제도를 사실상 지배하는 미국식 시장주의 의료제도로 재편되게 됩니다.
지금도 외국계 민영보험 회사들은 국내에서 민영의료보험 영업을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미FTA 협정문에 굳이 의료시장 개방을 기술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결과는 동일한 것이니까요. 아마도 이것을 협정문에 넣었으면 우리 국민들이 금방 참여정부가 추진하는 ‘의료시장주의’의 본질을 알아채고 더 격하게 저항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실손형 민영의료보험(질병이 발생할 경우 계약시 약정한 금액을 지급하는 정액형이 아니라, 실제 의료이용에 소요된 비용을 지급해주는 의료보험 상품)은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는 의료서비스의 ‘법정 본인 일부부담금’을 보장해주는 제도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실손형 민영의료보험 상품은 보건의료 관련 법령이 아니라 경제부처의 법률인 ‘보험업법’에 근거해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2006년 말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는 더 이상 민영의료보험이 국민건강보험의 법정 본인부담금을 보장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결정을 하였으나 여전히 보험업법은 과거 모습 그대로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 한미FTA 협정이 국회의 비준을 얻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국민건강보험은 더 이상의 보장성 확대 조치를 단행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투자자 국가 소송제도’ 때문입니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확충을 원만하게 추진하려면, 보험업법을 개정해서 실손형 민영의료보험이 법정 본인 일부부담금을 보장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한미FTA 협정 비준 이후에 이것이 가능하겠냐는 것입니다.
현재 겨우 62%인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을 선진국의 평균 수준인 85%로 확충하려면, 당연히 국민건강보험이 실손형 민영의료보험의 시장영역을 대폭 침식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 경우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민영보험 회사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민영의료보험 회사들에겐 무한한 기회의 땅, 광활한 의료시장 대한민국이 열리게 될 것인데 민영의료보험 회사들이 이를 포기하려 들지 않을 것은 자명합니다. 이 때 쯤 ‘투자자 국가 소송제도’가 작동할 것입니다.
노 대통령께 호소합니다, 약속을 지켜주세요
▲ 지난 4월 7일 ‘의료법 개악 중단, 한미FTA 협상 무효화’를 요구하고 있는 집회 참가자들.
ⓒ 보건의료노조
한편, 한미FTA 협정으로 인한 의약품 분야의 손해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저는 제약업계의 손익은 굳이 논의하지 않더라도, 장차 국민의 약값 부담이 엄청나게 증가할 것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는 앞서 언급한 참여정부의 시장주의 의료서비스 산업화 정책과 함께 작동하여 국민의료비의 폭발적 증가와 의료이용의 처참한 양극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저는 ‘사회비전 2030′을 발표한 대통령께 호소합니다. 사회비전 2030이 제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대통령이, 대한민국이 장차 성장과 복지가 통합적으로 발전하는 최소한의 인간적 사회라도 되기를 바라신다면, 유시민 전 장관이 국회에 제출한 반 국민의료, 반 건강적인 의료양극화 법인 의료법 개정안을 거둬들이십시오.
그리고 작년 연말에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의 결정사항인 ‘민영의료보험이 국민건강보험의 법정 본인부담금을 보장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내용을 당장 보험업법에 반영해 주십시오. 동시에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을 80% 수준으로 끌어 올리겠다는 공약을 지켜주십시오.
이것이 힘들다면, 참여정부 3년차 때 보건복지부가 국민과 언론에 공개 발표한 ’2008년까지 국민건강보험 보장성 72% 달성’ 약속이라도 지켜주십시오. 현재 보장성은 겨우 62% 수준입니다.
모든 국민이 염원하는 바와 같이, 대한민국은 장차 능동적 복지국가로 창조적 발전을 해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보편적 복지가 기본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보건의료는 복지국가의 가장 중요한 보편적 요소입니다.
의료서비스 영역의 산업적 요소를 이 분야의 ‘고용창출’로 본다면, 미국식 의료시장주의가 아니라 유럽식 사회적 시장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미국 방식 이상의 성과를 낼 수 있음을 명백히 밝히고자 합니다. 국영보건의료체계(NHS)를 가지고 있는 영국은 병상당 고용자 수가 5.7명으로 미국의 4.8명 보다 많습니다.
아이들에게 잔혹한 양극화 사회를 물려줄 것인가
이제 우리는 의료서비스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미국식 의료시장주의 추진 시도를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의료법 개악 시도, 기존의 문제투성이 보험업법 고수를 통한 민영의료보험의 활성화, 국민건강보험의 취약한 보장성 유지, 참여정부의 자발적 미국식 의료시장주의 추진, 한미FTA 협정이라는 졸속적 개방 전략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되돌리기 어려운 처참한 의료양극화 대한민국을 향해 내달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식들에게 잔혹한 양극화 사회가 아닌 능동적 복지국가를 물려주기를 원하는 모든 국민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를 달성하고 민주사회를 자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군사정부에 저항하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던 87년의 경우처럼, 2007년 현재 우리는 사회 양극화 저지를 위해, 사회경제 민주화 쟁취를 위해, 능동적 복지국가의 창조적 건설을 위해 다시 우리 모두의 힘을 모아 나가야 합니다.
이상이 기자는 제주대 의대 교수이며, 건강보험연구원 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복지국가SOCIETY의 홈페이지(www.welfarestate.net)의 칼럼란인 Weekly Foc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